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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40)화 (4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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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은 위스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서연과의 만남을 끝낸 후 우석은 평소와 달리 조기 퇴근을 하고는 바로 향했다. 오준과 술을 마셨던 바였다. 오늘은 술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등급 하나로 꿰찬 실장 자리라지만 그래도 나름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우석은 물품이 비고 있었던 걸 늦게 발견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잘리지 않아도 되는 직장을 거저 얻어서 히어로 놀이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문득 오준의 말이 떠올랐다. 비수처럼 콕콕 찔리는 말이었다.

“히어로 놀이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결국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히어로라는 게 문제였지만. 그러니까 놀이인가. 우석은 자조했다.

“그걸 또 곱씹고 있어요?”

우석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짜증 섞인 얼굴을 한 오준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우석은 조금 놀랐다.

오준은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를 빼 우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금 이거 사적인 자리예요?”

우석이 물었다. 지난번 센터장실 앞에서 오준이 했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오준은 우석의 술잔을 뺏어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쪽 말에 뼈가 많은 편인 거 알아요? 뒤끝도 좀 긴 편이고.”

“그쪽?”

우석이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럼 뭐 이쪽이에요? 방향감각도 없는 편이시네요.”

푸하. 우석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이렇게 신랄한 편이었어요? 말도 잘하고?”

우석이 물었다.

“아직 화가 안 풀려서요. 그쪽이 센터장 호출 이용해서 나 엿 먹이려고 했잖아.”

오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아.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거 진짜 아니에요. 그건 사정이….”

우석은 말끝을 흐렸다. 오준이 우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변명을 해보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석은 그 사정을 말할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의도치 않게 또 내가 민폐 끼치게 되었네요.”

우석이 사과했다. 그러자 오준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왜요.”

“…내가 한 말 마음에 담아두지 마요.”

“네?”

“히어로 놀이 그거요. 어쨌든 실장님은 노력이라도 하잖아요. 모르는 척하는 건 나지.”

그 말을 마치고 오준은 민망한 듯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우석은 그런 오준을 바라보다가 푸념 같은 질문을 했다.

“노력으로 될까요.”

“안 되겠죠.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해요.”

꽤 염세적인 위로였다. 그래도 우석은 위로를 받았다. 무작정 될 거라고 말하는 것보다 좋았다. 하루 종일 곤두박질치던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한테 오늘 왜 잘해줘요?”

“뭐라고요?”

오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바에 자리 많은데 왜 내 옆에 앉았어요.”

우석은 웃어 보였다. 아까 전에 들이켰던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오고 있었다.

“그건… 그쪽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 얼굴이 뭔데요?”

“뭐… 한강 다리에 있으면 순찰 돌던 경찰들이 다 차에서 내릴 거 같은 얼굴이라면 알아듣겠죠.”

“…지금 내가 범죄자 같다는 이야길 하는 건가요?”

우석은 알면서 딴소릴 했다. 내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나. 우석은 왠지 조금 민망해졌다.

오준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대꾸하지 않았다.

우석은 술을 홀짝이는 오준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되게 이상한 사람이다. 우석은 생각했다. 좋아졌다 싶으면 도망가고, 대뜸 사람 할퀴었다가 또 달래주는 사람.

“윤 비서님, 우리 무슨 사이예요?”

우석은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오준이 못을 박았다.

“근데 우리 잤잖아요.”

“닥쳐요.”

“아니 왜요. 여기 사적인 자리니까 나 공사 구분한 거 맞잖아요. 잘못한 거 없는데.”

우석은 오준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오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우석은 그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되살아나신 거 같으니까 이만 갈게요.”

우석은 일어나려는 오준의 팔을 끌어당겼다. 오준은 뿌리치거나 힘주어 당기지 않았다.

우석은 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냥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오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우석은 천천히 오준의 팔을 끌어당겼다.

***

민재는 머릿속에 참을 인을 되새기고 있었다. 마지막 비행 시연 훈련에 용케도 나와주신 후배님은 아까부터 좆같이 굴고 있었다.

지환은 온몸으로 민재와 훈련하기 싫다는 기색을 표출하고 있었다. 자꾸 허공으로 시선을 돌리는 바람에 비행 방향이 들어맞지 않아, 민재는 로프의 반동에 허리를 몇 번이나 꺾여야 했다.

하필 민재와 로프로 연결되어 있는 쪽이 지환의 왼쪽이라 민재는 자신이 어제 때린 지환의 뺨을 계속 마주쳐야 했다.

살짝 불그스름하게 뺨이 부어 있는 걸 보니 양심이 콕콕 쑤셨다. 아오 씨발. 어제 그러게 왜 치고 지랄해 가지고. 민재는 자책했다.

“잠시만.”

민재의 말에 지환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민재는 한숨을 삼키고는 지환의 뺨을 붙들었다. 지환은 고개를 비틀어 피하려고 했다.

“가만히 있어 봐.”

“괜찮아요.”

“내일 사람들 보는 데서 시연할 건데 부어 있음 안 될 거 아냐.”

민재의 말에 지환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민재는 지환의 얼굴에 힐을 주입했다. 지환은 민재에게서 얼굴을 살짝 돌린 채 허공을 째려보고 있었다.

“보여지는 것에 그렇게 신경 쓰는 분인 줄 몰랐네요.”

지환이 빈정거렸다. 아니 근데 진짜 이 새끼가. 민재는 방금 자신이 치료한 뺨을 한 대 더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그때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폭주 직전의 에스퍼의 경우 외부의 신체적 자극에도 예민한데 그것까지 고려해 한 명씩 소중히 안고 나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가이딩을 조절당하고 있던 에스퍼들은 능력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지 못했을 확률이 높았다.

가능성이 너무 희박한 데다 실패할 경우 까마귀가 둘의 정체를 완전히 눈치채 다시는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었다. 겉으로 조금 허술해 보일 수 있어도 조그마한 집단은 아니었다.

“하… 적당히 해라.”

민재는 이 상황을 넘기고 싶었다. 멋모르고 날뛰는 지환의 정의감에 동조해 주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그걸 굳이 제 발로 짓밟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환은 그럴 마음이 없는지 대답하지 않고 방향을 틀어 비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제멋대로 방향을 꺾었다. 민재와 미리 약속한 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야!”

결국 민재가 소리를 질렀다.

“시발. 이따위로 할 거면 집어치워!”

관제탑 상단부 위치에서 민재는 자신의 허리춤에 고정된 로프를 풀어버렸다. 평소와 달리 민재를 대충 붙들고 있던 지환은 그가 로프를 푼다고 버둥거리자 민재를 놓쳐 버렸다. 민재는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지환은 자신의 팔과 아래쪽을 보더니 눈의 크기를 키웠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민재를 따라잡기 시작했다.

“미쳤어요??”

지환은 민재를 낚아채 관제탑에 착지시키고는 소리쳤다.

“그래도 뒤지게 놔둘 정도는 아닌가 보네. 비행을 하도 좆같이 하길래 날 죽이고 싶은 건가 했지.”

민재가 말했다.

“히어로의 가장 기본 된 의무는 사람을 구하는 거니까요.”

지환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지환은 민재를 기본 의무도 지키지 않는 히어로라고 비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참 전형적이다. 민재는 갑작스럽게 피로감이 몰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난 히어로가 아니야. 됐냐?”

“…….”

“히어로인 너한테는 하찮아 보이겠지만, 비행 시연도 네가 맡은 임무니까 성실하게 임해.”

“지금 뭐라고….”

지환은 말을 하다 말고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자신의 화를 맞받아쳐 주지 않는 대상에게 억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민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환에게 로프를 건네다가 지환의 손목에 노란색 경고등이 들어온 것을 확인했다.

“내일 비행 시연하기 전에 가이딩 꼭 받고.”

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로프를 받아 들었다. 민재는 관제탑 문을 열고 걸어서 아래로 내려갔다.

***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파란 물감으로 얼굴에 날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민재는 비행 시연을 시작할 건물 옥상의 가림막 뒤에 서 있었다.

지환은 로프를 들고 걸어와 민재의 허리와 자신의 허리를 연결시켜 고정했다. 지환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로프를 당겨보며 풀어지지 않는지 확인을 하는 듯했다.

“가이딩은 받았어?”

민재가 물었다.

“약 먹었어요.”

지환은 짧게 대답하고는 앞을 바라보았다. 지환의 손목에는 초록색 등이 켜져 있었다. 상태는 양호하니 상관없었다. 민재는 고개를 돌렸다.

가림막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커졌다. 민재는 언제나 이 소리를 싫어했다.

[오늘 히어로 센터의 비행 시연 행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수많은 인파가 히어로와의 만남을 고대하며 광장으로 모였습니다. 얼굴에 그린 파란 날개는 히어로 센터의 상징으로, 수호하는 자를 뜻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커다란 전광판에서 뉴스 앵커의 말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행사 사회자의 목소리가 뒤를 잇듯이 울려 퍼졌다.

“여러분! 준비되었나요!”

팡파르 소리와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지환과 민재는 가림막을 헤치고 아래로 하강을 시작했다.

허공에서 민재와 지환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환호했다. 위험하지 않은 곳까지 하강한 지환은 방향을 급하게 틀어 다시 위쪽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 연습했던 대로 가로로 8자를 그리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이전에 연습했던 대로 지환의 비행은 깔끔했다. 방향을 틀 때 약간 긴장을 하며 자세를 고친 걸 제외하고는 민재가 특별히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다.

“손 흔들어주세요!!!”

누군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민재는 허공에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둘을 향해 끝없이 무어라고 외치고 있었다.

민재는 뭉치고 섞인 그 소리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지환을 슬쩍 바라보았다. 지환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면서 열심히 인사하고 있었다.

민재는 지환이 그렇게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이, 쇼에 불과한 이 모든 것을 기꺼워하는 것이 신기했다.

그다음은 구름 위쪽까지 올라가 2.5킬로미터 정도를 비행한 다음 다시 하강하는 순서였다. 사람들의 행렬은 광장과 이어지는 도로까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벤트처럼 사라졌다가 다른 곳에서 등장하는 방식이었다.

지환은 구름 위까지 날아올랐다. 공기가 살짝 차가워졌다. 바람이 조금 거세지고 있었다. 하필 바람의 방향이 반대라 둘은 저항을 이기며 비행해야 했다.

“괜찮겠어?”

민재가 물었다. 퍼포먼스를 잘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안전이 더 우선이었다.

“할 수 있어요.”

지환이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에 로프의 고리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둘의 로프가 흔들리면서 둘의 허리를 잡아당겼고, 지환과 민재의 궤도도 조금씩 흔들렸다.

윙윙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던 환호 소리도 잘 들려오지 않았다.

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하는 민재의 귓가에 작은 전자음이 들렸다. 삐- 하고 울리는 소리.

압력 때문에 생긴 이명인가. 민재는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으세요?”

지환이 무어라 말하는 것이 잘 들리지 않았다.

“잠깐만-”

하강하자. 그렇게 말하려던 민재의 눈앞에 하얀 빛이 터졌다. 엄청난 바람이 민재와 지환을 덮쳤다.

쾅!

뒤늦게 파열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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