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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37)화 (3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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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은 센터장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책상과 꽤 화려한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우석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 왔나.”

센터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소파 쪽으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우석은 소파에 앉았다. 센터장은 소파에 같이 앉지 않고 자신의 책상 쪽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오늘은 웬일로 센터에 계시네요.”

“응?”

센터장은 순간 의아하다는 듯 우석을 바라보았다. 우석은 별다른 말 없이 진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진성은 우석을 잠시 바라보더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지. 요새 좀 바빴어.”

지랄. 센터에 매일 죽치고 있는 거 내가 모를 거 같냐. 우석은 욕을 삼켰다.

“바쁘신 분이 어쩐 일로 저를 다 부르셨나요.”

우석이 물었다.

“우민재 실장, 어디 있나?”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센터장은 민재가 자신의 시야 밖에서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면 언제나 우석을 불렀다. 그리고 행방을 물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세요.”

“…자네는 알고 있을 것 같아서.”

김진성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우석은 잠시 고민했다.

“센터장님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우석의 질문에 센터장은 두 손을 포개어 책상 위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우석 군. 자네가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센터장은 딴소리를 했다.

“스물여섯입니다.”

“시간이 빠르네. 기억을 하려나? 처음 들어왔을 때는 조그마한 어린아이였으니까.”

센터장은 우석을 보지 않고 옆쪽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회상하는 듯했다. 우석은 그 모습이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기억하죠.”

똑똑히 기억하지.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그래도 꽤 좋았어. 우석 군과 민재 군은 뭐랄까… 그래도 내 마음으로 낳은 느낌이었지.”

“…….”

세상 어느 부친이 자식을 그따위로 대한단 말인가. 우석은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는 다 자라서 이렇게 나를 물어뜯고 싶어 안달 난 눈으로 볼 줄도 알고 말이야.”

김진성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언가 협박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뭐를 걸고. 우민재를? 우석은 생각했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우석이 물었다.

“민재 군이 위험한 곳에 있다는 건 알고 있네.”

알면서 물어본 거네. 센터장이 민재에게 무언가 붙여놓은 것은 알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치밀하게 감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는 건가? 그럼 정확히 어디까지 알고 있지?’

어쩌면 김진성은 지금 자신을 떠보고자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우석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가요.”

“그리고 위험에 처할 거란 것도 알고 있어.”

“경고하시는 건가요?”

“아니. 알려주는 거야.”

뭘 알려줘. 위험할 거라고? 왜? 우석은 말 속에 숨은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썼다.

“나는 둘을 꽤 아끼는 편이니까.”

“…….”

“다시 한번 묻지. 우민재 군. 어디로 갔지?”

민재의 신변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위치를 묻는다는 건 센터장이 어떤 이유로든 민재가 있는 곳으로 가거나 무언가를 보낼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게 어느 쪽일까. 민재를 구하는 쪽? 혹은 해하는 쪽?

우석은 센터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볼이 살짝 떨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분노? 혹은 초조?

우석은 분노에 찬 센터장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었다. 지금 얼굴은 분노에 가깝진 않았다. 분노한 김진성은 오히려 쉽게 흥분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초조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석은 센터장을 도발할 작은 패를 꺼내 들었다.

“그냥 기분 전환을 하러 가겠다고 하더군요.”

“어디로?”

“그건 저도 모르죠. 민재 기분에 달린 거니까요.”

센터장이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

민재는 컵을 정리하고 따라 나가겠다며 자신을 까마귀로 인도해 줄 남자를 잠시 카페 밖으로 보냈다. 지환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민재에게 다가서며 속삭였다.

“선배니임, 진짜 이거 아닌 거 같아요.”

죽여 버릴까.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민재는 잠시 지환에게 어디까지 말을 해줘야 할지 고민했다.

지환은 아직 햇병아리라 말을 해준다고 이번 잠복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았다.

게다가 지환은 조금도 변장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금 전 까마귀 쪽 남자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발언을 던지기도 했지 않은가.

사복이라도 입고 왔으니 다행이지. 이 새끼는 왜 그렇게 나대고 다녀 가지고. 민재는 머리를 짚었다.

“어지러우세요?”

지환은 또 호들갑을 떨었다. 잠시 앉으시라는 둥 되지도 않는 소리를 자꾸 해대서 민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괜찮아. 그리고 너는 좀 걱정되면 안 따라와도 돼. 내가 너 바쁜 일 생겼다고 할게.”

“아니, 선배님. 잘 생각해 보셔야 된다니까요. 딱 봐도 사이비잖아요.”

사이빈 건 알아보니 다행이네. 민재는 지환의 눈치 없음에 치를 떨었다.

“나도 알아.”

“아, 역시. 다행이에요! 그럼 우리 같이 일 생겼다고 하고….”

아니, 이 자식 알고 보니 나를 호구로 봤네? 민재는 지환이 진심으로 자신이 사이비 종교에 끌려가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조금 어이없어졌다.

“박지환.”

민재가 지환을 불렀다. 지환은 말을 멈추었다.

“너 가라고. 조금 전에 저 남자가 널 알아볼 뻔했잖아.”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 지환이 멈칫했다. 자세히는 말 못 해줘도 이 정도면 알아듣고 눈치껏 빠지겠지.

“내가 삼 일 뒤에도 센터에서 안 보이면 최우석 실장한테 나 어디서 마지막으로 봤는지 전해줘.”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지환의 동공이 흔들렸다.

“싫어요.”

“뭐?”

“무슨 일 있으신 거잖아요.”

지환이 고개를 내저었다. 뭔 개소리야.

“최우석 실장님은 안 오실 거예요.”

지환은 혼자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 듯 눈에 힘을 엄청 주고 있는 게 보였다.

얘 갑자기 왜 이래? 민재는 급변하는 지환의 감정을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우석이 자신에게 언질을 줬던 것을 떠올렸다.

“와. 온다고. 그러니까….”

“그건 모르는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 말씀하신 대로면 위험한 거잖아요.”

지환의 표정은 단호했다.

“안 위험해. 그냥 만약을 대비해서 그런 거지.”

“어쨌든 위험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 말대답하냐?”

민재의 목소리가 낮아졌으나 지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더러 또 가라고 하시면 저 사이비남 붙잡고 선배님 우민재라고 다 밝힐 거예요.”

이 새끼가? 민재는 지환을 노려보았다. 지환은 자연스러운 척 쟁반을 들고 정리대로 가 분리수거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민재에게 돌아온 지환은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조용히 있을 테니까 데려가 주시면 안 돼요?”

“…….”

“페어잖아요.”

그놈의 페어는 개뿔. 민재는 바깥을 살폈다. 예의 사이비남이 기다리다 지쳤는지 안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더 이상 대치하고 있으면 수상해 보일 수도 있었다.

진짜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꼬이는지 모르겠다. 민재는 심란한 심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저 안 들킬게요. 완전 덕구 할게요.”

지환이 계속 어필했다. 완전 덕구 한다는 건 대체 뭐야.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 히어로 싫어하는 연기 할 수 있어?”

“네?”

지환의 표정이 멍해졌다.

“누구 한 명이라도 너한테 박지환 아니냐고 묻거나 닮았다는 말 하게 되면, 넌 히어로 그런 거 싫어해서 티비도 안 본다고 할 수 있냐고.”

“어….”

“못 하겠으면 돌아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이 더 도움 안 된다는 것만 알아둬.”

민재가 경고했다. 그러자 지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할 수 있어요.”

지환은 고집을 부렸다. 진짜 어리네. 민재는 정말로 지환과 같이 까마귀 소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쯤에서 지환이 포기하고 돌아가 줬으면 했다.

“진짜예요. 저 히어로 진짜 싫어해요.”

고작 한마디 하는 건데도 지환은 머뭇거렸다. 연기를 못하는 건지 신념이 대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안 가요?”

밖에 서 있던 남자가 카페 문을 열고 물었다. 시발. 민재는 지환의 등 뒤를 툭 쳤다.

“가요!”

카페 앞에서부터 남자는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셋은 큰길에서 벗어나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너무 전형적인데? 민재는 주변을 살폈다.

“아직 좀 더 가야 하나요?”

지환이 물었다.

“이제 다 왔어요.”

사이비남은 웃어 보였다. 그 말을 듣고도 둘은 족히 10분은 더 걸어야 했다.

“우리 수련원에서는 아날로그 환경을 마련해서 서로에게 공감하고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사이비남은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에게 핸드폰을 내라고 요구했다.

“전 없어요. 얼마 전에 액정 나갔는데 다시 못 샀거든요.”

민재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사이비남은 잠시 당황하다가 민재가 메고 있는 기타 가방을 바라보았다.

“무거워 보이는데 이건 여기 입구에 맡겨두세요.”

뭐라도 두고 가게 해서 못 빠져나가게 하려는 거네. 민재는 생각하며 기타 가방을 건넸다. 우석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자신의 것이 아니니 상관없었다. 지환은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폰 있으면 잠시만. 나 시간 좀 확인하게.”

지환은 우물쭈물 민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민재는 빠르게 단축 명령 실행 버튼을 조작해 지환의 핸드폰을 초기화했다. 지환은 까먹고 있는 듯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센터 내 직원들의 핸드폰에는 초기화 프로그램이 깔려 있었다.

이제 지환의 핸드폰은 벽돌이 되었다. 어차피 비번이나 프로그램을 풀 능력자가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만일에 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민재는 지환의 핸드폰을 사이비남에게 내밀었다. 어? 지환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둘의 담보를 잡은 사이비남은 수련원 안쪽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은 꽤 낡은 편이었다. 민재가 지워지지 않는 녹이 묻은 벽을 바라보자 사이비남은 뻘쭘한 듯 웃었다.

“아무래도 봉사 단체는 사정이 크게 여의치 못하죠. 그래도 내부에 활동하시는 공간들은 모두 깔끔하답니다.”

사이비남이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보통 저렇게 이야기하면 그걸 딱하게 여겨 후원금이라도 주는 건가? 민재는 궁금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민재의 뒤에 딱 붙어서 걸었다. 돌아보자 지환이 민재의 목덜미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 사이비남은 강당 문처럼 보이는 곳 앞에 섰다.

“안에서는 마음 수련을 진행 중이니 조용히 같이 서서 체험해 보시면 됩니다.”

사이비남이 말했다. 지환이 바로 뒤에서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열리고 민재는 사람들이 강강술래를 하듯 서로 손을 잡고 원형으로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민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 원 근처에 섰다. 지환도 따라붙었다.

“한 주의 마음을 나누어봅시다.”

“저는… 이번 주에 사실 한 끼도 못 먹었어요.”

볼이 움푹 팰 정도로 마른 여자 한 명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쩜 좋아.”

누군가 안타까워했다. 훌쩍이는 사람도 있었다. 공감을 되게 잘해주는 분위기네. 민재는 생각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아이가… 우린 함께 밥을 먹고 있었거든요.”

흑. 여자는 눈물을 훔쳤다. 옆에 있던 사람의 손이 딸려갔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사지를 떨고… 괴로워하는데 저는 아무 도움도 줄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그 아이가….”

여자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비명을 지르는데 갑자기 식탁이 쪼개졌어요. 전구도 깨지고요. 사방이 깨진 유리와 도자기 파편이었어요.”

“저런.”

“귀가… 귀가 아파서 잠시 잡았는데 손에 피가 묻어났어요. 하지만 이젠….”

여자는 다시 말을 멈추었다.

“이제는 내 아이도 괜찮아질 거예요.”

“괜찮아질 거예요.”

손을 맞잡은 원의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요. 다독이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끌어다가 눈물을 훔쳤다.

민재는 이곳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정말로 모종의 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그룹 테라피와 유사하긴 했다. 민재는 여기서 무슨 이야기냐고 좀 더 캐물을지, 공감하는 척하면서 더 지켜볼지 잠시 고민했다.

“저도 본 적이 있어요.”

민재가 입을 열었다. 지환을 포함한 모두가 민재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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