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자, 웃어보세요! 스마일~!”
지환은 현재 비행 시연 홍보용 화보 촬영 현장에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박지환 씨? 너무 무서워요.”
지환은 울고 싶었다. 민재 선배를 길에 두고 온 게 그저께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그 순간에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와 민재는 걸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거기 있는 남자들을 때려눕힐 힘도 있는 다 큰 어른이었지만, 그 안에서 학대받고 있던 아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데리고 도망칠 수 있었다. 물론 시간이 빠듯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가능성보다 탈출 가능성을 더 고려했다. 히어로는 그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지환 씨가 민재 씨 어깨 위에 손 올려볼게요.”
“아….”
지환은 낮게 탄식했다. 민재는 오늘 아침 만났을 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제 지환은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저께 밤부터 언제든 불려 나가 얻어맞든지 된통 깨지든지 할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재는 지환을 찾지 않았다. 복귀를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지환은 나가서 민재를 찾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계속 가라앉았다.
그곳은 정확히 어디였을까. 왜 민재 선배는 그곳으로 향했나. 아이들을 구하러 간 게 아니었나? 지환도 그 종교단체의 사람들이 칭하는 ‘오염’이 에스퍼 발현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사이비남의 말에 민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지환은 왠지 그 순간 민재가 아주 낯설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구하러 간 게 아니라면… 그럼 설마 ‘오염’을 정화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지환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아무도 바라봐 주지 않는데 떼를 쓰는 아이가 된 것 같기도 했다.
오늘 아침 태현이 지환의 방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은 정말로 오고 싶지 않았다.
“민재 선배님이 너 좀 보재.”
안 가겠다고 버티는 지환에게 태현이 한 말이었다. 그 말 때문에 지환은 촬영장에 왔다. 욕을 듣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러나 민재는 촬영장에 지각한 지환을 힐끔 바라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지환은 자신의 옆 의자에 앉아 있는 민재를 빤히 쳐다봤다. 지환은 서 있는 자세였기 때문에 민재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그저께와 달리 다시 검게 돌아와 있었다.
지환은 그때 노란 머리를 한 민재와 있었던 일이 모두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환 씨 수줍음이 너무 많으시네. 촬영장 빌린 시간 다 쓰겠어.”
사진작가가 재촉했다. 지환은 민재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어휴, 둘 다 잘생겼다!”
표정이 굳어 있는 지환을 독려하려고 하는 것인지 사진작가는 계속해서 칭찬을 남발했다. 하하. 민재가 유쾌하게 웃었다.
지환은 민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입가가 예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지환은 배알이 뒤틀렸다.
사진 촬영은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지환이 계속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 재촬영을 해야 했다. 민재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환도 사과하지 않았다.
“광대 쪽을 더 늘려주세요.”
“깎아달라고요?”
“아뇨? 늘려주세요. 그리고 이마도 좀 눌러주시고요.”
“이마를… 요?”
지환은 민재와 사진작가의 대화를 근처에서 서성이며 듣고 있었다. 그런데 민재의 요구가 이상했다.
눈의 크기를 키워달라거나 턱을 날카롭게 깎아달라거나 하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자꾸 얼굴을 납작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왜… 왜요? 이러면 잘생긴 얼굴이 이상하게 변할 텐데?”
사진작가는 의아해했다.
“전 이런 걸 좋아해요. 실물이 낫다는 칭찬을 좋아해서.”
민재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듣고 있으려니 기가 찼다.
지환은 민재가 자주 모자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신도 처음 민재와 마주쳤을 때 화면에서 보던 것과는 얼굴이 미묘하게 달라 실수를 저지르기까지 했다.
그게 이렇게 만들어지는 거였어? 지환은 억울함을 느꼈다.
SSS급 히어로 우민재는 만인에게 존경받는 히어로다. 그런데 얼굴을 가려야만 하는 이유가 뭐가 있지? 지환은 생각했다. 그게 뭐든 숨겨야 하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복잡한 마음으로 지환은 촬영장 구석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 조작을 끝낸 민재는 촬영장 안을 살피다가 지환 쪽으로 다가왔다. 사진작가와 스태프들은 각자의 짐을 챙겨 나가는 중이었다.
“뭐 하고 있어?”
민재가 물었다. 평소와 같은 말투였다.
“…그냥 있어요.”
지환의 대답에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고생했다.”
민재가 말했다. 고생했다고? 이렇게 그냥 넘어가는 건가? 지환은 배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나한테 이야기해 줘야 하는 게 있지 않아? 너무 뻔뻔하잖아. 그 생각을 함과 동시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되게 찔리는 거 많으신가 봐요. 얼굴 뜯어고치는 데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고.”
상당히 이죽거리는 투였다. 지환은 말을 내뱉고 후회했지만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뭐가 문젠데?”
민재의 말투가 싸늘해졌다.
“저한테 할 말 없으세요?”
“무슨 할 말? 난 없는데.”
어떻게 할 말이 없을 수가 있어. 지환은 이를 악물었다.
“애들한테 미안하지 않으세요?”
지환의 질문에 민재는 그를 잠시 노려보았다.
“말조심해. 야, 그리고 넌 뭐가 그렇게 쉽냐. 그때는….”
쉽냐고? 지환은 센터에 들어온 뒤로 뭐 하나 쉬웠던 적이 없었다.
“안 쉬운데요. 쉬운 건 선배님이겠죠. 거기 애들 두고 오는데 망설이지도….”
지환의 얼굴이 왼쪽으로 돌아갔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지환은 눈을 깜박였다. 왼쪽 뺨이 얼얼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민재는 한 손을 허공에 털고 있었다.
그제야 지환은 자신이 민재에게 맞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방진 새끼.”
민재는 욕을 내뱉고는 몸을 돌려 촬영장을 나가 버렸다. 지환은 촬영장 벽을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볼이 따갑고 쓰라렸다.
***
우석은 가이드실 로비에 서서 납품되는 약품 목록을 확인하고 있었다.
약품 목록 대조는 비교적 쉬운 편이었기 때문에-발주는 어차피 우석이 한다- 보통 신입 가이드가 맡아서 진행했다. 오늘은 아주 가끔씩 우석이 신입 가이드가 일을 잘 해내고 있는지 체크하는 날이었다.
“좀 어때. 할 만해?”
목록을 보며 우석이 물었다.
“네! 다들 너무 친절하셔서 빠르게 적응하고 있어요.”
전형적인 신입의 입바른 인사말이었다. 우석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일러. 알겠지.”
신입 가이드는 웃어 보였다. 우석은 약품 목록과 오늘 납품된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들어오는 물건 개수에 비해 소비가 빨라진 느낌이었다.
“이번 주 야간 담당 고참 누구였어?”
우석이 물었다.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이번 주 야간에 응급 많았어? 아님 약을 많이 타갔어?”
“딱히… 그러지 않았는데요.”
“가이딩실 야간 방문 명부 갖고 와봐.”
최근에는 인명 피해가 심각한 테러 사건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가이딩실에도 피바람이 부는 일은 딱히 없었다. 우민재가 박지환 등에 업혀 온 정도만 빼면.
큰 일도 딱히 없었는데. 우석은 명부를 받아 들었다. 명부에 적힌 약품 출입량과 남아 있는 약품의 개수 차이가 많이 났다. 우석은 손을 들어 로비를 짚었다.
조질까. 우석은 우선 가이딩실 내 직원들을 모두 불러 모아 조지는 방법을 생각했다. 모아놓고 범인이 나올 때까지 지랄을 한번 해볼까. 이 새끼들이 빠져 가지고. 우석은 뻐근한 목덜미를 주물렀다.
가이딩 약품은 가이딩과 거의 흡사하게 효과를 내는 약물로 가이딩 수치를 안정화시켜 주는 것도 있지만 신경 안정이나 쾌락을 주기도 한다. 한마디로 중독성이 있는 약물이기 때문에 가이딩실 내에서 재고 관리가 중요했다.
우석은 최근 몇 달간의 자료들을 모두 받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오랜 기간 꾸준하게 약품이 새어 나갔다는 걸 깨달았다.
우석의 심각해진 표정과 계속되는 검토에 신입 가이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우석 근처에 있는 가이드들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우석은 생각했다. 누구지? 누가 이렇게 지속적으로 간 큰 짓을 하고 있지? 그리고 무엇을 위한 거지?
중독이거나 혹은 외부 암시장에 판매하는 것이 목적일 수도 있었다. 전자보다 후자가 좀 더 심각했다.
최근 센터에서 장기 출장을 갔던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우석은 로비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서연 가이드 내 사무실로 좀 오라고 해.”
***
우석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부르셨나요?”
서연이었다. 우석은 서연에게 자신의 맞은편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녹차? 커피?”
우석이 물었다.
“저는 물 한 잔으로 충분합니다.”
서연이 답했다.
우석은 물을 떠다 준 뒤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무슨 일이세요?”
서연이 물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지적을 하는 게 좋을지 회유를 하는 게 좋을지. 혹은 가볍게 떠볼 수도 있었다.
“장부가 비어. 서연이 혹시 너 출장 갈 때 급해서 기록 안 하고 가져간 물품 있니?”
고민하는 세 가지가 모두 담긴 질문이었다.
“어? 아뇨. 보통 지방에도 예비 백업 물품이 있는지라 신청받은 경우가 아니면 가져가지 않았어요.”
“아… 그래, 고맙다. 하….”
우석은 다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약품이면 위험하잖아요.”
서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군지 감이 안 잡히네.”
우석이 말하자 서연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가져갔는지보다 왜 가져갔는지를 알아내는 게 빠를 것 같아요. 무턱대고 에스퍼 전원을 수사할 수도 없고요.”
“어? 어어.”
서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잘 지냈어? 나 부탁할 게 있는데. 혹시 그 지역 주변 암시장에 가이딩 약품이 판매된 적 있는지 한번 알아봐 줄 수 있을까?”
서연은 그렇게 세 군데에 전화를 했다.
“출장 다니면서 알게 된 친구들이 가끔 암시장 수사를 하더라고요.”
서연이 말했다. 우석은 대체 그 친구들이 누군지 궁금하다는 생각을 순간 했으나 어찌 되었건 희소식이었다.
“제가 수사하는 거 돕게 해주세요.”
이미 전화를 돌려놓고 서연은 우석에게 부탁했다.
서연이라면 우석이 호출했을 때부터 자신이 약간의 의심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터였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서연은 먼저 우석에게 손을 내민 셈이었다. 어쩌면 정말로 서연은 우석을 돕고 싶은 걸 수도 있었다.
우석은 몇 가지 가능성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나 서연이 만약 가이딩 약품을 빼돌린 장본인이라면 지금 이렇게 행동하는 건 바보짓이었다. 수사를 성공시키면 자신이 잡히고, 수사를 성공시키지 못하면 괜히 의심만 더 사게 될 테니까.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서연아. 부탁 좀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