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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32)화 (33/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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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은 자신의 사무실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눈을 감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계세요?”

“들어와.”

우석은 상체를 일으켜 자세를 바로 했다. 문을 열고 서연이 들어왔다.

“부르셨다고요.”

“응. 커피? 녹차?”

“녹차요.”

우석은 커피포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 서연의 대답에 방향을 틀었다. 우석은 머그잔에 녹차 티백을 넣고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서연에게 건넸다.

“나 같은 상사 없다, 그치?”

우석의 말에 서연은 방긋 웃기만 했다. 서연은 이런 장난에는 잘 반응해 주지 않았다.

“센터에 돌아오니까 좀 어때. 여독은 풀렸어?”

“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서연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우석은 물을 떠서 자리에 앉았다. 서연은 호호 불어가며 차를 마셨다.

“은정이는 좀 어때?”

우석의 질문에 서연은 잠시 우석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알기 어려운 무표정이었다.

뭔가 화가 난 건가? 우석이 생각하는 사이 서연은 다시 싱긋 웃어 보였다.

“은정이랑 친하지 않으세요?”

직접 들으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돌려 하는 것 같은데. 우석은 큼, 작게 헛기침을 했다.

“친하긴 네가 더 친하지. 요새 너랑 노는 게 좋은지 코빼기도 안 보이던데.”

“은정이한테 삐지셨군요?”

실장님도 참. 서연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됐다, 됐어. 우석은 서연의 앞으로 보고서를 내밀었다.

“보고서 잘 썼더라.”

“감사해요. 근데 그 말 하시려고 저를 부르신 거예요?”

서연의 동그랗게 뜬 눈에 악의는 없었다.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래도 우석은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확실히 친구라 그런지 여은정이랑 좀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은근히 싸가지가 없어. 우석은 생각했다.

“어머, 진짜 은정이한테 삐지셨어요?”

서연은 승리자처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찾아뵈라고 할게요. 한술 더 뜨기까지 했다. 우석은 그냥 본론부터 꺼내기로 했다.

“보고서에 적은 가이딩 거부 에스퍼. 반응이 정확히 어떤 식이었어?”

“…가이딩을 받으면 죽게 될 거라고 두려워하더라고요. 수면제 먼저 주사하고 가이딩해야 했어요. 실장님도 눈치채셨겠지만 까마귀 쪽 아이 같더라고요.”

역시 눈치가 빠르네. 우석은 이미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이야기하는 서연을 바라보았다. 조금은 부담스러울 정도의 똑똑함이었다.

“발현 가능성 검사 뉴스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맞아. 혹시 그런 애들이 이번 출장 때 유독 많다거나 그런 느낌은 못 받았어?”

음. 서연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진 않았던 것 같아요. 한 지역에서 특이 케이스가 나타나는 경우 그 근방의 지역들과 서로 공유하는데, 근방 지역에서도 특별하게 많지는 않았어요.”

수도 중심으로 활동하는 건가? 우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까마귀가 갖고 있는 세력의 크기를 짐작하기가 어려워졌다.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으세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석은 서연이 까마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알고 있다면 자신에게 얼마나 공유해 줄 수 있는지도.

은정은 서연을 믿겠지만 우석은 아니었다. 우석은 민재를 제외하고는 타인을 믿지 않았다. 그건 애정을 주거나 도움을 주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순간 우석은 오준을 떠올렸다. 그리고 씁쓸해졌다.

“안타깝게도 아직. 갈피를 못 잡겠네.”

우석은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 못 되어서 죄송해요.”

서연이 사과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우석은 쓴웃음을 삼키며 서연을 배웅했다.

***

지환은 훈련장 안에서 달려드는 익룡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오늘도 힘차게 ‘민재 선배와 여러 번 마주치기 대작전’을 성공시킨 지환은 훈련장에 들어서면서 고민을 했다. 자신의 비행 실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였다.

초급이라기엔 자존심이 상했고, 중급이라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지환은 망설이다가 중급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빔을 쏘아대는 익룡과 마주쳤다.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 있는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지환은 자신의 선택을 격하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익룡이 날아오는 속도가 빠르다는 것도 무서웠지만 빔을 피하려면 익룡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는 게 더 무서웠다. 익룡의 눈은 눈동자가 없는 것처럼 아예 검은색이었는데, 어딜 보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더 무서웠다.

겨우겨우 빔을 피해내면 그 자리에서는 불길이 치솟았기 때문에 움직임이 계속 한정되었다. 지환은 계속 방향을 바꾸면서 비명을 질렀다. 아악! 악!

앞을 살피려고 고개를 돌린 지환은 눈앞의 무언가와 부딪혔다. 지환은 코를 잡고 굴렀고, 그의 옆으로 무언가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고개를 돌리니 불길들 사이에서 익룡의 모가지를 틀어쥐고 있는 듯한 인영이 보였다. 검은 액체가 그의 손을 타고 흐르는 게 보였다.

잠시 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시뮬레이터가 꺼졌다.

“…괜찮아?”

운동복을 입은 호영이었다. 놀란 표정이었다. 지환은 코에서 손을 황급히 떼어냈다.

“괘, 괜찮아요!”

“…지환아, 너 코피 나.”

실소를 흘린 호영은 훈련장 구석으로 걸어가 휴지를 가져왔다. 괜찮아? 호영이 휴지를 내밀며 한 번 더 다정하게 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한 지환은 휴지로 코 주변을 닦아냈다. 빨간 피가 묻어났다.

지환은 조금 전 호영의 손을 타고 흐르던 검은 액체를 떠올렸다. 그러나 지금 호영의 손에는 액체가 묻어 있지 않았다.

“미안, 스트레스 좀 푼다고 모드 설정을 좀 다르게 해놨었는데 네가 먼저 와서 켤 줄은 몰랐네.”

호영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그럼 저 익룡 모드가 스트레스 푸는 용이라고? 선배님 진짜 대단하시구나…. 지환은 어쩐지 호영과 눈을 똑바로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중급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 봐요.”

지환은 살짝 땅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직은 초급으로 하는 게 좋을 거야. 다치면 안 되니까.”

잠시 가만히 있던 호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충고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잠시 망설인 것 같았다.

난 언제까지 초급이지? 지환은 조금 서러워졌다. 그러나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문득 자신이 바보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호영이 밖에서 봤을 생각을 하니 부끄러워졌다.

“아, 하하. 밥이나 먹어야겠어요. 다음에 봬요, 선배님.”

“응? 어어, 다음에 봐.”

잠깐의 적막이 흐른 후 지환은 급한 볼일이 생각난 사람처럼 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도망치듯 훈련장을 빠져나왔다.

지환은 복도에서 태현과 마주쳤다. 그리고 귀찮아하는 태현을 질질 끌고 급식실로 향하는 데 성공했다.

“난 밥 먹었다니까?”

“형, 또 먹을 수 있잖아.”

“난 돼지가 아니야.”

태현의 투정은 가볍게 넘겼다.

태현과는 가끔 다투는 느낌이어도 이렇게 편한데. 역시 선배님이어서 그런가. 지환은 다정한 호영에게서 느껴졌던 묘하게 어색한 기류를 어떻게 없앨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다.

“형, 있잖아. 나 조금 전에 훈련실에서 호영 선배님 만났거든?”

“엉.”

“근데 선배님이랑 어색했어.”

“네가 싫은가 보지.”

“그런가.”

태현은 장난으로 던진 말에 지환이 진심으로 시무룩해하자 당황해했다.

“야, 그럼 내가 뭐가 되는데! 뭔데!”

지환은 호영과 다투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태현의 표정이 묘해졌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태현은 작게 혀를 찼다.

“보통 아니네.”

“…왜에.”

지환이 소심하게 물었다.

“너 주호영 에스퍼가 원래 A급이 아니었던 건 알아?”

“…그래?”

“그래. A급을 달자마자 다른 동급을 제치고 그 사람이 제1팀이 되었어. 이게 무슨 말이겠어?”

“어… 우와, 대단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호영 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지환은 생각했다.

“우와, 바보냐.”

태현은 지환에게 감탄사를 내뱉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냥 상황상 네가 굴러들어온 돌 된 거니까 지금은 자극하지 말고 피해 다녀. 어색한 거 못 참겠다고 막 부담스럽게 말 붙이지 말고.”

진지한 얼굴로 태현이 충고했다. 응, 알겠어. 태현에게 약간 정곡이 찔려 버린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

민재는 또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얼마 전 가이딩실에서 그를 염탐하다가 들킨 지환은 자신이 귀신이 아니라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입증해야 했다.

그때 너무 열심히 우연인 척하기에 넘어가 주었더니, 따라다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불쌍한 척을 하려는 건지 아니면 본인이 안 보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깨를 좁게 접고 다녀서 그게 더 눈에 띄었다.

그러다 마주치면 그냥 ‘안녕하세요.’라는 인사가 다였다.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민재는 생각해 보았으나 요즘 애들 머릿속에 뭐가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우석에게 의논할 것이 생겨 가이딩실에 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민재는 지금 지환을 따돌려야 했다. 멍청한 페어에게는 그다지 다른 의도가 있을 것 같진 않았지만, 우석과 오늘 나눌 대화는 극비이기 때문이었다.

민재는 사람이 많은 로비로 가 지환이 따라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지환이 보이자마자 방향을 빠르게 바꾸어 에스퍼와 가이드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부러 숙소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돌아서 가이딩실로 향했다. 중간에 슬쩍 살펴보았을 때 지환은 로비에서 계속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틈에 민재는 빠르게 우석의 사무실로 향했다.

우석은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 해?”

민재가 들어서면서 물어보자 우석은 순간 굳어버렸다.

“숨 쉬고 있는 거 맞지?”

민재가 물었다.

“노크. 노크! 새끼야.”

우석은 신경질을 냈다. 민재는 터벅터벅 걸어가 우석의 소파에 드러누웠다.

“연애하냐.”

민재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아니.”

우석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연애 문제가 있는 건 맞네. 민재는 확신했다.

우석은 일 문제로 연락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저렇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만 있지 않는다. 찾아가서 조져놓는 편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애먹이나 보네. 민재는 조금 재밌어졌지만 섣불리 친구를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얼마 전에 좀 재밌는 이야길 들었는데 말이야.”

“…말해.”

우석은 민재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민재는 없는 수염을 잡아 비비는 시늉을 했다.

“간만에 잠행을 나가볼까 하네만.”

우석의 얼굴이 단박에 구겨졌다.

“불허한다.”

“네 이놈! 뭔 줄 알고 지껄이는 게냐.”

“어허, 불허한다지 않느냐!”

민재와 우석은 서로 소용없는 호통질을 했다. 우석은 이제 재미없으니 빨리 말하라고 재촉했다.

“얼마 전에 들어온 그 꼬맹이가 알려준 건데, 에스퍼로 살지 않게 해준다고 하고 학부모들을 꼬신대.”

“…까마귀가?”

“그렇다더라고. 조만간 한번 들어가 보려고.”

“…괜찮겠어?”

우석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걱정을 한가득 쌓아 올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민재는 웃어 보이며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 딸 있다고 하면 믿을 거 같냐. 아무도 안 믿을 거 같지.”

잠입하려면 딸이 이상 증세를 보여 괴로워하는 아버지 역할이 나을 것 같은데. 민재가 중얼거렸다.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하던 우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거야. 딸 셋 있다 해도 믿을걸.”

이 새끼가?

“…그 사람한테서 아직 연락 안 왔어?”

우석의 반응에 심술이 난 민재는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듯이 공격을 시도했다. 우석은 무심결에 핸드폰을 눌러 화면을 확인했다.

“어. 안 왔… 야!”

우석이 민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있긴 있네. 민재는 확신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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