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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46)화 (4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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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현은 드디어 누나와의 약속을 얻어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은정이라는 에스퍼가 좀처럼 누나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현에게는 이번 기회가 소중했다.

-누나, 내일 시간 괜찮아? 내가 좀 알아본 게 있는데…!

-응, 내일 만나자. 시간 괜찮아.

알아낸 정보가 있다고 했으니 누나는 혼자 올 것이다. 태현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한참 옷을 골랐다. 너무 귀여워 보이지 않으면서도 신경 쓴 것 같지 않은 옷을 찾기 위해서였다.

태현은 고르고 골라 남색 스트라이프 셔츠에 통이 큰 검정 슬랙스를 입고 나갔다. 서연은 태현을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칭찬을 했다.

“이 옷 입으니까 귀엽다!”

“그, 그래?”

태현은 속으로 조용히 욕을 짓씹었다. 인터넷에서 분명 잘생겨 보이는 코디라고 했는데!

태현의 마음과는 반대로 서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태현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돈가스를 전문으로 파는 식당이었다.

어쩐지 태현은 계속 어린애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자신이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고는 맛있게 먹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 통 못 봤잖아.”

태현은 서운하다는 듯 말꼬리를 늘였다. 서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잘 지내고 있어. 은정이가 민재 선배 일로 좀 힘들어해서 그렇지.”

“그 선배가?”

“응. 자책이 심한 편이라 뭐든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덩치 크고 사람 휙휙 던지던데 무슨. 약한 척하는 거 아니야? 태현은 매일 서연의 곁에 붙어서 은근하게 소유욕까지 드러내는 그 선배가 싫었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누나가 눈치챈다면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바뀔 거라는 걸 알았다. 태현은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누나 조만간 시간 나? 우리 같이 휴가 받아서 어디 근방이라도 갈까? 나 월급 나오니까 내가 쏠게!”

“아무래도 내가 출장이 잦아서 휴가가 쉽게 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정 될지 볼게.”

돌려서 말하는 거절이었다. 그래도 서연은 다정했다. 태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식사를 마치고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여기 사진.”

태현은 서연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혹시 문 여는 시스템이 어떤지도 보였어?”

“전용 카드나 지문인 것 같아. 근데 너무 근처로 다가가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아서… 미안.”

“아냐, 괜찮아.”

서연은 사진을 확대해 꼼꼼히 살폈다.

“거기 뭐가 있는 거야?”

“아직 정확하지는 않아…. 태현아, 너 그… S급한테 들은 이야기 있어?”

“박지환? 어떤 거?”

“음… 이번에 민재 선배님 다치시고 나서. 뭐가 이상했다거나.”

“그냥 정신이 나간 것 같기는 하던데… 지금 누나가 알아보는 것과 관련이 있어?”

“…어쩌면.”

서연과 태현의 관계는 주로 태현이 질문을 하면 서연이 회피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일상적인 질문도, 일적인 질문도 서연은 교묘하게 피해갔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서연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면, 서연이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태현은 적당히 배제되었다.

제대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태현은 답답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명령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현은 이따금 심술이 일었다.

“나 누나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데 일 이야기만 하다 가네.”

“…미안해. 서운했어?”

“누나한테는 나랑 보내는 시간이 별로 안 소중한가 봐.”

미운 말이 나갔다. 태현은 말을 뱉자마자 후회했다. 서연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당황한 듯했다.

“많이 서운했구나. 미안해.”

서연은 꽤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했다. 태현은 그것에 상처를 받았다. 차라리 눈앞에 있는 커피를 자신한테 끼얹으면서 화를 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안해, 누나. 자꾸 애처럼 굴어서.”

“아니야, 내가….”

“누나, 기억나? 나 옛날에 처음 우유 먹고 맛있다고 이 리터 한 번에 먹었다가 울면서 병원 갔잖아.”

태현은 황급하게 말을 돌렸다. 눈앞에 라떼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연은 그런 태현을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기억나지. 너 병원 가기 전에 몇 시간을 변기 위에서….”

“아악! 치사해!”

“그래도 이제는 잘 먹으니 다행이네.”

서연이 그때 생각을 하는지 쿡쿡거리며 웃었다. 태현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라떼를 들이켰다. 달콤하고 쓴맛이 목구멍 안쪽에 남았다.

***

민재는 회의실로 제1팀을 모두 호출했다. 오랜만에 하는 정식 팀 회의였다. 지환은 어차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으니 부를 필요도 없었다.

“저… 혼나요?”

갑작스레 회의실로 들어가는 민재에게 지환이 물었다. 저번에 멱살 잡혀 들어갔던 것을 떠올리고 말하는 듯했다. 어이를 조금 상실한 민재가 헛웃음을 짓자 지환이 눈치를 보았다.

“왜. 혼나고 싶냐?”

“아뇨.”

지환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민재는 회의실 중앙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환이 자신의 옆에 앉으려는 걸 제지했다.

“넌 저기 앉아.”

민재는 회의실 구석을 가리켰다. 지환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으나 꿈쩍하지 않는 민재의 손가락을 보고는 미적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잠시 뒤 팀원들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지환은 대충 상황을 파악한 것인지 조금 편한 얼굴이 되었다.

은정은 지환의 옆자리에 착석했다. 지나치면서 지환을 슬쩍 노려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선배님, 이제 몸은 괜찮으세요?”

호영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민재는 멀쩡하다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얼마 전 까마귀 쪽에 잠복할 일이 있었다.”

민재가 입을 열자 은정의 눈이 커다래졌다가 가라앉았다. 저거 또 땅 파겠네. 민재는 한숨을 삼켰다.

민재는 우선 까마귀의 세력이 커지고 있다는 것과, 잠복 당시 그곳에서 위험 상태에 놓인 아이들을 발견했으나 빼낼 도리가 없었다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며칠 뒤에 까마귀 쪽에서 대규모 시위를 할 것이라고 신고가 들어온 것을 확인했어.”

“…….”

“나는 시위대 쪽 인원으로 가고 너희는 까마귀로 간다.”

“구조 명령 맞나요?”

지환의 목소리가 조금 들떴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구할 수 있는 애들은 전부 구조하는 쪽으로 해.”

“네!”

지환의 대답이 우렁찼다. 호영도 나름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를 마친 후 민재는 은정을 남겼다. 또 주춤거리는 지환에게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허튼 생각 하지 마.”

민재의 말에 은정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미안해. 은정이 작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민재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네가 왜 사과를 해?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화낼 거야, 나.”

“…응.”

“뭣하면 넌 그냥 빠질래?”

“막내 둘만 어떻게 보내….”

“그래, 잘 아네. 혹시나 흥분해서 일 그르치면 안 돼. 네가 거기선 팀장이나 다름없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은정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는 은정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선배.”

“응?”

작은 목소리로 민재를 부른 은정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숙였다. 민재는 은정이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가만히 은정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 아이들이 여기 오는 게 나은 거겠지?”

은정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민재는 순간 자신과 은정을 비롯한 센터 아이들의 유년을 떠올렸다. 그것은 결코 행복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죽음에서 벗어나도 원하는 삶을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재는 그 아이들이 그 상태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유지하다가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나은 걸로 해보자.”

반쯤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은정이 민재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대어왔다. 응. 작은 목소리로 은정이 대답했다.

***

지환은 숙소에 들어온 후로 계속 전화기를 붙들고 있었다. 지환은 오늘 회의가 끝나고 민재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선배가 소집한 팀 회의에서 아이들을 구출하자는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기쁘기만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했던 여러 망언이 떠올라 회의에서 말을 더 하지 못했다.

전화를 해도 될까? 사과드리는 게 맞겠지. 결심한 지환은 민재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계속해서 신호음이 이어졌다. 민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시나? 지환은 잠시 기다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신호음만 이어졌다.

지환은 메시지를 남기라는 목소리가 나오면 다시 전화를 거는 일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숙소에서 나가셨나? 무슨 일이 있나?

지환의 머릿속에 상처투성이로 쓰러진 민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지환은 숙소 창문을 열고 날아올랐다. 그러고는 이전에 찾아내었던 민재의 숙소 창문 앞을 기웃거렸다. 쳐져 있는 커튼 틈 사이로 방 내부가 보일 듯 말 듯 했다.

창문에 코를 박다시피 한 지환은 눈을 열심히 돌리다가 테이블에 얼굴을 박은 채로 쓰러져 있는 것 같은 민재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환은 창문을 벌컥 열었다. 민재의 방 창문은 잠겨 있지도 않았다. 방 안으로 몸을 날려 착지한 다음 지환은 민재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선배님, 선배님!”

“어….”

민재가 웅얼거리듯 답했다. 지환은 그제야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술병을 발견했고, 민재에게서 알코올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술 드셨구나. 지환은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환은 조심스럽게 민재를 안아 올려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려고 이불 끝자락을 잡아 올리던 참이었다.

“뭔데… 이거. 뭐냐고.”

민재가 말했다. 잠꼬대라고 하기에는 꽤 정확한 발음이었기 때문에 지환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이불이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민재가 정말로 일어났으면 자신이 왜 여기 있는지부터 따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조금 민망해졌다.

“뭐냐고! 나한테 뭘….”

민재가 순간적으로 큰 소리를 냈다. 지환은 놀라 민재의 얼굴을 살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민재는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러다가 최대한 몸을 말아 웅크렸다.

“선배님…?”

지환은 민재의 팔을 살짝 잡아보았다. 그러자 민재가 눈에 띄게 몸을 더 움츠렸다. 지환은 놀라 민재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뭔가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지 민재의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있었다. 지환은 자신의 옷소매로 민재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민재의 이마가 살짝 펴졌다. 민재의 숨이 고르게 쉬어지는 것을 확인한 지환은 조심스레 이불을 정리하고는 다시 밖으로 날아올랐다. 커튼을 치고 창문을 꼼꼼히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환은 닫힌 창문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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