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오준은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커피와 쪽지를 발견했다. 커피는 당연히 우석의 것이었다. 지치지도 않나? 오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그렇게 어색하게 대화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우석은 한마디도 더 하지 않았다. 끔찍한 침묵만이 차 안을 가득 채웠었다.
그래서 이대로 끝이겠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또 커피가 놓여 있었다.
오준은 몇 번이나 문자를 썼다가 지웠다. 우석에게서도 별다른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쪽지에 뭐라고 적혀 있을까. 오준은 두려웠다. 그때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끝내자는 내용이 적혀 있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답답한 상황을 지속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끝이라고 생각하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갑작스러웠다.
열어보지 말고 버릴까? 고민하던 오준은 접혀 있는 종이를 열었다.
-오늘 최우석 실장 나 좀 보자고 전해주세요.
버렸으면 큰일 날 뻔했네. 오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왜지? 평소에는 실장이 만나달라고 사정을 해도 만나주질 않더니. 하필 이런 때에 호출이라니. 오준은 심란해졌다.
-최우석 실장님께
-금일 센터장님 호출이 있으셔서 메일 드리게 되었습니다. 가능하신 시간대 알려주시면 예약 잡아두겠습니다.
오준은 메일을 보내고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그 후로 한참 동안 오전에 정리해야 할 서류들을 정리하다가 메일 수신 확인을 한 오준은 욕을 내뱉었다.
우석은 두 시간째 메일을 읽지 않고 있었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오준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가이딩실 내부에서 일해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는 직책은 아니니까… 오준은 내선 전화로 가이드실에 전화를 걸었다.
[네, 가이딩실입니다.]
“네, 센터장실 비서 윤오준입니다. 최우석 실장님 계신가요?”
[아. 네. 잠시만요!]
약간의 소음이 들렸다. 그리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냥 없다고 해.’라고 말하는 소리를 오준은 들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받은 사람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아, 제가… 착각했는데 실장님 오늘 출장이라고 하시네요.]
지랄하네. 출장인데 아침에 커피 배달도 하셨어? 로맨틱 납셨네. 오준은 이를 앙다물었다.
“아, 그렇군요. 좀 급한 사항이라서요. 센터장님 지시 사항이니 복귀하시면 바로 메일 확인 좀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아. 네네!]
오준은 ‘급한’이라는 단어와 ‘센터장님’이라는 단어에 강세를 주어 말했다. 통화가 끝이 나고 얼마 뒤 우석은 메일을 읽었다. 그리고 메일 답변 대신 오준의 핸드폰으로 문자가 한 통 날아왔다.
-안 가요. 그러니까 못 간다고 전해주세요.
장난치나. 센터장이 오늘 좀 보자는 건 오늘 보자는 거지! 네가 실장이면서 오네 마네 하면서 나를 곤란하게 하냔 말이야! 오준은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싶은 충동을 남은 할부금을 생각하며 참아냈다.
뭐라고 해야 이 새끼가 조용히 올까. 오준이 고민하는 사이 잠시 나갔다 들어오던 센터장이 오준을 불렀다.
“최우석 실장 쪽으로 연락 넣었어?”
“아, 네. 시간 연락 곧 주실 것 같습니다.”
오준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센터장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오준은 곧장 가이딩실로 향했다.
우석은 간이침대 중 하나에 걸터앉아 다른 가이드들과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었다. 하하, 하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센터장실을 찾아올 때와 달리 현장에서처럼 흰 가운을 걸치고 있어서 오준에게는 그 모습이 꽤 낯설었다.
우석은 다가오는 오준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굳혔다. 눈썹이 조금 찌푸려진 것도 같았다. 조금 전 웃고 있던 얼굴과 대비되게 차가운 기운을 풍겼다. 옆에 있던 가이드는 눈치를 살피더니 빠르게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
“한가하신가 봐요.”
우석의 눈썹이 들썩거렸다.
“그 말씀은 조금 부적절한 것 같은데요. 여긴 바쁘면 응급상황이니까요.”
오준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센터장님 호출이 있었는데 메일 답을 안 주셔서요.”
“제가 문자로….”
우석은 무심코 답변하다가 말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당신 말이 부적절하다느니 뭐니 지껄여 놓고 업무 메일을 사적인 문자로 답하는 머저리 같은 짓을 스스로 광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저는 답을 받은 게 없습니다.”
오준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평온한 무표정을 가장하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실수한 건 우석 쪽이니 상관없었다.
우석은 잠시 오준을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갑시다.”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때까지 한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였다.
센터장실이 있는 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오준은 입을 열었다.
“미리 시간 고지 안 해주셔서 좀 대기하셔야 할 수도 있어요.”
“내가 곤란하게 했어요?”
우석의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오준은 대답하는 대신 정면을 노려보는 것을 택했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가 왜 한숨을 쉬어? 오준은 우석을 돌아보았다.
“실장님, 앞으로 공과 사는 좀 구분해 주세요.”
우석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그게. 우석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운을 뗐다.
“부탁해요.”
오준이 덧붙였다.
허. 우석이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오준은 빠른 걸음으로 내려서 센터장실과 연결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지환은 민재처럼 보이는 사람이 센터 정문 쪽을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쓰러지고 나서는 민재가 교묘하게 지환을 피해 다니는 듯해 자주 만나지 못했다.
깨어나셨다는 이야길 우석으로부터 전해 들었으나-지환은 그것 때문에 더 걱정을 했다- 그 후로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연락도 잘 받아주질 않았다.
이제 몸은 좀 괜찮으신가? 지환은 재빠르게 날아 근처에 안착한 뒤 민재로 추정되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는 검은색 후드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가끔 뒤를 돌아볼 때 보이는 옆얼굴로 지환은 민재가 맞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근데 선배님 기타는 왜 메고 계신 거지? 지환은 민재가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된 건지 궁금했다. 민재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센터 밖으로 나갔다. 목적지가 밖이신가? 왜지? 지환은 고민하며 뒤를 따랐다.
민재를 따라 지환은 대학가로 향했다. 확실히 과잠을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웬 대학가지? 지환은 의아했다.
심지어 민재는 어딜 들어가거나 누굴 만나지 않고 그저 길거리에서 서성이며 전단지나 받고 다녔다. 대체 뭘 하시는 거지? 생각하던 지환은 자신 쪽으로 몸을 돌리는 민재 때문에 급하게 전봇대 뒤로 숨었다.
그리고 지환은 민재가 입고 있는 옷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괴상한 해골이 그려진 후드티였다.
저게 뭐지? 지환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고개를 이리저리 비틀었다. 눈도 비벼보았다. 잘못 본 게 아니라 진짜 이상한 티를 입고 있었다.
뭐지? 심경의 변화? 지환의 마음이 복잡해졌다. 다행히 민재는 지환을 발견하지 못한 건지 다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민재에게로 누군가 다가섰다. 그의 손에는 전단지가 들려 있었다. 복장 이상한 떠돌이 남성에게 전단지로 다가갈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지환은 민재 선배가 얼마나 멋있게 사이비 종교 집단을 물리칠지 기대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민재는 그 앞에 선 남자의 헛소리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고민하는 듯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아니, 딱 보면 모르나? 지환은 그러다 문득 민재가 못 가본 곳이 많다는 것을 떠올렸다. 센터에서 오래 생활해서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건가 싶었다.
저러다 끌려갈라. 다급해진 지환은 전봇대 뒤를 벗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민재에게 다가갔다.
민재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민재에게 근처 카페로 가자며 이상한 제안을 하고 있었다. 역시 민재는 딱히 거부를 못 하고 어정쩡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키가 큰 편인 지환이 다가가자 민재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선배님?”
민재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빠르게 눈을 돌렸다.
“사, 사람 잘못 보셨어요.”
뭐지? 지환은 민재의 얼굴을 살폈다. 잘 살펴보니 머리카락이 금발이었다.
지환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머리를 그새 염색하셨나? 아니면 숨겨진 쌍둥이 동생이 있다거나?
“민….”
민재 선배님 아닌가요? 라는 질문을 하려던 지환은 한 글자를 내뱉자마자 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민재가 눈을 부라리며 지환의 발을 세게 밟은 것이다.
별다른 소리는 안 났지만 지환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 아파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일그러진 지환의 표정을 무시하고 민재는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인사를 했다.
“아, 잘 보니까 덕구네. 안녕.”
덕구? 그건 보통 강아지한테 지어주는 이름 아닌가.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지환은 섣불리 나댔다가 저번처럼 제대로 깨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수업 잘 들었어? 여기 이분이 봉사 시간 주는 교외 활동 소개해 주신대.”
민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살짝 높았다. 지환은 민재의 눈치를 살피다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때 민재가 지환의 팔을 잡고 살짝 끌어당겼다.
“같이 할까?”
민재가 웃었다. 사이비인 것이 확실한 남자는 이제 다 낚았다고 생각했는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지환에게도 전단지를 건넸다.
“친구분도 같이 하면 좋죠. 추억도 쌓고요.”
결국 지환은 민재와 그 남자와 셋이서 카페에 앉아 있게 되었다. 사이비남은 두 명이나 낚아서 신이 나는지 ‘봉사 점수’를 준다는 명목 빼고는 죄다 이상한 마음 수양 캠프 어쩌고에 대해서 실컷 늘어놓았다.
“근데 이거 뭐 막상 가면 하나님 믿으라고 하고 그런 거 아니죠?”
“어우! 아니에요!”
사이비남은 고개를 격하게 저으며 인상을 썼다.
“그럼… 부처… 쪽인가요?”
지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어유, 후배분이 의심이 많으시네요. 여기 보시면 우리 봉사 시간 줄 수 있는 기관이라고 인증서 있잖아요. 국가가 아무 데나 이런 걸 주나요.”
교회에서도 봉사활동 다녀오면 받을 수 있을 텐데. 지환은 그런 생각을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의문 제기에 다행히 민재 선배가 지금 이 상황을 좀 고민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면 티 안 나게 알려드린 거겠지?
“아, 저 정말 좋은 뜻으로 말씀드린 건데 이렇게까지 의심을 하시고 그러시면 저 섭섭해요. 그렇게 싫으시면 처음부터 안 한다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 교외 활동 그냥 우리가 신청받으면 하겠다는 사람들 많아요?”
사이비남은 이제 태세를 전환했다. 아니, 그렇게 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그냥 신청받으면 되지, 왜 길거리에서 사람 붙잡고 쇼하고 카페까지 끌고 온 건데? 지환은 슬슬 열이 뻗쳤다.
“선배님. 그냥….”
“아, 할게요. 하면 되잖아요.”
그냥 가자고 당차게 말하려던 지환의 말이 씹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지환은 어이가 없어져 민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배님?”
“넌 안 하게? 안 할 거면 말고.”
지환이 안 하더라도 자신은 하겠다는 뉘앙스였다. 선배니임??? 지환은 울고 싶어졌다.
사이비 소굴에는 들어가면 못 나온다고 하던데. 지환이 절망에 빠진 사이 사이비남은 신청서에 개인정보를 기재하라고 했다. 민재는 망설임 없이 작성을 시작했다.
-김민석.
어? 지환은 곁눈질로 민재가 이름을 다르게 적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선배님 경계심은 아직 있으시구나! 지환은 조금 안심했다.
지환은 민재가 새로 지어준(?) 이름으로 신청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지환은 그렇게 강덕구가 되었다.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사이비남이 지환에게 물었다. 이건 무슨 구닥다리 멘트지? 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사이비남이 중얼거렸다.
“얘가 흔하게 생겨서 그런 오해를 종종 받아요.”
민재가 말하자 사이비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혹시 시간 있으시면 우리 수련회 본관에서 진행 중인 마음 수련회 정기 모임 견학 한번 해보시고 가시겠어요?”
사이비남이 물었다. 캠프라더니 본관도 있는 모양이었다. 더 수상한데?
“그럴까요?”
미처 말리기도 전에 민재가 홀라당 넘어갔다. 아니!!! 지환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지금 꼭 가야 하나요?”
“그럼 넌 나중에 만나도 돼.”
민재는 굳건했다. 지환은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시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