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이런. 민재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지 싶은 찰나 호영이 말을 이었다.
“저도 제가 부족한 건 알아요.”
“아니, 네가 뭐가 부족해.”
“이번에 안 되면 앞으로도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요.”
호영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민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는 비행계고 A급이잖아요. 앞으로 점점 실력 있는 친구들이 늘어날 거고요. 제1팀에 들어와서 선배님이랑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지만….”
“…저기.”
“이번이 마지막 기회 같아서요.”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호영의 말이 맞았다. 센터장은 앞으로도 S급인 박지환만 내세울 것이다.
늘 웃으면서 다니고 성실하던 애라 이런 고민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민재는 호영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저 정말 폐 안 끼치고 열심히 할게요. 안전하게 시연 마치실 수 있게….”
“미안해, 호영아.”
더 듣기가 괴로웠다. 민재는 호영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호영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 아무래도 저는 무리겠죠.”
호영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꽉 다문 입술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아니야, 정말 그런 건 아냐. 그냥….”
사실 호영은 비행 시연 파트너로 내정되어 있었다. 지환이 팀으로 합류되기 전에 정해둔 것이었고 민재로서는 아무나 상관없으니 이왕이면 팀원인 호영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환이 센터에 들어온 이상, 호영이 파트너로 확정이 되어 있었어도 센터장은 지환에게 비행 시연을 시켰을 것이다.
민재는 잠시 망설였다. 어떻게 이야길 해야 하는 걸까.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할 만큼 센터 내부에 대해 고민을 하면서까지 이야길 꺼낸 애한테.
“이건 전적으로 실장인 내가 무능해서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먼저 팀원인 너를 좀 더 잘 챙겼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이미 정해져 버린 사항이라 내가 바꿔준다고 말해줄 수도 없어.”
민재는 사과했다. 진심이었다. 호영은 자신의 옷소매로 거칠게 눈을 문질러 닦았다.
“예상했어요. 알고는 있었는데….”
호영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민재는 어색하게 호영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도 확실히 차인 느낌이라 후련하네요.”
눈을 벅벅 닦으며 호영이 말했다.
“…내가 너 찬 게 되는 거야?”
“네.”
음, 미안하다. 민재는 조금 억울했지만 더 억울한 상황인 후배를 위해 다시 한번 사과했다. 호영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 네가 진짜 뛰어난 편인 거 알고 있지?”
“…감사해요.”
호영의 목소리는 작았다. 민재는 한숨을 삼키며 마주 웃어 보였다.
***
은정은 문을 열고 서연을 맞이했다. 파자마 차림의 서연은 하회탈이 그려진 곶감 상자를 흔들어 보였다.
“곶감 주면 안 잡아먹지~”
“그거 조금 바뀌지 않았어?”
“아, 곶감이 무서운 거던가?”
“뭐,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은정은 꽤 어릴 때 센터에 들어왔기 때문에 전래 동화 같은 건 잘 몰랐다. 그건 그래. 맞장구를 친 서연은 곶감을 꺼내 은정의 입에 물려주었다. 은정은 단 곶감을 우물우물 씹었다.
서연은 자신이 있었던 곳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서연이 파견을 갔다가 복귀하면 늘 둘이서 하는 작은 의식 같은 거였다.
에스퍼들은 행동에 더 많은 제약이 걸리기 때문에 평소 은정은 서연의 여행기를 듣는 걸 즐겼다. 그러나 오늘은 여러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서연이는 왜 나한테 동생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거지? 은정은 자신이 서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태현과 마주친 후로 사실 자신은 서연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지금 딴생각하지.”
서연이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은정을 째려보았다. 은정은 빠르게 부정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너 태현이 때문에 그러지?”
“…아니.”
“참나.”
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곶감 맛있네. 은정은 괜히 곶감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런 은정의 손을 서연이 가볍게 잡아 저지했다.
“너도 눈치를 챘겠지만 태현이랑 내가 성이 다르잖아.”
눈치 못 챘다. 은정에겐 태현의 존재 자체가 너무 충격이라 성을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은정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 태현이 집에 내가 입양되었어. 성은 내가 그냥 유지하고 싶다고 했고. 지금 아버지가 그걸 존중해 주셨어.”
“…응.”
“너랑 처음 만났을 때는 지금보다는 어렸으니까 입양아라는 거 알리고 싶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그냥 말할 타이밍을 놓쳤어. 미안.”
서운했지? 서연이 미안하다며 웃어 보였다.
“아냐. 내가 좀생이처럼 굴어서 미안해!”
은정은 왠지 부끄러워졌다. 서연에겐 나름 고민이 많았을 텐데 자신이 어린애처럼 굴어서 곤란했던 걸까 걱정이 되었다.
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은정의 목을 끌어안았다.
“아, 나 진짜 좋은 친구 둔 것 같아.”
“진짜?”
“응, 진짜. 은정이가 내 친구라 너무 좋아!”
은정은 서연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더 있었다.
어쩌다 친부모와 헤어지게 된 건지. 왜 성을 바꾸지 않은 건지. 동생과의 관계는 어떤지-동생 쪽은 제 누나를 꽤 아끼는 것 같았지만 은정에게는 첫인상이 재수 없었다-. 자신에게 말을 못 하는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등이었다.
“…나도 네가 내 친구라 너무 좋아.”
그렇지만 은정이 떠올린 그 모든 질문은 서연이 말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서연이가 설명을 해줬으니까.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라고 하니까. 말해줄 때까지 기다려야지. 안도감과 불안함을 동시에 느끼며 은정은 서연의 포옹을 잠자코 받았다.
***
지환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구매했다. 민재의 카드로. 메뉴판 앞에서 한참을 고민한 결과였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한 잔도 사 먹지 않으면 또 카드를 달라고 할 것 같아서였다.
옆에서 태현이 한 잔 사달라고 했지만 지환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선배님이 나만 사 먹으랬어. 그 말에 태현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원래는 쓴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스무디 종류는 가격대가 높아서 민재의 카드로 사 먹고 싶지는 않았다. 이때다 싶어서 선배를 털어먹는 후배로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대신 지환은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열심히 넣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형, 나랑 그때 비행했을 때 있잖아.”
시럽병에 꽂힌 펌프를 꾹꾹 누르면서 지환이 옆에 서 있는 태현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그때 왜, 형 울었을 때.”
“야, 너는 왜 애가 생각도 없고 매너도 없어!”
태현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생각해 보니 다 커서는 동생 앞에서 질질 짠 게 부끄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환은 사과를 하고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형이 나 비행 연습 도와준 날.”
“그래, 왜.”
“그때 어땠어? 내 비행 실력.”
“뭘 물어. 토했잖아, 내가.”
태현은 어이가 없는지 눈을 치켜뜨고는 지환을 아래위로 흘겨보았다.
“그건 너무 불안하고 슬퍼서….”
“아니, 절대 네 비행 실력이 좆같아서였어.”
태현은 단호했다. 지환은 입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럼 나 이제는 좀 좋아졌는지 한 번만-”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 왜! 지환이 소리치자 태현이 지환의 주둥이를 가볍게 찰싹 내리쳤다.
“양심도 없어! 있는 게 뭐야!”
태현은 재빠르게 지환으로부터 도망쳤다. 지환에게는 질긴 끈기와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찾아가서 또 부탁하면 들어주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지환은 설탕물처럼 단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훈련장에서 비행 연습을 부탁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을 발견했다.
“선배님! 역시 여기 계셨네요!”
“어? 지환이네. 안녕.”
지환의 인사에 호영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호영은 이미 훈련을 끝낸 건지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고 있었다.
“훈련 다 마치신 건가요?”
“음, 고민 중이야. 조금 더 할까 싶어서.”
“어? 잘됐다. 그럼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지환은 이때다 싶어 호영에게 물었다.
“응? 뭔데?”
“제가 이번에 민재 선배님이랑 비행 시연을 하게 되었는데요. 제가 비행 실력이 아직 부족해서 멀미하시게 할까 봐 걱정이 되어서요.”
“…….”
“민재 선배님이랑 오래 같은 팀으로 활동하시기도 했고… 또 선배님은 워낙 비행 실력이 좋으시니까 안전하지만 멋있게 비행하는 법을 알려주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
지환은 나름 최선을 다해 아부 섞인 말을 했다. 물론 진심이기도 했다.
지환은 호영이 이때쯤 되면 쑥스럽다는 듯이 웃거나 혹은 너스레를 떨면서 긍정적인 답을 줄 줄 알았다. 그래서 호영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호영은 수건으로 머리칼을 문지르던 것도 멈춘 채 가만히 있었다.
혹시 수건 때문에 내 말이 잘 안 들렸나? 지환은 방금 했던 말을 다시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하.”
호영은 짧게 웃었다. 지환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날카롭고 싸늘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지환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너 진짜 눈치가 없구나, 지환아.”
“…네?”
이어지는 호영의 목소리에 지환은 자신이 들은 웃음소리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나 오늘 뭐 없단 말 좀 많이 듣네. 지환은 좀 시무룩해졌다.
“비행 시연은 목적이 있을 때 센터에서 시행하는 거야. 무슨 말이냐면, 뭔가 보여줘야 할 때 하는 거라는 말이지.”
“…그렇군요.”
지환은 지금 호영이 왜 엄청나게 심각한 표정으로 비행 시연의 의미 같은 것을 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네가 이 센터에 오니까 민재 선배 페어가 생기고, 비행 시연이 열리게 되었어. 뭘 의미하는 것 같아?”
“…저 때문이라는 건가요?”
지환은 민재에게 꽤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민재의 페어가 되었고, 제1팀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래서 민재의 미움을 받게 되었고 불편한 관심도 꾸준히 받게 되었다.
지환은 나름대로 이곳의 생활을 버텨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잘되지 않을 뿐이지.
그런데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했던 호영이 대뜸 자신의 잘못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자 지환은 기분이 상했다.
“아, 알아? 너 지금 나 놀리는 거냐?”
“선배님이 지금 대뜸 저 비난하시는 거 아니고요?”
“뭐 이런 게 다 있어? 비행 시연은 보잘것없는 나는 해본 적이 없어서 가르쳐 주질 못하겠네. 잘난 네가 알아서 해.”
호영은 가방 안에 수건을 패대기치듯 집어 던졌다. 뭐 때문에 화를 내는 건지 말해주지도 않고 비꼬는 어조로 말하는 게 더 기분 나빴다. 지환은 나가려는 호영을 막아섰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누가 잘못했대? 너 잘났다고!”
쾅! 지환을 밀친 호영은 훈련장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렸다.
“누가 저 잘났대요? 저 멍청하고 실력도 없고! 그래서 사고나 치고! 민폐인 거 저도 알아요!”
문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지환은 씩씩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그래서 노력해 본다는 건데….”
진짜 너무하잖아. 지환은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그런데 쾅! 하고 다시 큰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지환과 비슷하게 씩씩거리는 호영이 다시 훈련장 안으로 들어와 지환 쪽으로 다가섰다. 지환은 있는 힘을 다해 호영을 째려보았다.
“네 탓 아닌 거 알아. 아니다, 네 탓 아냐. 그냥 센터 흐름이 그런 거지.”
호영은 조금 차분해진 얼굴로 말했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제1팀인데도 비행 시연 못 해봤어. 그래서 좀 속상했던 거고. 내가 말 나쁘게 해서 미안하다.”
호영이 사과했다. 지환은 그제야 호영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비행 시연을 왜 못 해보신 거지? 실력도 좋으신데? 지환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호영이 지환의 얼굴 앞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내가 왜 비행 시연 못 한 건지 묻지 말아주라. 네가 눈치 없는 건 아는데 그 말 들으면 진짜 짜증 날 거 같으니까.”
“…네.”
“…너 비행 실력 많이 늘었어. 근데 사람 안고 나는 연습을 많이 안 해봐서 그래. 쉽게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호영은 설명을 시작했다. 지환은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