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뭐 하자는 건가요, 윤 비서님.
오준은 우석의 문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게. 뭐 하자는 건지.
-진짜 무슨 일 있어요?
다시 핸드폰이 울렸다.
우석은 걱정과 협박을 번갈아 하면서 오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다. 일을 하다가 짬이 날 때마다 문자를 보내는지 아무 때나 알림이 울렸다. 오준은 우석의 문자에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차라리 기억이 없으면 좋았을 텐데. 없던 일로 하자고 하기는 너무 양심이 찔렸고-분명 오준이 먼저 덮쳤다- 있던 일로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직장 사람에다가 가이드실장인 최우석과 밤을 보내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지. 오준은 자책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거예요?
근데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집요한 건데? 책임감 그런 건가. 아니면 오기로? 오준은 고민했다. 평소 가이드들 챙기는 것도 그렇고 술 취한 자신을 씻겨주고 집에 데려간 걸 보면 책임감일 가능성이 있었다.
오준은 새벽에 어둠 속에서 자신을 보던 우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악! 그걸 생각하면 어쩌자는 건데. 오준은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조금.
조금의 말미를 주세요, 라고 입력하던 참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에서 센터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윤 비서, 최근 여론조사 자료 갖고 있는 거 있어요?]
“통계본은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하시면 제가 다시 정리해서 보고할까요?”
[음, 그럼 윤 비서가 정리해서 줘요. 유능하니까 잘할 수 있죠?]
센터장은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딴에는 농담을 던진다고 하는 거 같았다. 씨발. 길 가다가 코나 깨져라. 오준은 속으로 저주를 퍼부으며 단정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스피커가 꺼졌다. 오준은 보내려던 문자를 마저 입력하려고 핸드폰 화면을 다시 켰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답장이 보내져 있었다.
어? 오준은 문자창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문자가 잘못 보내진 덕에 ‘조금 잘못한 사람’이 된 우석이 보내놓은 답장들을 마주했다.
-조금?
-그럼 설명해 줘요. 내가 사과할 수 있게.
-지금 센터장실 앞으로 갈게요.
이 미친! 성격이 왜 이렇게 급해! 오준은 빠르게 타자를 쳤다.
-오지 마세요.
-가고 있어요.
-조금의 말미를 달라는 거였어요. 생각 정리 좀 하게.
오준의 문자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답장이 오지 않았다.
설마 진짜 오는 거 아니겠지. 오준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걸 느꼈다.
한동안의 정적 끝에 다시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조금 얼마나? 많이는 못 줘요.
-행복한 병원입니다. 환자분 수술 시 주의사항 안내가 필요하니 가능하실 때 연락 바랍니다.
우석의 문자와 동시에 다른 문자가 왔다.
오준은 엄마의 병원에서 온 문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삼 일이면 괜찮죠?
우석이 기간을 제시했다. 사실 삼 일이든 이틀이든 상관없었다. 오준은 그저 지금 당장 우석을 만나지 않을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네. 옷도 그때 돌려드릴게요.
-그날 바람맞히면 진짜 센터장실로 갈 거예요.
오준은 우석으로부터 온 문자들을 모두 삭제했다. 그리고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
민재는 로비에 서서 수통에 든 보드카를 마셨다. 창밖은 어둑했다. 어둠이 금세 손을 뻗어 목을 틀어쥘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이 민재를 덮쳤다.
민재는 눈을 감고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오늘은 지환과 첫 비행 연습을 하는 날이었다.
그는 지환이 도착하기 전에 두통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안 그래도 멀미를 할 텐데 두통도 겹치면 죽고 싶을 것 같았다.
“선배님?”
꽤 나긋한 목소리였다. 민재는 눈을 뜨고 자신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긴장을 한 건지 지환은 차렷 자세로 허리를 살짝 숙여 민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너 음료 한 번 사 먹었더라.”
민재가 말하자 지환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살짝 접혔다.
“네, 저 잘했죠.”
그게 칭찬할 만한 일인가? 민재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 자신보다 오래된 선배의 카드를 받아본 적이 없는 민재는 그냥 제 딴에는 꽤 용기가 필요한 것이었나 보다 싶어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계속 자신의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지환의 어깨에 한 손을 올렸다. 지환의 눈이 다시 크기를 키웠다.
“가자.”
“…어, 어떻게요?”
어떻게? 민재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지환을 바라보았다.
진짜 진심으로 묻는 건가? 민재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호영과 만나 면담을 한 후로 민재는 후배들에게 화를 덜 내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는 좀 더 신경을 쓰기로 한 거지만.
애초에 민재는 후배들에게 딱히 관심을 갖지 않아서 지환 이외의 후배에게는 화를 내본 적이 거의 없긴 했다.
“네가 날 들지 않으면 못 가는 곳에 비행장이 있단다.”
꿀꺽. 지환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민재한테까지 들려왔다.
지환은 천천히 한쪽 팔은 민재의 등에 대고 한쪽 팔은 민재의 다리 뒤쪽에 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민재를 안아 들었다. 지환이 어찌나 손을 떨어대는지 민재의 등에 진동이 다 느껴졌다.
“야.”
“네?”
민재의 부름에 지환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 무겁나. 민재는 좀 민망해졌다.
“…많이 무겁냐? 힘들면 자세 바꿀까?”
업는 자세가 나으려나. 민재는 고민했다.
“아뇨! 깃털처럼 가벼우세요!”
지환은 열심히 도리질을 했다. 민재는 방금 전보다 조금 더 어이가 없어졌다.
“그딴 멘트는 네 애인한테나 쳐.”
“네엡.”
지환은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재는 지환이 입고 있는 점프수트의 앞 지퍼를 조금 내리고는 한쪽 깃을 잡아 쥐었다.
“서, 선배님?”
“미안. 내가 전적이 있어서 잡을 데가 필요한데 멱살을 잡으면 네가 숨을 못 쉴 거 아냐.”
민재의 말에 지환이 고개를 숙였다. 민재의 시야에 붉어진 귓불이 보였다. 그렇게 당황스러웠나.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민재는 모르는 척 턱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고개 들고 저리로 가. 건물 지붕 쪽에 부딪히지 않는 높이로. 너무 높게 오르지도 말고. 위치 확인해야 하니까.”
네. 지환은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환과의 비행은 의외로 편했다. 지환은 이전처럼 방향을 제멋대로 휙휙 틀거나 바람의 방향을 파악하지 못해 턱턱 숨 막히게 하지도 않았다.
적당한 세기의 바람을 쐬자 두통도 조금씩 가시는 것 같았다. 지환의 옷을 움켜쥔 민재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많이 늘었네.”
민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죠? 다 선배님 덕분이에요.”
지환은 때를 놓치지 않고 아부를 했다. 민재는 헛웃음을 흘렸다.
“원래 네 나이 때 애들은 다 너처럼 그래?”
“네? 아니 그보다, 선배님 저보다 겨우 여섯 살 많으시잖아요. 누가 들으면 한 이십 년 차이 나는 줄 알겠어요.”
성인이 되고 나면 6살 차이도 꽤 컸다. 세대 차가 있는 나이였다.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게 까불어. 민재는 코웃음을 치며 저 앞에 있는 관제탑을 가리켰다.
“저쪽이야. 저기 상단부로 착지해.”
네. 지환의 불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관제탑 상단부에 있는 난간에 착지한 뒤 민재는 지환의 손목을 끌어다 가이딩을 확인했다. 아직 초록불이었다. 지환은 민재가 하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민재는 어둠 속을 뒤져서 조명 스위치를 찾아냈다. 스위치를 켜자 비행장에 남아 있는 조명들이 켜졌다. 안전을 위해 곳곳에 위치나 장애물이 표시된 조명이었다.
우와. 지환이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감탄했다.
“이전에는 공항이었어. 지금은 우리 쪽에서 싸게 인수해서 비행 연습장으로 쓰지만.”
“여기 있던 공항은 왜 없어졌어요?”
“폭탄 세 번째 맞은 후로는 항공사들이 여길 뜨고 싶어 했거든. 비행기 가격이 얼만데 여기 재수 옴 붙은 거 같다고.”
아…. 지환이 낮게 탄식했다. 작고 붉은 불빛들이 곳곳에서 깜박였다. 민재는 두 개의 불빛 위치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기서 오 미터 정도 급하강한 다음에 저 두 불빛 사이로 팔자 그리면서 두 바퀴 도는 것부터 할 거야.”
민재는 주머니에서 두 개의 로프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수트 허리춤과 지환의 허리춤이 이어지게끔 고리를 이어 연결했다. 지환과 민재가 나란히 나는 모양새가 될 수 있도록 한쪽은 짧고 한쪽은 긴 로프가 연결되었다. 그리고 민재는 그것을 잡아당겨 동여맸다. 둘의 허리가 붙은 채로 단단히 고정되었다.
“어… 어… 왜 이렇게.”
지환이 말을 더듬거렸다.
“시연할 때도 내가 너한테 공주처럼 안겨 있을 순 없잖아. 네가 한 팔로 나를 지탱해야 하는데 잘못하다 놓치면 둘 다 끝이니까 안전망 대신이야.”
아…. 지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로프가 단단히 고정된 걸 확인한 민재는 지환의 옆에 허리를 펴고 섰다. 그리고 지환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허리를 잡게 했다. 민재도 팔을 뻗어 지환의 허리를 짚었다.
“자, 잠시만요, 선배님.”
지환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자 민재가 그의 허리를 툭툭 쳤다. 지환은 작게 몸서리를 쳤다.
“허리 힘줘. 불편해도 시연할 때는 자세가 바르고 곧아야 하니까.”
“…네.”
“준비됐어?”
아마도요. 지환이 작게 중얼거렸다. 민재는 지환의 허리를 가볍게 밀었다. 둘은 아래로 동시에 뛰어내렸다. 민재의 허리에 감긴 지환의 팔에 단단하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지금.”
민재의 지시에 지환이 방향을 틀었다.
의외로 지환의 비행은 꽤 부드러웠다. 민재는 방향을 틀 때 꼴사납게 몸이 틀어지지 않도록 다리를 살짝 벌려서 뻗은 다음 중심을 잡았다.
8자를 두 번 그린 지환은 다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손 흔들어.”
“네?”
“이 타이밍에 손 흔들라고.”
지환은 민재를 잡지 않은 쪽 손을 흔들었다. 비행에 집중하면서 손을 흔드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삐걱거리는 몸짓이었다.
풉. 민재는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지환이 재빠르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지환과 민재는 안전하게 난간 위로 올라섰다.
“와.”
착지한 뒤 지환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당황한 민재는 지환의 어깨를 받쳤다.
“야, 마비 왔어? 가이딩 딸려?”
“저 상체에 쥐 났어요.”
지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체에 쥐가 나는 건 대체 뭐야? 그럴 수도 있는 건가.
“몸 이상한 거 아냐?”
민재는 지환을 부축해 난간 안쪽 테라스 같은 공간으로 내려서게 했다. 몇 번 숨을 몰아쉰 지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민재는 지환이 다른 말을 할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지환은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와, 선배님. 이거 진짜 재밌어요. 케이블카가 된 거 같은 기분이에요!”
“…케이블카?”
지환은 뜬금없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민재가 되묻자 지환은 당황한 표정으로 민재를 바라보았다.
“어… 선배님 케이블카 타본 적 없으세요?”
“없는데.”
“네? 진짜요? 그거 초등학교 때 필수 코스잖아요!”
“난 그때 센터에 있었으니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던 지환은 뭔가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케이블카는 물론 일자로만 움직이고 속도도 느리지만요. 그때는 어릴 때라 뭔가 나는 느낌이 들어서 저는 그걸 타는 걸 좋아했어요.”
“…….”
“소풍 가면 케이블카를 타곤 했는데, 애들이랑 줄 설 때 엄청 경쟁했어요. 빨리 타야 창가 쪽에 자리 잡거든요. 그래야 나는 기분도 느낄 수 있으니까….”
비행장을 내려다보며 말을 하던 지환은 문득 말을 멈추고 민재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선배님은 어릴 때부터 날아다니셨으니까 이런 이야기는 재미없으시겠다. 죄송해요.”
지환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재밌는데.”
“네?”
재미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민재는 경험해 본 적 없는 것들이었으니까. 민재는 아직 연결되어 있는 로프의 고리를 풀어내며 물었다.
“그래서 케이블카가 된 기분은 어때?”
“…좋아요.”
지환은 속삭이듯이 말했다. 참나. 민재는 어쩐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 빠르게 로프를 제거했다.
“오늘 훈련 끝. 생각보다 잘했어.”
민재의 말에 지환은 두 팔을 민재 쪽으로 뻗었다. 민재는 그 팔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돌아갈 때도 안전하게 모실게요.”
지환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