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
지환은 은정과 마주치기 위해 오전부터 급식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은정 선배는 연차도 오래되셨고 민재 선배랑 친하니까, 최우석 실장이 민재 선배를 뒤에서 괴롭히거나 부려 먹는지 알고 있을 거야.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해. 지환은 심호흡했다.
은정은 평소처럼 서연과 함께 급식실에 들어섰다. 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았다.
지환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식판-음식이 식은 지 한참 되었다-을 들고 은정과 서연이 나란히 앉아 있는 곳에 마주 앉았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지환이 밝게 인사했다. 은정은 허락도 없이 자신의 앞에 앉은 지환을 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꺼지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지환은 굳게 마음먹은 대로 은정의 눈짓을 무시하며 웃어 보였다.
“어, 박지환 에스퍼님 맞죠? 태현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지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미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그 손을 두 손으로 잡고는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었다. 태현이 형 누나 다정하신 분이구나. 지환은 생각했다.
“혹시 형이 저에 대해 뭐라고 했나요?”
지환이 묻자 서연의 미소가 짙어졌다.
“센터에서 제일 친한 사람이라고 그러던데요?”
진짜요? 저도 형이랑 제일 친해요. 지환은 기분이 좀 좋아졌다. 태현이 형도 참.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지환을 바라보던 서연이 은정을 보면서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은정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긴팔원숭이처럼 팔을 뻗어 서연을 끌어안았다.
“야, 나 너 마음에 안 들어.”
은정이 대뜸 지환을 노려보며 경고를 했다. 지환은 눈을 끔벅였다.
“…왜 …요?”
“너 그때 내가 딱 거기 서라 그랬는데 신태현 새끼 들고 튀었잖아.”
그때? 지환의 머리가 잠시 멈추었다.
“은정아? 태현인 내 동생이잖아.”
“그건 아는데, 어쨌든 내가 잡아서 데려오라고 했는데 도망친 거잖아? 배신자는 믿을 수 없어.”
지환은 그제야 태현과 있었던 추격전을 떠올렸다. 은정 선배님… 생각보다 뒤끝 있으시구나.
서연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툴툴거리는 은정의 볼을 잡고 흔들며 달랬다. 오구 그랬어, 은정이. 그러자 은정은 ‘힝’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서연의 손에 얼굴을 묻었다.
충격을 받은 지환은 입을 말아 넣었다. 하지만 이대로 쉽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민재 선배님 관련된 일이에요.”
지환의 말에 은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은정은 서연에게서 몸을 조금 떨어뜨렸다.
“선배가 왜?”
지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은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은정은 고개를 뒤로 빼면서 눈을 아래위로 부라렸다. 지환은 그 자리에서 딱 멈춘 채로 속삭였다.
“최우석 실장님한테 뭔가… 뭔가… 약점 잡히신 게 있나요?”
“…무슨 소리야?”
은정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지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민재 선배님 몸도 안 좋으신데 우석 실장님은 자꾸 괜찮다고만 하시고… 엄살 부린다고 하시고…. 저 병문안도 잘 못 가게 하세요. 민재 선배님 우석 실장님한테 가이딩도 잘 못 받으시나 봐요!”
지환은 강력하게 호소했다. 말하면서 왠지 더 슬픈 기분이 들어 지환은 얼굴을 너무 일그러뜨리는 일이 없도록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지환은 은정을 흘깃 쳐다보았다. 은정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재 선배 또 쓰러졌어?”
은정이 물었다. 헉! 진짜 지병 있으신가 봐.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가 가이딩받는 걸 좀 귀찮아하는 성향이 있어. 어릴 때부터 그 뭐냐….”
은정은 뭔가 떠올리려는 듯 허공을 노려보았다.
“…빈혈이요?”
지환의 말에 은정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래, 그거. 그거 있으니까 움직이는 걸 좀 귀찮아하고 그래서 우석 선배가 챙기는데도 갑자기 가이딩이 부족해지고 그래. 그리고 네가 몰라서 그렇지, 우석 선배….”
은정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인상을 쓴 은정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게 보였다.
“새,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야.”
그렇게 말씀하시면 신빙성이 없지 않나요. 지환은 그 말을 삼켰다.
뭐지. 진짜 내가 오버하는 건가. 아님 은정 선배도 한패인가. 그렇지만… 지환은 생각하다가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서연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서연은 씩 웃어 보였다.
“그럼 내가 도와줄까요?”
“네?”
“우석 실장님 얼마 전에 만났는데 되게 바빠 보이시더라고요. 정신도 없어 보이시고. 물론 난 A급이라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내가 가서….”
“안 돼!”
서연의 말을 자르고 은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서연은 놀란 듯 눈을 깜박였다.
“왜요?”
지환이 물었다.
“나 서연이 진짜 오랜만에 만난 거야. 서연이도 피곤하고 몸도 약한데 일 더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너.”
은정이 지환을 가리켰다.
“전담 가이드랑 에스퍼 사이에 있는 일을 멋대로 추측하고 끼어들지 마.”
“…은정아.”
서연이 은정을 타이르듯 불렀으나 은정은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생각해 보면 은정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는 걸 지환은 알았다. 그러나 화가 났다.
우석 실장님은 전담 가이드지만, 자신은 민재의 페어였다. 파트너를 걱정하는 게 왜 끼어드는 게 되는 거지? 그게 멋대로라고?
지환은 은정과 서연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급식실을 떠났다.
***
태현은 핸드폰을 들여다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센터에서 창문이 없는 회색 건물을 본 적 있어?
어젯밤 서연이 보내온 문자였다. 창문이 없는 회색 건물? 처음 센터에 들어와 탐색하고 다녔을 때에는 그런 건물을 찾지 못했다. 없다고 답하려던 태현은 잠시 고민했다.
-찾아볼게.
-고마워.
태현은 서연의 답장을 들여다보다가 타자를 쳤다. 누나, 밥은 먹었어? 센터 오고 잘 못 봤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밥이라도 같이 먹을래? 문자를 쓰며 센터 서쪽 샛길로 들어서던 중이었다. 태현은 가로수와 수풀 사이로 걸어가는 우민재 실장을 발견했다.
그는 센터 주위로 둘러져 있는 펜스의 바깥쪽, 그러니까 센터 밖에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었다.
히어로 센터는 도심 외곽 쪽에 위치해 있고, 센터 부지 주변으로 키가 높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교묘하게 외부 시선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는데, 누가 봐도 걷기 좋은 길은 아니었다.
왜 멀쩡한 길을 놔두고 저런 곳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태현은 눈으로 조용히 민재를 좇았다. 따라서 조금 걷다 보니 어느새 우민재 실장은 센터 부지 안을 걷고 있었다.
우민재 실장이 로비 쪽으로 사라지고 태현은 다시 조금 전 그를 발견했던 장소로 가보았다. 그러자 아마도 수풀로 이어지는 듯한 작은 샛길이 보였다.
샛길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 있었다. 그냥 지나치면 발견하기 어려울 법한 길이었다. 딱히 입구를 막아두지도 않았다. 태현은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이동해 보니 창문이 없는 건물이 나왔다. 회색 콘크리트 덩어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 같은 건물이었다. 적당히 외진 곳에 별 위화감 없이 있는 건물이라 그런지 딱히 이상해 보이지도 않았다.
-찾았어. 이 건물 맞아?
태현은 건물의 사진을 찍어 서연에게 보냈다. 답은 곧바로 왔다.
-거길 들어갈 방법을 알아내 줄 수 있어?
들어갈 방법이라. 태현은 회색 건물 둘레를 한 바퀴 빙 돌았다.
창문이 없는 회색 콘크리트에는 문도 없었다. 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매우 교묘하게 처리되어 문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 수상했다. 정말 콘크리트 덩어리는 아닐 거고. 뭘까.
서연은 태현에게 이미 이것이 건물이라는 것을 알고 부탁을 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태현은 건물 뒤쪽에 다른 곳으로 향하는 길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내가 따라온 샛길이 이 건물로 향하는 길이라는 건데.
우민재 실장은 많이 다녀본 것처럼 평온하게 이 길을 걸어 나갔다. 문도 창문도 없는 이 건물에 출입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대중들 앞에 나서는 걸 꺼렸었지. 이거랑 연관이 있나? 그보다 이 건물은 목적이 뭐지. 무언가를 보관하거나-혹은 숨기거나-, 아니면 연구하는 곳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찜찜했다.
“뒤가 좀 구린 데가 있네.”
태현은 중얼거렸다. 역시 나라를 대표하는 히어로고 뭐고 털면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새끼는 없다니까. 그게 무엇인지는 차차 알게 될 터였다.
콘크리트 벽을 쳐다보던 태현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민재는 머리를 감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염색 스프레이를 머리에 뿌리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에서 샛노랗게 물들어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어차피 모자도 쓸 거니까 상관없지만.
민재의 포토샵 된 얼굴은 여기저기 많이 팔렸지만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유명한 편인 사람들은 약간의 인상착의만 변화를 줘도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민재는 이상한 해골이 그려진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은색 링 같은 게 몇 개 달린 블랙 진을 입었다. 이번에 잠복하려고 ‘요즘 힙한 대학생 룩’을 검색해서 구매한 옷이었다.
아무리 유행이 돌고 돈다지만 이거 좀 아니지 않나. 요즘 애들은 왜 이딴 걸 입고 다니는 거지. 민재는 거울 앞에서 고민했다. 내가 일반 대학생 차림이 뭔지 알 게 뭐야.
쯧. 혀를 찬 민재는 모자를 눌러쓰고 우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우석은 눈을 크게 뜨더니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야, 이 미친놈아.”
우석은 눈가를 훔치기까지 했고 민재는 기분이 상했다. 민재는 우석에게 실컷 쌍욕을 퍼부었다.
“잠시만 있어 봐.”
우석은 커터칼을 꺼내더니 민재의 블랙진에 주렁주렁 달린 은색 링들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적어도 바지는 좀 멀쩡한 걸 입고 가라.”
“야, 나만 이거 좆같은 거 아니지? 요즘 애들 다 이런 거 입는대.”
“미친놈아. 뭘 검색한 거야.”
우석은 다시 민재의 어깨를 짚고서 한참을 꺽꺽대며 웃었다. 우석이 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민재는 용건을 말했다.
“며칠 걸릴 수도 있어. 마지노선 정하러 왔어.”
“…얼마로 할 건데?”
“삼 일.”
“길지 않아?”
민재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노선은 민재가 복귀하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 연락을 취해오지 않았을 때 우석이 나서게 될 기간을 의미했다.
“약 두둑이 챙기고.”
우석은 신신당부를 하며 민재에게 가이딩을 쏟아 넣었다. 훈훈한 인사 뒤에 민재는 우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타 내놔.”
우석이 몇 년 전 한번 배워보겠다며 구매해 두고는 딱 2번 만져본 비싼 기타였다. 뚱땅거리지도 못하면서 비싼 건 왜 샀대. 민재는 툴툴거렸으나 우석은 조심해서 들고 다니라며 징징거렸다.
기타를 둘러메고 나니 민재의 콘셉트가 완성되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민재는 우선 대학가로 향했다. 원래 선교 활동은 특별한 곳이 아니라 평범하면서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법이었다.
민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땅을 보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술집 전단지와 운동 센터 할인 전단지를 6장째 받아 들었을 때였다. 땅을 보는 민재의 눈앞에 마음 수양이라는 글자가 들이밀어졌다.
“대학생이에요?”
“…네.”
민재는 고개를 슬쩍 들어 전단지를 건넨 상대를 살펴보았다. 민재 또래의 허우대 멀쩡한 사내였다.
“아, 대학생들 교외 활동으로 많이 하는 청년 마음 수양 캠프예요. 봉사활동도 같이 해서 봉사 점수도 획득 가능해요.”
핑계가 아주 교묘했다. 민재는 고민하는 척 전단지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평범한 캠프 전단지 같았다. 그 어디에도 까마귀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평범한 단체에서 마음 수양 캠프 같은 걸 길거리에서 홍보하지? 그런 생각을 하던 민재의 눈에 작게 표시된 검은 새 마크가 띄었다. 럭키. 민재는 우선 뒤로 빼는 시늉을 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러지 말고요. 이거 진짜 괜찮아요. 내가 자세히 설명해 줄 테니까 우리 근처 카페로 갈래요?”
민재는 최선을 다해 우물쭈물하는 연기를 했다. 그때 누군가 민재 옆으로 다가와 섰다.
“선배님?”
민재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환을 보고는 욕을 짓씹었다. 씨발. 쪽팔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