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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31)화 (3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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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급식실 메뉴판을 노려보고 있는 태현을 바라보았다.

“별로 달라진 메뉴는 없는 거 같은데?”

지환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좆같아.”

“아.”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라진 게 없는데 10분째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뭐야? 지환은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태현의 표정이 꽤 살벌했기 때문이다.

“형, 그냥 카레 먹어.”

“그래.”

지환은 10분을 더 기다리다 말을 걸었다. 그러자 태현은 의외로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험악한 얼굴로 메뉴를 고민하던 사람 같지가 않았다.

지환은 조금 어이가 없어져 태현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같은 메뉴를 선택하고는 식권을 들고 급식실 안으로 들어갔다.

“뭐 안 좋은 일 있어?”

“어, 있어.”

“뭔데?”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테이블에 놓은 지환이 태현에게 냉수를 떠다 주며 물었다. 태현은 지환이 떠온 냉수를 한 번에 들이켰다.

지환은 잠시 빈 컵을 바라보다가 냉수를 새로 떠다 주었다. 고마워. 인사를 건넨 태현은 컵과 지환을 번갈아 보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뭔데?”

지환은 왠지 서운해졌다. 입을 삐죽 내밀자 태현은 숟가락으로 지환 앞에 놓인 음식을 가리켰다.

“얼른 먹기나 해.”

지환은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태현은 메뉴를 그렇게 고심했으면서 밥을 깨작거리기만 했다. 이따금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기도 했다.

근처 자리에서 즐거운 웃음소리와 맞장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꽤 큰 목소리에 지환은 밥을 먹다가 고개를 들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은정 선배와 이서연 가이드였다.

“사이가 되게 좋네.”

중얼거린 지환은 문득 태현을 돌아보았다. 태현의 시선이 은정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꽤 날 선 시선이었다.

지환은 다시 은정과 서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은정은 서연의 식판 위에 무언가 올려주었다. 그리고 서연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거나 하면서 식사를 하는 내내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밥을 먹는데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둘은 계속 웃는 얼굴이었다.

아하하. 그게 뭐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건지 서연이 유쾌하게 웃었다.

서연이 센터에 돌아온 뒤로는 급식실에서 둘이 저러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은정과 서연은 끼니마다 함께하는 듯했다.

“…페어라서 그런 거겠지.”

태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페어면 다 저런가?”

“뭐, 그렇겠지.”

지환의 질문에 태현은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여전히 시선은 은정과 서연에게로 고정한 채였다.

저 둘이 좀 유별난 건가? 지환은 고민했다. 그리고 민재를 떠올렸다.

선배님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저번 주였던 것 같은데. 너무 오래 못 만났다. 은정 선배님은 저렇게 페어랑 잘 지내시는데. 역시 자주 만나야 저렇게 가까워지는 건가.

지환은 저번 주에 했던 비행 시연 훈련을 떠올렸다. 그때는 민재 선배와 조금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은정과 서연의 모습을 보니 자신은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둘은 한쪽이 가이드라 그런가? 그러고 보면 지환과 민재는 페어인데 둘 다 에스퍼였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친해지지?”

지환이 중얼거렸다.

“보통은 에스퍼가 가이드들을 찾아다니지. 가이딩 받아먹으려고.”

태현이 대답했다. 왜인지 모르게 비꼬는 듯한 말투였다. 형도 에스퍼잖아? 지환이 물었지만 태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신경질적으로 카레를 휘적거렸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형 왜 화났는지 알겠다.”

지환이 말했다. 태현은 그에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며 지환을 바라보았다.

“뭐, 뭐가?”

“누나랑 싸웠지?”

“…….”

태현의 얼굴이 멍해졌다. 역시. 정곡을 찔렀네. 지환은 생각했다.

“출장 갔을 때는 그렇게 걱정하더니. 누나한테 잘해드려. 원래 가족한테는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거랬어.”

“…와.”

태현이 작게 감탄했다. 내 말이 맞지? 지환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태현은 그런 지환을 잠시 가만히 보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넌 이런 점이 참….”

“엉?”

“나쁘지 않네.”

“뭐야, 욕이지?”

“칭찬이야.”

태현은 지환에게 웃어 보이고는 식은 카레를 떠먹기 시작했다. 무슨 칭찬을 그렇게 싱겁게 해. 툴툴거린 지환은 태현이 식사를 마저 끝내기를 기다렸다.

태현이 식사를 마치고 나면 민재가 어디 있는지 찾아볼 셈이었다.

***

민재는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후 4시였다.

어제 새벽, 민재는 가이드실의 긴급 호출을 받았다. 너덜너덜한 한 에스퍼의 다리를 이어 붙이고는 피곤한 몸을 끌고 돌아와 술을 들이켜고 잠을 청했다.

자고 일어났는데도 피로감이 가시지 않았다. 민재는 침대 옆 컨트롤러로 tv를 켰다. 뉴스 채널에서 한 앵커가 마이크를 들고 말하고 있었다.

[에스퍼 발현 가능성 검사를 거부하는 학부모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매 학기마다 유치원생,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검사가 부모의 양육권을 침해한다고 거부한 것입니다.]

지랄. 민재는 중얼거렸다.

[현재 에스퍼 발현 가능성 검사는 필수가 아닌 권유 사항으로, 학부모가 거부하면 학교에서 검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교육청은….]

에스퍼로 발현하기 전에도 가이딩을 소량으로 흡수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재미있게도 가이딩을 흡수한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모두 에스퍼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흡수하지 않는 경우보다 에스퍼가 될 확률이 높을 뿐.

그래서 가이딩을 흡수하는 아이의 경우, 부모에게 충분한 설명 후 비상용 가이딩 물약을 소량 지급하는 방식으로 가능성 검사를 하고 있었다. 폭주로 인한 참사를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에스퍼 검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인터뷰에 응한 학부모는 가능성 검사는 오차율이 높은데 괜히 불안에 떨고 싶지 않다는 이야길 했다.

저런 학부모가 늘고 있다는 건 까마귀 신자가 늘고 있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규모가 이 이상 커지는 건 달갑지 않은데. 민재는 생각했다.

민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서 일어나 암막 커튼을 열었다. 그리고 창문 근방을 배회하듯 날아다니고 있던 지환과 마주쳤다.

“…뭐?”

“어? 안녕하세요!”

두리번거리다 민재를 발견한 지환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가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민재는 창문을 살짝 열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아, 저… 그냥 날아다니고 있었는데요? 선배님을 이렇게 만나다니 우연이네요!”

뭐라는 거야. 미친놈 아냐, 이거. 민재는 할 말을 잃었다. 암막 커튼을 치려던 그는 다시 커튼을 젖혔다. 지환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민재를 보고 있었다. 스릴러냐. 민재가 중얼거렸다.

선배님? 지환이 민재의 표정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가로 다가왔다.

“어디 아프세요?”

“…머리가 아프다.”

“네? 왜요?”

민재는 대답하지 않고 유리창에 희미하게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허옇게 질려 가지고는 귀신을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지환은 상태를 살피려는 듯 창문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민재는 조용히 손을 뻗어 지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

지환은 민재에게 단단히 혼이 났다. 숙소 창문 쪽을 변태처럼 배회하는 일이 다시 일어났다가는 제1팀에서 바로 퇴출이라는 경고까지 들었다.

지환은 이제 특별한 이유 없이는 센터 내에서 비행 금지였다.

그냥 민재 선배가 있는 층 쪽을 돌아다녀 보다가 정말 우연히 마주친 건데. 물론 마주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지환은 조금 억울했으나 화난 민재의 기백에 눌려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비행이 금지당했지만 지환은 굴하지 않고 민재를 찾아 뛰어다녔다. 지환은 복도를 걸어가는 민재를 발견하고는 잽싸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민재는 피곤한지 관자놀이를 손으로 지압하며 고개를 까딱였다.

“저 안 날았어요. 뛰어왔어요.”

“……?”

민재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은 잠시 민재가 자신의 지시를 까먹은 것인지 생각했다. 그럼 다시 날아다닐 수 있는 건가?

“네가 어떻게 온 건지는 나도 보여. 보고할 필요 없어.”

아. 그냥 어이가 없으신 거였구나.

“그, 그렇죠. 하하.”

지환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민재는 지환을 지나치려다 말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건 네 마음인데 숙소 근처 얼쩡거리는 건 하지 마. 알겠어?”

“…네!”

지환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민재도 고개를 까딱이고는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자주 보니까 용서도 빠른 것 같은데? 효과 있는 것 같은데? 즐거워진 지환은 발을 공중으로 약간 띄운 채 민재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민재는 곧바로 자료실로 향해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어디론가 향했다. 로비 근방의 급식실을 지나치는 민재를 보고 지환은 살짝 거리를 좁혔다.

밥 먹으러 들어가시면 곧바로 따라 들어가서 우연히 합석해야지! 그렇게 마음먹었으나 민재는 밥을 먹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 다른 건물로 향했다.

“…너 뭐 하냐.”

건물 기둥 뒤에서 민재가 가는 방향을 좇던 지환에게 태현이 물었다. 화들짝 놀라 가슴팍을 부여잡은 지환은 태현을 보고는 심호흡을 했다.

“형, 인기척 좀 내고 다녀!”

“뭐 어쩌라는 거야. 쿵쿵 땅을 울리면서 다녀?”

“어!”

태현은 어이를 상실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고는 사라졌다. 그 바람에 지환은 민재의 행방을 놓쳤다.

아, 안 되는데. 지환은 빠르게 좀 전까지 민재가 가고 있던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민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환은 탐정이 된 것처럼 민재가 갈 만한 곳을 추리해 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가이딩실이었다. 그러자 이전에 가이딩을 해준 적이 있는 가이드가 인사를 건네왔다.

“어? 지환 씨!”

지환은 깜짝 놀라 검지를 코에 갖다 대며 쉬잇! 하는 소리를 냈다. 간절하게 고개를 저어 보이자 가이드는 몸을 움츠렸다.

“무슨 일이에요?”

가이드가 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민재 선배님, 여기 오셨어요? 지환이 물었다. 가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환은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고는 가이딩실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두 다리를 공중에 동동 띄운 채였다.

“왜 또 왔어?”

가이딩실 구석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까칠한 말투였다.

“문병 왔지. 원래 친구가 아프면 문병 오는 거야.”

민재의 목소리였다. 지환은 귀를 기울이며 구석에 커튼이 쳐진 간이침대 근방으로 날아갔다.

“난 안 아파.”

“아파. 너 가이딩 안 받는다고 떼써서 아프니까 자꾸 쓴 약 먹잖아. 어제도 팔에서 피 나고 아야 했어, 안 했어.”

민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비록 내용은 약간 퉁명스러운 구석이 있었지만, 퍽 다정하게 달래듯이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치만….”

“그치만 뭐.”

“계속 약 먹고 그러다가 진짜 집에 못 돌아가면 어떡해?”

“…….”

“백 밤 멀었어?”

지환은 흰색 커튼 안으로 슬쩍슬쩍 비치는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민재는 침대에 걸터앉아 작은 인영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이딩을 받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구나. 아직 어려서 무서운가? 지환은 앳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렇게 어린 에스퍼들도 센터에 소속되는지는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어린아이들이 교육받는 공간은 따로 있다고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아직 멀었어. 너 말 안 들으면 백 밤 지나도 집에 안 보내준다.”

“싫어!”

작은 손이 민재를 밀치는 게 보였다. 민재의 상체가 휙 밀쳐져서 침대로 쓰러졌다. 헉. 당황한 지환은 커튼을 열어젖혀야 할지 고민했다.

“…아파?”

아이가 물었다.

“어, 아파.”

“…빨리 그거 해. 빛. 해.”

아이가 보채는 거 같았다. 민재는 천천히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럼 나랑 여기서 일주일에 한 번씩 논다고 약속해.”

“놀아? 뭐 하고?”

“…가위바위보?”

그건 재미없어. 아이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하다 보면 재밌을 거라고 우기는 민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따뜻한 광경이다.

지환은 아이와 민재가 우정을 나누는 순간을 지켜주고자 조용히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귀신이야!”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커튼이 빠르게 걷혔다.

“…또 너냐?”

민재가 환장한다는 얼굴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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