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우석은 열 번째 울리는 알람을 껐다. 민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밤사이 한 시간 간격으로 맞춰둔 알람이었다. 그는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 민재의 손목과 안색을 살핀 다음 다시 눈을 붙였다.
열 번의 알람이 울리는 동안 민재는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잤다.
원래 이런 타입인 걸 알아서 매번 깨우러 왔으면서도, 한번 잠들기만 하면 죽은 듯이 자는 민재가 신기하긴 했다.
잠을 잘 때는 귀가 자동으로 막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우석은 민재의 손목을 살폈다. 초록색의 양호 표시를 확인한 우석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이 뻑뻑했다.
“민재야.”
우석이 민재를 불렀다. 역시나 민재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우석은 민재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우민재.”
“어어.”
민재는 웅얼거리며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우석은 좀 더 세게 민재의 몸을 짤짤 흔들었다.
“일어나자~ 민재야~”
“어어….”
민재는 덮고 있는 이불을 끌어 올린 다음 몸을 말았다. 달팽이 같았다. 덥지도 않냐. 우석은 피식 웃고는 거듭 민재를 흔들어댔다.
계속 재워주면 좋겠지만 출근은 해야 했다. 우석은 가는 눈을 뜨고 민재를 바라보다가 경고했다.
“커튼 연다?”
“으어…!”
달팽이는 몸을 꿈틀거리며 저항했다. 그러나 우석은 빠르게 셋을 센 다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방의 암막 커튼을 빠르게 열었다. 빛이 방으로 내리꽂히자 민재는 몸부림쳤다.
그렇게 겨우겨우 민재를 일으킨 우석은 화장실로 들여보냈다가 잠옷이나 다름없는 늘어진 티셔츠로 출근하려는 민재의 옷을 골라주기까지 해야 했다.
자신이 지금 애를 키우는 건지 헷갈릴 때쯤, 우석은 민재를 데리고 밖으로 향할 수 있었다.
신발을 신은 우석은 현관문을 먼저 열어젖혔고, 문 바로 앞에 벽처럼 서 있는 누군가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을 뻔했다.
“뭐야.”
우석은 고개를 들어 남의 현관 앞을 지키고 있는 또라이를 확인했다. 박지환이었다. 꽤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이었다. 평소 짓던 표정과는 꽤 달랐다.
그 순간 민재가 우석을 뒤로 휙 잡아챘다. 그러다가 민재도 지환과 박치기를 할 뻔했다.
“뭐야?”
민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환의 눈이 흔들렸다. 지환은 무언가에 큰 충격을 받은 듯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두 분 왜… 같, 같이….”
지환은 처음으로 말을 더듬거리기까지 했다. 누가 보면 우석과 민재가 나라를 팔아먹는 공작을 하는 걸 목격해 버렸다고 생각할 정도의 표정이었다.
당황한 우석이 대충 손사래를 쳤다.
“아무 일도 없었어!”
민재는 인상을 찌푸리고 우석을 째려보았다. 그딴 변명은 대체 왜 하냐는 뜻 같았다. 넌 쟤 표정이 안 보이냐! 우석은 억울했다.
지환은 자신의 방금 질문이 이상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작게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그, 오늘 일정 있으시다고 들어서요.”
근데? 라고 민재의 얼굴이 묻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우석은 둘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지환은 오해의 여파가 다 가시지 않은 것인지 눈의 초점이 이상했다. 어딜 보는 거야? 우석은 지환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어깨 위에 얹어져 있는 민재의 손을 발견했다.
“제가 동행할게요.”
“…네가 왜?”
민재의 꽤나 차가운 반응에 지환은 당황한 듯 멈칫했다. 그러고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았다. 멘탈이 꽤 나간 듯했다.
이놈 봐라? 우석은 가볍게 민재의 허리 쪽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지환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은근히 삐딱하게 우석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참나. 우석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민재의 등을 살짝 밀었다. 지환의 몸에 어깨를 살짝 부딪친 민재는 우석을 더 무섭게 째려보았다.
“그래, 네가 민재 이동할 때 잘 보좌 좀 해라.”
“야.”
지환이 우석의 말에 얼굴을 조금 폈다.
민재는 우석을 불렀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그런 말이 딱 적힌 얼굴이었다.
우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은 박지환이 민재를 해할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았으니 둘이 어떻게 지지고 볶든 사이에 끼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좀 재밌는데. 우석은 지환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지환은 작게 움찔했다. 역시 재밌네. 민재를 지환에게 넘긴 우석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
민재는 화장실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손을 씻은 다음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열을 식히기 위함이었다.
아침 현관문 앞에서부터 박지환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자신이 괜찮은 상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출근은 필요했다. 자신만 아는 정보를 뺀 보고서를 작성하고,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받는 업무를 하는 동안 사무실 밖에서 서 있거나 복도에서 딱 붙어서 따라오거나 했던 것이다.
“돌겠네, 진짜….”
다른 에스퍼들도 뭔가 좀 웃기다 싶었는지 복도나 로비에서 민재와 지환을 힐끔거렸다. 민재는 그런 시선은 딱 질색이었다. 화장실은 조금만 더 있으면 분노에 못 이겨 복도에서 후배를 걷어찰 것만 같아 선택한 도피처였다.
민재는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지환은 문 바로 코앞에 서서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거의 노려보다시피 하면서 주위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뭘 찾나?
“선배님, 괜찮으세요?”
민재를 발견한 지환이 물었다.
“뭐가.”
“너무 오래….”
지환은 말을 하다가 멈추었다. 킥. 지나가던 누군가 듣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민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민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환의 멱살을 잡아챈 뒤 근처 회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야, 너 뭐 하자는 건데?”
“네?”
지환은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환장하겠다. 민재는 잡고 있던 지환의 옷을 거칠게 놓았다.
“뭐냐고?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는 거 그만하라고. 뭘 원하는데?”
“뭐가 문제인 거예요?”
지환이 삐딱하게 물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민재를 빤히 쳐다보며 자꾸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모양새가 뭘 자꾸 탐색하는 것 같기도 했다.
감시? 순간 민재의 머릿속에 이렇게 되기 전 지환과의 관계가 떠올랐다.
지금 혹시 그때의 앙금이 남아 있어서 날 이상한 쪽으로 의심하나? 아니면 애들 구하는 문제로 압박을 주고 싶은 건가?
“페어잖아요. 같이 다니는 데 문제 될 것이 있나요? 우석 선배님도 저에게 당부를 하셨고….”
“아니, 페어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경우는 없어.”
“있던데요?”
어떤 미친 새끼들인데. 조만간 애들 기강 잡으라고 은정이한테 말해야겠다. 민재는 이를 갈았다.
“선배님을 잘 보조하는 게 제 역할이니까. 저는 제 일을 할게요. 선배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히어로 운운하던 자식이 갑자기 보조를 자처하는 게 말이 되나?
“너 머리 다쳤냐?”
“네? 아뇨.”
민재의 진지한 질문에 지환이 어이없어했다. 보통은 반대의 경우였기 때문에 민재는 조금 민망하고 짜증이 났다.
“…선배님이 그렇게 힐을 퍼부으셨는데 아플 리가 있나요.”
묘하게 빈정거리기까지?
“그만해라.”
“…뭘.”
“그만하라고. 그냥 말을 해. 살려놨더니 계속 따라다니면서 일하는 거 방해나 하고, 빈정대는 이유가 뭐냐고.”
“제가….”
지환은 무언가 말할 듯하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본인도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회의실 탁자만 빤히 노려보던 지환은 괴상한 답을 내놓았다.
“…무서워요.”
뭐? 민재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곧바로 다물었다. 지환은 무섭다는 말을 내뱉고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오만상을 찌푸린 채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은 공포에 질린 것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민재가 겉모습만 보고 속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트라우마가 생겼나? 그럴 수도 있었다. 어쨌든 본인이 정말로 죽을 뻔한 건 처음일 테니까.
“선배님이 안 보이면 좀… 불안해요.”
민재는 복잡한 마음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정말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면 자신을 잠시 쫓아다니는 것으로 해결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려면 조 박사 쪽에도 가서 뒤져볼 필요가 있는데 지환을 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
어찌 되었건 자신 때문에 같이 격추당한 것인데 매몰차게 대할 수는 없었다. 민재는 애매한 긍정의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지환의 얼굴이 빠르게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저… 실장님 여기 저희가 예, 예약을….”
지환이 대뜸 씩씩한 감사 인사를 해 좀 불안해지던 찰나, 누군가 회의실 문을 빼꼼 열고는 소심하게 말했다.
아. 작게 탄성을 내뱉은 민재는 빠르게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바로 뒤에 지환도 따라붙었다. 민재는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꾹꾹 눌렀다.
***
태현은 꽤 오랜 기간 동안 시간이 될 때마다 창문이 없는 수상한 건물을 살피고 있었다. 누나의 부탁이니 최대한 빠르게 들어주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정말 저 건물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저번에 에스퍼실장이 이 근처에서 어슬렁댄 것을 본 뒤로 다른 누군가가 저기로 들어가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이쯤 되면 센터가 재력을 과시하려고 만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 기념비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돌겠네….”
그러나 서연은 분명 태현에게 저것을 ‘건물’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들어갈 방법을 알아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것은 서연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태현은 잠시 고민하다 흙바닥에 대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별 기대는 없었으나 역시 별다른 흔적이 드러나지도 않았다.
오늘도 허탕인가. 태현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때였다.
건물의 한쪽이 조금 열리면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괴상한 고글을 쓰고 가운을 입은 남자는 오랜만에 햇빛을 보는 듯 나오자마자 손을 고글 앞으로 펼쳐 잠시 서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현은 몸을 더 숨기며 남자의 움직임을 쫓았다.
남자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수풀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행동을 조금 하고 무언가 살피는 듯하다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건물로 사라지기 전, 태현은 몰래 사진을 찍었다. 적어도 어느 면이 문인지는 알겠군. 태현은 주위를 살펴보고는 빠르게 숙소로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