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늦은 밤, 누군가 민재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민재는 낮에 내내 이상한 태도를 보이면서 열 받게 하다가 우석에게 쫓겨났던 지환은 떠올렸다.
사과나 뭐, 변명이라도 하려나. 또 술을 처먹고 온 것이라면 발로 까주겠다고 마음먹으며 민재는 문을 열었다.
“…뭐야?”
문 앞에는 퀭해 보이는 우석이 서 있었다. 우석은 난데없는 푸대접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뭐냐고…?”
“아니, 왜 노크를 해. 비밀번호 알잖아.”
“…그냥. 너 잠들어 있으면 좀 그럴까 봐.”
늘 자고 있을 때 들어와서 깨우는 게 누군데. 본인이 말하고도 머쓱한지 우석은 괜히 현관 아래쪽을 살피고 있었다.
“왜. 뒤져 있을까 봐?”
“제발 좀!”
민재가 정곡을 찌르자 우석은 질색을 하며 노려보았다. 이제야 제대로 눈을 맞추는 우석에 민재는 얄미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우석은 못마땅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현관 안으로 들어서며 문을 닫았다. 민재는 안으로 들어가 다시 침대에 늘어져 누웠다. 우석은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아 민재의 손목을 살폈다.
“가이딩은 괜찮네.”
“어, 그렇더라.”
우석은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민재는 그 꼴을 마주하고 있다가 발로 우석의 옆구리를 쿡쿡 쑤셨다.
“악! 왜 이래, 새끼야.”
“뭔데. 뭔 이야긴데 그렇게 분위길 잡아.”
“아니, 할 이야기가 있긴 한데… 지금 너한테 말하는 게 맞는가 싶고….”
“왔으면 그냥 하세요, 실장님.”
안 어울리게 소심한 척이야. 민재의 말에도 잠시 뜸을 들이던 우석은 이윽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센터에서 가이딩 약품이 새어 나가고 있었어.”
“…어떻게?”
“그것까진 아직 모르고… 장부가 이상해서 좀 알아봤는데. 아니지, 서연이가 알아다 줬어.”
“이서연?”
그 은정이 가이드? 민재가 묻자 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달 차량에서 약품 한 상자를 안 내리더래. 따라가다가 놓쳤다는데 차가 향한 방향을 생각해 보니까….”
우석은 말을 하다가 말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너 그때 잠복 갔을 때 센터장이 나를 찾았어.”
“센터장이? 왜.”
“너 어디 있냐고. 위험할 거라고 그러더라고.”
센터장이 민재 때문에 우석을 불러다 들들 볶아대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 경고를 했다고? 그건 좀 이상했다.
“그래서 너 위치추적을 했는데… 그때 얻은 위치 정보가 있거든?”
“약품이 새어 나가는 곳이 그 위치였다?”
“아마도. 하… 내가 실수한 것 같아. 너 거기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간다고 했잖아.”
우석은 자신 때문에 민재가 노려지는 것 같다며 자책했다. 민재는 한껏 숙인 우석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거기까진 이서연한테 말 안 했지?”
“어. 안 했어.”
“걔 능력 좋네. 가이드실 실장은 좋겠어.”
“참나.”
우석의 말을 듣고 보니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있었다. 까마귀로 조달되는 약품의 출처가 센터였다니. 그쪽에서 공급책을 뚫은 것일까 아니면 내부에서 누가 갖다 바치는 것일까.
규모가 클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나 생각보다 더 보통이 아니었다. 더 파봐야겠다고 민재는 생각했다.
우석은 고개를 들고는 민재와 눈을 맞췄다.
“진짜, 진짜 조심해서 다녀.”
“뭐?”
“노려지고 있잖아, 너.”
우석의 표정은 진지했다. 민재는 격추당했을 때 보았던 검은 깃털을 떠올렸다.
그렇다면 그때 까마귀의 본거지에 잠입했던 것이 우민재 자신임을 그쪽에서 눈치챘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아이들은? 민재는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내가 어떻게 좀 알아볼 테니까 넌 당분간 좀 조용히 사리고 다녀.”
“…….”
“알겠냐고.”
“알았어, 영감.”
민재의 성의 없는 태도에 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냐. 그렇게 한탄을 한 우석은 민재 옆에 드러누웠다.
“자고 간다.”
“…그러든가.”
민재는 다크써클이 내려온 우석의 얼굴을 보고는 몸을 일으켜 불을 껐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
“대체 어떤 새끼지?”
은정은 방 안을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몇 번이나 벽에 부딪힐 뻔해서 서연이 은정의 이름을 부르거나 잡아주어야 했다. 서연이 은정을 숙소로 데려온 후로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은정아, 우선 좀 앉자.”
“응? 아아… 응.”
서연은 은정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다가 갑자기 꿈쩍도 하지 않는 은정 때문에 되려 그녀 쪽으로 끌려가 섰다.
“…은정아?”
서연이 웃으면서 은정을 바라보았다. 어어? 은정은 화들짝 놀라 서연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연을 따라 침대에 앉았다.
어떤 간 큰 놈이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언제부터 계획된 것일까. 은정은 자신이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거기다 지금도 짚이는 바가 없다는 사실도.
은정은 오늘 하루 종일 난리를 피우며 다녔다. 민재가 비행 시연 중 격추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부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망할 센터는 여러 가능성 따위를 운운하며 은정이 출동하게 놔두질 않았다. 은정은 센터장실 앞에서 난동을 피우며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윤 비서를 들들 볶다가, 혼자라도 출동을 하겠다며 설치고 다녀 서연이 잡으러 와야 했다.
“내가 너무 멍청한 것 같아. 내가 너무 싫어. 서연아….”
은정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연은 은정보다 훨씬 작은 체구로 은정을 꼭 안아왔다.
“그러지 마, 은정아. 오늘 하루 종일 이렇게 스스로를 혹사해서 아프면 어떡해….”
서연은 은정의 볼을 쓰다듬었다.
“선배님 상태가 많이 안 좋았어?”
“…아니. 내가 들어갔을 때는 깨어 있었어.”
은정은 병실에 들어서기 전, 조그만 창으로 봤던 민재의 모습을 떠올렸다. 민재는 멀쩡해 보였다.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팔다리를 움직이는 데도 문제없어 보였다.
다만 군데군데 찢어진 옷과 여기저기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의 몸이 얼마나 여러 상처를 입었었는지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히 알고 노린 거겠지? 이건 우연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 같은 게 아니잖아.”
“…그렇지.”
은정의 말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새끼가 이렇게 대담하게 미친 짓을 할 수 있지? 대낮에 국가를 대표하는 에스퍼를 공중에서 쏴서 떨구는 짓을?”
“어쩌면 그게 목적이었을 수 있을 거 같아. 보여주는 거.”
대놓고 보여준다고? 무엇을? 서연의 말에 은정은 잠시 멍해졌다.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센터의 대표 에스퍼를 꺾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는 건가?
“그만한 능력이 되는 자가 나타났다는 거네. 개인이거나 혹은 단체가?”
“능력… 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심이 가는 데가 있어?”
은정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근데 내 말은 그냥 다 추측일 뿐이라….”
“뭐든 상관없어. 다 안 믿을게! 말해주면 안 돼?”
은정은 지금 어떤 정보라도 필요했다. 오늘 하루 내내 멍청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을 견딜 수가 없었다. 서연은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최근 센터에 대해 혐오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곳이 있어. 에스퍼에 대한 부정 여론을 형성하고 있기도 하고. 최근에 학교에서 테러 사건도 있었잖아.”
“…….”
“그 단체가 단순히 종교단체는 아닌 것 같아. 센터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어. 저번 일도 있다 보니 그쪽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딱 민재 선배님을 노린 것도 그렇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그냥 내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니까.”
“아냐, 말해줘서 고마워.”
서연이 민망한 듯 웃었다. 은정은 오늘 날뛰는 자신을 돕고 진정시키느라 고생한 친구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조금 쉬라며 서연을 숙소까지 데려다주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서연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다.
은정은 혼자 천천히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머리가 울렸다.
까마귀. 서연이 말한 곳은 까마귀라는 사이비종교 단체였다. 은정은 그곳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은정아. 다 나을 수 있어. 엄마가 그렇게 할게.”
은정의 부모는 까마귀를 믿는 신자였다. 또래에 비해 몸이 너무 크고 힘이 센 은정이 그들을 까마귀라는 단체로 향하게 했다.
은정은 등굣길에 쓰러져 센터에 들어오기 전까지 매일 밤 나무로 된 작은 상자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야 했다. 더 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은정의 모친은 이상한 기도문을 읊으며 자고 있는 은정의 상자를 두드렸다.
“너 때문에! 너를 위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은정은 늘 배가 고팠다. 울면 엄마가 화를 냈기 때문에 잘 울지도 못했다.
그 후로 은정은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모친이 심어준 습관이었다. 그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은정에게 몸이 큰 건 나쁜 게 아니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민재였다.
여자아이가 너무 큰 키에 덩치를 가졌으니 센터 내에서도 많은 시선이 쏠렸다. 은정은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너 되게 귀엽다.”
그런 은정을 자신과 똑같은 또래 아이로, 심지어 동생으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이 민재였다.
민재는 어릴 때부터 자신보다 키가 컸던 은정을 정말 여동생처럼 대해줬다. 예쁘다거나 귀엽다거나 은정이는 겁이 많으니까 지켜줘야 된다거나.
지금 다른 사람에게 들으면 불쾌했을 법한 소리였지만 그때 당시에는 모두에게 괴물 취급을 받던 은정에게 필요했던 말들이었다.
은정은 민재의 다정함에서 평범의 범주에 속하는 위안을 받았다.
“그게 왜 네 탓이야?”
“괜찮아, 은정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언제나 민재였다. 은정에게 민재는 오빠와 아빠의 사이쯤, 가족보다 소중한 어떤 것이었다.
은정의 부모는 아직 까마귀를 믿고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면회에서 매번 아직까지 믿고 있다느니 너를 위해 기도를 한다느니 하는 소리만 지껄이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면회를 받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는 민재의 말에 꾸역꾸역 응했던 것이다.
자신의 부모도 알고 있었을까. 혹은 동의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앞장서서 그 계획을 추진했을까? 앞으로도 그런 짓을 계속할까? 자신들의 딸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것들에 복수하기 위해서?
은정은 겁이 났다. 민재 선배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건 자신 때문일 것이다.
민재 선배도 알고 있었을까? 알게 된다면 나를 어떻게 보게 될까. 온갖 생각들이 은정을 괴롭혔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은정은 몸을 웅크렸다. 잠을 청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