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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34)화 (3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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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이른 아침부터 태현의 숙소 창문을 두드렸다. 계속되는 노크에 창문이 거칠게 열렸다.

“야! 또 너….”

짜증이 난 얼굴로 나타난 태현은 지환의 얼굴을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내 몰골이 그렇게 이상한가? 지환은 생각했다.

“화났냐?”

“…내가?”

지환이 되물었다. 그냥 태현에게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어서 급하게 찾아왔을 뿐인데. 내 표정이 지금 어떻지? 지환은 어제 밤을 새웠다. 그래서 조금 멍한 상태였다.

“뭔가 좀… 이상해 보이는데.”

태현이 말했다.

“맞아. 이상해.”

지환은 긍정했다. 뭔가 이상했다. 어제의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툴툴거린 태현은 어딘가 멍한 지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와, 일단.”

지환은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다가 창틀에 이마를 박았다. 아. 지환이 신음했다.

“너 대체 뭐가 문제야.”

태현은 어이를 잃어버린 얼굴로 지환을 보았다. 지환은 팔을 뻗어 창틀을 잡고 태현의 방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맨발로 왔어?”

“내 방에서부터 날아서 왔어.”

지환은 눈을 끔벅였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지환을 태현이 잡아끌어서 바닥에 착지시켰다. 내가 무슨 이야길 하려고 했지? 지환은 생각했다.

“형, 최우석 실장이랑 민재 선배 관계에 대해서 알아?”

“그 둘? 뭐… 최우석 실장이 우민재 실장 전담 가이드잖아. 친하던데.”

“…그래?”

지환도 민재가 자주 최우석 실장을 찾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좀 이상했다. 정말 친한 사이 맞나?

“둘이 어릴 때부터 센터에서 같이 자라서 엄청 친하대. 그 가이드 실장이 우민재 실장 엄청 챙긴다고 하던데.”

“말도 안 돼.”

태현의 말에 지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말이 안 될 것까지야. 뭐 한편으로는 우민재 실장이 최우석 실장 말이라면 껌벅 죽는다는 소문도 있던데. 아무래도 가이드니까. 그래서 둘이 사귄다는 말도 있었잖아.”

자신에게는 할 말도 다 하고 화도 내고 하는데 쩔쩔맨다고? 지환은 머리가 띵해졌다. 전담 가이드니까 가이딩을 빌미로 부려 먹고 그런 건가?

아픈 사람을 꾀병 부리는 사람처럼 말하던 우석의 모습이 계속 오버랩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환에게 말할 때 표정이 좀 싸늘했던 것 같기도 했다.

지환은 케이블카도 타본 적이 없다고 말하던 민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청룡열차 이야길 하던 모습도.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씁쓸함이 담긴 얼굴이었다.

지환은 화가 났다. 정확히 뭐에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열이 뻗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근데 너 그거 물어보려고 지금 창문 두드린 거야?”

태현이 물었다.

“응. 나 갈게.”

지환은 당당하게 대답하고는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뒤에서 태현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

민재는 눈을 뜨자마자 꽃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돌리자 튤립과 장미가 보였다.

뭐지 이 휘황찬란한 비주얼은? 민재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저런 걸 누가 갖다 놓은 거지? 민재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신이 누워 있는 곳이 병동임을 깨달았다.

아, 나 쓰러졌구나. 민재는 손목을 들어 올려 확인했다. 가이딩 수치가 안정권에 들어 있었다. 좀 피곤하긴 했는데 갑자기 발작이 생길 줄이야. 민재는 누가 꽃을 가져다 놓았는지 알 것 같았다.

“깼냐?”

우석이 피곤한 몰골로 들어왔다.

“어. 고생했네.”

민재도 인사를 했다. 우석은 민재의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무리했어?”

우석은 가끔 얇은 유리를 보듯이 그를 바라볼 때가 있었다. 민재는 우석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그런 얼굴 금지.”

“금지, 이 지랄 하지 마. 내가 너 따라다니는 꼬맹이 새낀 줄 아나.”

우석이 민재의 손을 잡아 내렸다.

“너 잠입 그거 가지 마.”

우석이 덧붙였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민재는 성질을 내며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럼 내가 같이 갈게.”

“야, 센터 실장들이 다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그리고 너는 내가 약골로 보이나 본데 나 지금 한 손으로 너 들고 빙빙 돌릴 수도 있어.”

힘쓰는 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에스퍼인 민재는 체력적으로 우석과 자연히 차이가 났다. 실제로 민재는 방금 말한 것을 무리하지 않고 실행할 수도 있었다.

어릴 때는 팔씨름 못 이긴다고 분해서 질질 짰으면서. 우석은 다 늙어버린 건지 민재가 에스퍼라는 사실을 자꾸 까먹었다.

“픽픽 쓰러지니까 그렇지!”

우석이 씩씩거렸다. 걱정 안 하게 생겼어? 나한테 꼬박꼬박 오라니까 말도 안 듣고. 아니면 약이라도 좀 잘 챙겨 다니든가. 우석은 본격적으로 잔소리를 시작했고 민재는 귀를 막았다.

“저 꽃은 뭐야.”

민재가 말을 돌리려고 물었다. 우석은 민재 옆의 꽃을 바라보더니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하… 안 그래도 내가 진짜.”

“…왜?”

“박지환 걔가 나한테 너 대체 왜 이렇게 자꾸 쓰러지는 거냐고 울고불고 난리 쳐서 내가 별거 아니라고 둘러댔는데.”

생각해 보니 하필 걔 앞에서 몇 번 쓰러진 전적이 있었다. 애초에 은정과 우석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주기적으로 붙어 있는 걸 피했었기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설마 그 자식이 내 능력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나? 민재는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어. 근데.”

민재가 우석의 말을 재촉했다.

“날 쓰레기로 봐….”

“…뭐?”

“몇 시간 간격으로 꽃 들고 찾아와서 날 노려본다고. 아주 무서워서 뒤지는 줄 알았어.”

우석은 지환의 태도에 꽤 화가 난 듯 이죽거렸다. 노려본다고? 걔가? 민재는 끽해 봐야 입을 삐죽 내밀거나 시무룩해하는 정도의 지환만 봤기 때문에 우석이 너무 과장한다고 생각했다.

“무서울 것까지야.”

“야, 나 후배들한테 인기 많은 선밴데. 그렇게 대놓고 노려보는 새끼는 처음이라고. 상처야.”

“…네가 뭐라고 둘러댔는데?”

“너 빈혈이고 엄살 많다고.”

내가 빈혈인데 지가 왜 우석이를 째려보고 다니지? 민재는 지환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떠다니는지 알 것 같았으나 알고 싶지 않았다.

“의심이 너한테로 쏠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내가 그냥 넘어갔는데. 너도 앞으로 어떡할지 좀 고민해 봐.”

민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부작용은 자신도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을뿐더러 조절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김진성 뒤져라. 망할, 페어라고 붙여서 이 지랄을 떨게 하고. 염병.

민재는 최근에 안 그래도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던 지환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좀 피해 다니는 게 좋겠지. 민재는 심란한 마음으로 꽃들을 바라보았다.

***

오준은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끝이 조금 시든 이파리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지. 물 자주 주는데. 그게 문젠가. 테이블 야자는 키우기 쉬운 거래서 데려왔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점심 맛있게 먹어요.

오준은 우석으로부터 온 문자를 확인했다. 같이 먹자도 아니고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며칠째 꾸준히 하고 있었다.

진짜 묘하게 사람 긁을 줄 안단 말이지. 오준은 지금 자신만 이 상황이 답답한 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나? 내가 착각하게 했나?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둥 시간을 많이 못 준다는 둥 들들 볶았던 게 누군데. 정작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도 않아놓고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입 싹 닦은 것처럼 구는 건 뭔데. 오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초밥 먹으러 가요. 맛있겠죠?

개뿔. 아악! 오준은 책상에 있는 커피잔을 우석 대신 노려보았다.

요 며칠 오준이 출근하면 우석이 사다 놓은 커피가 저렇게 놓여 있었다. 마시기도 그렇고 버리기도 그래서 커피를 저렇게 하루 종일 모셔 놓고 있어야 했다.

피 말려 죽이려는 건가. 미루고 미뤄왔지만 어찌 되었건 이제는 슬슬 결론을 내려야 하는 문제였다. 그래. 끝내자 질질 끌면 뭐 할 건데. 진짜 사귀기라도 하게? 오준은 문자를 입력했다.

-오늘 퇴근하고 좀 보죠.

-갑자기?

-오늘 일정 안 되면 되는 날 알려주세요.

-됩니다. 오늘 봐요.

그럼 처음부터 된다고 하든가. 오준은 알겠다고 답장했다.

“저녁 식사 했어요?”

퇴근 직후 우석과 센터 근방 골목에서 만나기로 한 오준은 약속 시간을 잘못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우석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건 지금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같은 직장 사람 만나면서 밥을 따로 먹고 만나자는 것도 이상했다.

“…아뇨.”

오준이 대답했다. 우석은 잠시 오준을 바라보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뭐야. 왜 웃어. 오준은 자신이 너무 여과 없이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던 건가 걱정이 되었다.

“한식 좋아해요?”

우석이 물었다. 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있었어요?”

우석이 자연스럽게 차까지 에스코트하자 오준이 살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있어요. 우석은 오준의 이상한 질문에도 그냥 평범하게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우석과 직장 밖에서 만날 때마다 둘 다 취했었다. 오준은 조금 머쓱해졌다.

“센터 근처에서 같이 있는 거 보이면 좀 곤란해하실 것 같아서요.”

우석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런 생각도 해줄 줄 알다니 좀 의외였다. 오준은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우석은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한정식집으로 오준을 데려갔다.

“…이런 데를 알고 있어요?”

오준의 질문에 우석이 웃음을 흘렸다.

“네. 놀랍죠?”

우석이 능글맞은 말투로 맞장구를 쳤다. 큼. 오준은 헛기침을 하며 빠르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에는 한 가지 메뉴밖에 없었다. 정식 메뉴였다. 둘이 자리에 앉자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계절에 맞는 식재료로 만들어진 정갈한 반찬과 밥이 나왔다.

“집밥이라 할 법한 걸 못 먹고 자라서요. 몇 년 전에 찾아낸 곳인데 가끔 와요. 이런 게 집밥이겠거니 하고?”

우석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준은 조금 숙연해졌다. 집밥을 먹는다는 건 오준에게도 꽤 오래된 일이었다.

“이런 걸 집밥으로 먹는 사람은 굉장히 좋은 집에 사는 도련님 정도겠네요.”

오준은 괜스레 딴지를 걸어보았다. 차려져 있는 찬이 10가지가 넘었기 때문이었다. 우석이 푸시시 웃었다.

“그럼 본인은 어떤 집밥을 주로 먹었어요?”

우석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오준은 엄마가 건강한 편이었을 때 자주 먹었던 집밥을 떠올려 보았다. 별거 아닌 소박한 것들이었다.

“우리 집은 계란프라이나… 감자볶음 같은 걸 많이 먹었던 것 같아요. 별거 없었어요.”

“그렇구나.”

우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반찬 중에 있는 감자볶음을 조금 집어 오준의 밥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뭐 해요?”

“계란도 하나 부쳐달라고 말해볼까요?”

오준의 물음에 우석은 뻔뻔하게 응수했다. 오준은 근처에 식당 종업원이 있지 않은지 빠르게 살폈다.

“조용히 해요.”

오준이 이를 악물고 경고하자 우석은 더 말하지 않고 미소만 지어 보였다. 오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숟가락으로 밥 위에 올려진 감자볶음을 입에 넣고 씹었다. 우석은 그런 오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이 나자 얼음을 둥둥 띄운 오미자차가 나왔다. 상도 다 치워졌다.

“할 말 이제 해도 돼요.”

우석이 말했다. 오준은 막상 판을 깔아주니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아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없던 걸로 해요, 우리.”

우석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눈만 한 번 깜박였다.

“실장님 좋은 분 같아요. 아니, 좋은 분인 거 이제 알겠어요. 근데 난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냥 적당히 나쁘지 않은 동료 사이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오준은 빠르게 와다다 말을 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후회했다. 왜 후회하는 거지? 오준은 혼란스러웠다.

“싫어요.”

그에 비해 우석의 대답은 간결하고 쉬웠다.

“뭐라고요?”

“난 만나보고 싶어요. 윤 비서님이랑.”

우석의 표정은 평온했다. 뭐가 그렇게 쉬운 건데. 오준은 며칠째 전전긍긍했던 자신이 우스워졌다.

“싫어요, 나도.”

오준이 거절했다. 우석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둘은 한동안 무표정한 얼굴로 대치했다. 그때 우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복귀해야겠네요. 데려다줄게요.”

“아니….”

“부탁해요.”

데려다주게 해달라고 부탁한 우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거절한 사람에게 더 못되게 굴 기력이 오준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오준은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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