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3
오준은 화초에 물을 주면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도 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디데이였다.
성격이 더럽게 급한 최우석 실장은 그동안 어떻게 참은 건지 아침 출근길에 보라고 친절하게 문자도 보내주었다.
-오늘 우리 약속 안 잊었죠?
-네.
오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생각 정리는 잘되던가요?
“누굴 놀리나.”
오준은 지난 삼 일을 바쁘게 보냈다. 그에는 자의와 타의가 반반 섞여 있었다. 센터장이 주는 잡일들을 처리하고, 퇴근 후에는 병원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잠깐씩 우석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지만 오준은 그것을 빠르게 지워냈다.
결론적으로 오준은 생각을 조금도 정리하지 못했다. 그리고 ‘어떡하지?’ 하는 생각으로 오늘 하루 근무시간을 모두 썼다. 오준의 핸드폰에 문자가 날아들었다.
-오늘 정시퇴근 가능해요?
야근한다고 할까. 오준은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어차피 만나긴 만나야 했다. 심야에 만나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덜 어두울 때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준이 답장을 하려던 찰나 센터장실 문이 열렸다.
“윤 비서, 가야 하는 곳이 있는데 좀 부탁해.”
“네, 알겠습니다.”
수행비서는 어디 팔아먹고? 생각하던 오준은 오늘 수행비서가 일이 있어 급하게 오후 반차를 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한숨을 삼킨 오준은 센터장의 차 키를 받아 들고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센터장님 모셔다드려야 할 곳이 있어서요. 바에 먼저 가 있으세요.
-기다릴게요.
오준은 기다렸다는 듯 오는 답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길 막히는 도로를 뚫고 달려 센터장이 말한 곳으로 운전을 했다가 다시 센터장 집까지 가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센터장은 사람 좋은 척을 하면서 오준에게 택시비를 내밀었다.
“피곤할 텐데 타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피곤한 줄 알면 끌고 다니질 말든가. 오준은 입 밖으로는 감사 인사를 내뱉으며 공손히 돈을 받아 들었다. 자존심 챙기겠다고 돈을 안 받는 건 손해 보는 짓이었다.
오준이 바에 도착했을 때는 아홉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우석은 바 테이블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오준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우석의 옆에 앉았다.
“죄송해요.”
오준은 사과를 건넸다. 그러나 우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은 오준은 옆을 돌아보았다. 우석은 미소 띤 얼굴로 오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죄송해요?”
우석이 물었다. 또. 또. 또. 지랄이네. 오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석이 농담이 재미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아줬으면 했다.
우석이 오준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오준은 메뉴판을 훑었다.
“킬빌이요.”
오준이 칵테일을 주문하자 우석이 킥킥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긴 거죠?”
“칵테일 이름이랑 잘 어울려서요.”
나요? 오준이 다시 묻자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화는 복수 대상한테 택시비 받고 돌아가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센터장이 자주 야근시켜요?”
“뭐, 필요하신 만큼 시키시는 편이에요.”
“자주 부려 먹는다는 이야기로 들리네요.”
오준은 우석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바텐더가 오준의 칵테일을 내밀었다.
“개자식이네.”
우석은 단조로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바텐더는 우석을 힐끔 쳐다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쿨럭. 킬빌을 들이키던 오준은 사레가 걸릴 뻔했다. 목구멍 안으로 달콤한 리치 향이 넘어갔다.
“그날.”
오준이 칵테일 마시는 걸 바라보던 우석이 운을 떼었다. 그날의 기억과 우석의 말에 따라 들어올 수많은 내용들이 떠올랐다. 오준은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센터장이 뭐라고 했어요?”
“…네?”
그러나 모든 예상을 뛰어넘은 뜻밖의 내용이 등장하자 오준은 당황했다.
“나한테 애들이 임무 투입되는 일 줄어들 거라고 했던 날이요.”
“…….”
우석은 몸을 살짝 틀어 오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준은 우석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건 결국 우석과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걱정? 아니면 취조? 어느 쪽이에요?”
오준이 되물었다.
우석은 오준의 말에 잠시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우석의 표정은 ‘취조’ 쪽을 생각지 못했다는 것처럼 보이게 했고, 오준은 조금 안심했다.
“내가 뭔가 오해하게 했나요?”
우석의 웃음이 썼다.
“걱정했어요. 김진성이 꽤 무자비한 편인 걸 알고 있어서요. 그만둘 수만 있으면 진작 그만뒀을 거라 그랬잖아요. 그 말이 내내 걸렸거든요.”
우석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준은 계속 뒤로 발을 빼고 있는데 우석은 그러지 않았다. 시발. 오준은 애꿎은 유리잔을 노려보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엄마 안부를 묻더라고요.”
“…네?”
우석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오준은 분위기가 너무 다운되지 않도록 단어를 골랐다.
“이래 봬도 청년 가장이거든요. 여기 잘리면 너 갈 데 있냐, 뭐 그런 거죠.”
“아….”
우석은 숙연해졌다. 오준은 자신의 이야기에 상대방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했다. 괜한 말을 했나 싶은 생각을 하는 순간도 좋아하지 않았다.
“개새끼. 삼대가 똥이나 밟고 넘어져라.”
오준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주라고 생각하기엔 귀여운 수준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그러자 우석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웃으라고 한 말이에요.”
오준이 말하자 우석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옅게 웃었다.
“…상냥하시네요. 어느 타이밍에 웃어야 하는지도 알려주시고.”
우석은 이상한 감상평을 내놓았다. 상냥하다는 단어는 방금 누군가를 저주한 사람에게는 적절하지 않은 발언이었으나 오준은 우석의 칭찬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칭찬 거리를 잘 찾아내시는 편인가 봐요.”
“나쁘지 않죠?”
우석은 잔을 들고 오준의 잔에 살짝 부딪혔다. 짠. 소심한 건배였다.
그의 말대로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예정에 없던 야근을 하고 불편한 원나잇 상대랑 만나고 있는데도. 오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고민 하나만 좀 들어줄래요?”
앞에 왜 ‘그럼’이라는 단어가 붙는지는 모르겠으나 오준은 알겠다고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갑자기 놓고 있던 긴장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우석은 후배들이 자신의 사무실에 오면 꼭 커피를 타주는데 다들 잘 마시질 않고 남기고 간다는 이야길 했다. 자신의 커피는 완벽한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오준의 입에서 다시 웃음이 새어 나갔다.
“상사랑 함께하는 커피 타임이 즐거울 리가 있어요?”
오준의 말에 우석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진짜 좋은 상산데. 애들도 매번 나 같은 사람 없다고 그래요.”
꼰대네. 오준은 판명을 내렸다. 우석은 아직 이십 대인데 그럴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런 식으로 별 볼 일 없는 대화들이 계속 이어졌다.
“이제 곧 마감 시간이라서요.”
바텐더가 말했다. 바는 새벽 6시가 마감이었다.
우석은 오준의 택시를 잡아주었다. 비서인 오준은 8시까지 출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빠듯했다.
오준은 집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바로 센터로 향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것도 아니었지만 완전히 깨지도 않은 상태라 멍했다.
-잠 못 자고 출근해서 피곤하죠. 책상에 커피 올려뒀으니까 마셔요.
우석이 보낸 문자였다. 오준은 자신의 데스크에 올려진 커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의자 옆에 놓여 있는 쇼핑백을 발견했다. 어제 갑자기 센터장이 끌고 나가는 바람에 챙기지도 못한 우석의 옷이었다. 뻔히 보이는 곳에 있는데 가져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오준은 그제야 우석과 자신이 정작 나누어야 할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미친놈아. 오준은 자조했다.
***
지환은 두 번째 비행 시연 연습에서는 바보처럼 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몇 번이나 혼자서 연습한 끝에 의연하게 민재를 들고 비행장으로 오는 데까지 성공했다.
민재는 챙겨온 로프를 꺼내며 지환의 허리춤을 끌어당겼다. 지환은 조용히 숨을 멈췄다.
“준비됐어?”
민재가 물었다. 네. 지환은 숨을 쉬는 게 들이마시는 것부터인지 내쉬는 것부터인지 고민하며 대답했다. 지환의 대답에 민재는 눈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어…. 제 목소리가 너무 컸나요.”
지환은 놀라서 속삭이듯 말했다. 민재는 고개를 흔들었다.
“숙취야.”
“…숙취요?”
민재는 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다가와 지환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이 왠지 조금 귀엽다고 지환은 생각했다.
지환은 어젯밤 민재가 어쩌다 술을 마셨고 누구와 얼마나 마셨는지 궁금해졌지만, 더 말을 붙이면 안 될 것 같아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환은 민재와 함께 저번처럼 급하강을 시도했다. 이 다음에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공중에서 백 텀블링을 3회 돌고, 직선 비행을 하다가 다시 앞으로 텀블링을 3회 돌면 성공이었다. 후. 지환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상상 속 관객들의 시야에 잘 보일 법한 거리까지 땅에 가까워졌을 때 지환은 뒤로 튕기듯 몸을 곧추세웠다.
발을 디디고 도약할 곳이 없기 때문에 허리 힘을 쓰는 게 중요했다. 아니면 우스꽝스러워지니까. 지환은 민재를 잡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괜찮게 하네.”
땅에 착지하고 나서 민재는 나지막하게 지환을 칭찬했다.
“네? 뭐라고요?”
안전에만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지환은 생각 없이 민재에게 되물었다. 민재는 지환을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잘했다고.”
잘했다고 하신 거 맞나? 지환은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왜 이래. 민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꿈 아니죠, 선배님?”
지환이 물었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꿈 아니구나. 지환은 혼자 대답했다. 능력을 쓰지 않아도 발끝부터 몸이 둥실둥실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선배님 근데 오늘 좀 재밌지 않았어요? 오늘은 케이블카 아니고 청룡열차?”
“청룡열차?”
“네. 아, 혹시 청룡열차도 타본 적 없으세요?”
지환은 저번에 케이블카 이야길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청룡열차의 짜릿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민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 지환의 뒤로 펼쳐진 비행장을 바라보았다.
“어. 키가 안 되어서. 그때는.”
그때라면 어릴 때 말인가? 지환은 민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놀이공원에 갔던 이야기를 하는 것치고는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도 놀이공원은 가보셨네요.”
지환이 정적을 깨보고자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민재는 무표정을 지우고 옅은 미소를 지어냈다.
“근데 네가 오늘 운전한 것처럼 열차 몰면 애들 다….”
민재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갑자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선배님?”
지환과 민재를 연결하고 있는 로프 고리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고꾸라지는 민재를 지환이 겨우 받쳤다.
지환은 문을 부수듯이 열고 가이딩실 안으로 들어섰다.
“실장님!!!”
지환은 우석을 찾았다.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부르고 있었다. 털레털레 걸어 나오던 우석은 민재를 안고 있는 지환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개인 병동 문이 거칠게 열렸다. 지환은 뛰어 들어가 민재를 침대에 눕혔다. 우석이 따라 들어왔다. 민재 위에 엎어지듯 허리를 숙이고 있는 지환을 우석이 밀어냈다.
“너 나가.”
“저….”
지환은 몸을 일으키다가 로프에 걸려 휘청거렸다. 우석은 빠르게 민재의 허리에서 로프를 빼내고는 지환을 가이딩실 밖으로 내보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가온 우석이 휴지를 내밀었을 때, 지환은 자신이 내내 울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선배님은요? 갑자기 몸을 떨다가… 분명 괜찮으셨는데…. 선배님 어디 아프신 거예요?”
지환이 물었다.
“야, 괜찮아. 별거 아니야. 그냥… 빈혈 있어서 저러는 거야.”
우석은 친한 친구가 갑자기 쓰러져서 후배에게 들려 왔는데도 너무 침착했다. 지환은 별게 아니라는 우석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빈혈이요? 쓰러질 정도면 심각한 거잖아요.”
“금방 일어나. 걱정 안 해도 되는 수준이야.”
걔가 원래 좀 엄살을 잘 부리거든. 우석은 지환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병실은 아직 출입 금지니 들어가지 말란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엄살이라고? 지환은 자신이 들은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