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태현은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목 뒤가 화끈거렸다.
은정은 태현이 서연의 방 앞을 서성거려서 변태인 줄 알고 쫓았다고 했다. 누나의 안부가 걱정되어 몰래 숙소를 살피려고 갔던 건데 괜히 들켜 가지고 이런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
“아니 그럼 말을 하지!”
은정은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쳤다.
“태현이가 안 그래 보여도 은근히 겁도 많고 여려.”
“…죄송합니다.”
서연은 은정의 말에 다정하게 웃으며 태현을 변호해 주었다. 태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사과를 해야 했다.
은정은 ‘어제 토낄 때는 겁도 없던데?’ 하고 중얼거렸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태현의 사과를 받았다. 그녀는 서연이 동생인 줄 몰랐다며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형, 뭐야. 나한테도 말 좀 해주지.”
어제저녁 태현은 은정으로부터 달아나다가 냅다 지환을 붙잡고 날아달라는 요청을 했을 뿐이고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었다. 지환은 서운하다며 계속 쫑알거리다가 서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서연 선배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태현이 형이 평소에 누나 걱정을 엄청 많이 해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직접 뵈니 반갑네요!”
“아, 그랬어요? 지환 에스퍼님이죠? 태현이가 좋은 친구라고 자랑을 해서 만나고 싶었어요.”
“어? 정말요?”
눈치 없는 지환은 하지 않아도 되는 말까지 마구 늘어놓았다. 서연은 태현을 잠시 바라보다 지환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서연의 입바른 말에 신이 난 지환은 팔꿈치로 태현을 쿡쿡 찔러댔다.
누가 좀 이 상황을 끝내줘라. 태현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야, 너네 뭐 해?”
그때였다.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를 걸어오던 민재가 모여 서 있는 그들을 보며 말을 걸어왔다.
“어? 민재 선배!”
와, 살았다. 태현은 SSS급 에스퍼실장이 지금만큼 멋져 보인 적은 없다고 생각하며 지환을 슬쩍 밀었다.
“너 실장님한테 보여드릴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맞아, 선배님! 저한테 시간 좀 내주시면 안 되나요?”
“어. 안 돼. 시간 없어. 여은정, 넌 나 따라와.”
민재는 지환의 말을 단칼에 잘라 거절하고는 은정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나 지금 서연이랑….”
“아냐, 실장님한테 가봐.”
서연이 부드럽게 말하자 은정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웩. 덩치에 안 맞게 무슨 귀여운 척이야. 태현은 표정 관리를 하며 슬쩍 서연에게 붙어 섰다.
“이게 누구야. 길동이네? 파견 잘 다녀왔어?”
민재는 그제야 서연을 발견한 것처럼 인사를 건넸다.
태현은 서연으로부터 우민재 실장이 자신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홍길동으로 부른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었다.
남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종종 그렇게 자신만의 이유로 붙인 ‘재미없는’ 별명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덕분에요. 실장님, 잘 지내셨나요?”
“내 안부는 기사에 뜨잖아.”
민재는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소 거만해 보이는 농담이었다. 그러자 서연은 재밌는 이야길 들은 것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그래? 너 관찰력이 별로구나?”
서연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의 태도가 퍽 익숙하다는 느낌이었다. 민재는 손을 올려 은정의 어깨를 짚었다.
“내가 널 끌고 갈 수는 없으니 끌려와 주겠어?”
“선배 미웡.”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은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민재의 곁에 섰다.
“저… 선배님?”
지환은 애처롭게 민재를 부르며 얼쩡거렸다. 태현은 그런 지환이 좀 안쓰러웠다.
너도 따라와라. 결국 민재가 성의 없는 대답을 늘어놓자 지환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태현에게 무언의 손 인사를 건넸다.
그래, 제발 빨리 가라. 태현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럼, 난 이만 간다. 푹 쉬어.”
“네, 나중에 뵈어요!”
서연에게 인사를 건넨 우민재 실장은 양쪽에 커다란 혹 두 개를 달고 멀어져 갔다.
세 명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서연은 태현을 바라보았다. 긴장한 태현이 조심스레 서연을 부르려던 찰나,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쉰 서연이 그를 끌어안아 왔다.
서연은 태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태현은 겨우 긴장을 풀고 서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몸 안으로 타고 들어오는 가이딩이 느껴졌다. 태현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구, 누나 걱정을 했어?”
“누나가 연락도 안 받았잖아…. 아까 부딪힌 데는?”
서연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근데 너….”
서연이 머뭇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눈치 없이 숙소 앞에 있었다고 싫어하면 어떡하지? 태현은 다시 긴장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은정이 처음 만났을 때 도망쳤어? 진짜 무서웠어?”
그 말에 태현은 탁 맥이 풀렸다. 서연의 눈에는 태현이 정말로 9살 정도 되는 꼬마인 게 분명했다.
태현은 말을 잘 고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누나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내가 누나 동생인 걸 들켜도 되는 상황인지 몰랐어. 사실은 말하고 싶지가 않았어.
“말해도 되는지 몰라서….”
태현은 우물거렸다. 그의 말에 서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게 뭐야. 내 동생인 게 싫어?”
싫었다. 그렇지만 그건 태현이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이!”
“너무하네. 난 태현이가 동생이라 좋은데.”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서연이 눈을 접어 웃어 보이며 태현을 놀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아아, 슬프네~”
서연은 주먹을 쥐고 눈가로 가져가며 아기처럼 우는 시늉을 했다. 아, 치사해. 태현은 중얼거렸다.
그를 놀리는 서연은 즐거워 보였다. 지금과 같은 얼굴을 한 서연을 태현은 가장 좋아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태현은 서연과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
민재는 자신에게 붙은 두 혹 중 하나를 미리 떼어놔야 했다.
“훈련장에 가 있어. 십 분 뒤에 갈 테니까.”
“진짜죠?”
지환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지금 질문한 거야?”
“아뇨!”
민재의 말에 지환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 훈련장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며 은정 쪽을 바라보았다.
“어제 대가리 박고 있던 애들은 왜 그런 거야?”
“아, 봤어?”
쯧. 은정은 혀를 차고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말을 마치고는 살짝 힐끔거리며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너무 오버했나?”
“아냐, 잘했어. 내가 해야 하는 건데 네가 고생이 많네.”
“됐어. 선배는 이미지 관리해야 하잖아.”
근데 나 군기 잡는 거 좀 소질 있는 거 같아. 은정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은정에 민재는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도 여린 애한테 괜히 악역을 떠넘긴 것 같았다.
“애들이 널 무서워하긴 해?”
은정을 꽤 어렸을 때부터 봐온 민재는 군기를 잡는 그녀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애가 덩치만 크지 여리고 애교도 많은데. 그렇게 생각한 민재는 걱정을 덧붙였다.
“애들이 말 안 들으면 말해.”
그의 말에 은정은 낯간지러운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볼일이 있다는 은정을 돌려보낸 민재는 지환이 있는 훈련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양동이랑 마주쳤다.
지환은 양동이 아래쪽을 안듯이 하고 있었는데, 그럼 양동이가 얼굴을 가리다시피 했다.
내가 언제 올지도 모르면서 비행 연습을 계속하고 있어? 민재는 문에 기대어 서서 지환을 지켜보았다.
지환은 중간중간 약간씩 속도를 올리거나 방향을 틀기도 했는데, 몸을 쓰는 방법이 꽤 부드러워졌다. 물이 조금 찰랑거리긴 했지만 심하게 넘치진 않았다. 적어도 민재가 처음 보았을 때처럼 바로 물바다가 되는 일은 없는 듯했다.
양동이 머리를 단 지환이 민재 쪽으로 두둥실 떠왔다.
“많이 늘었네?”
민재의 말에 지환이 멈췄다. 어? 선배님 목소리다. 오셨어요? 지환은 바보처럼 중얼거렸다.
“양동이를 좀 내려서 들지?”
민재의 말에 지환은 꾸물꾸물 양동이를 내렸다. 물이 튀어 앞머리가 젖은 얼굴이 양동이 위로 빼꼼 올라왔다. 양동이에 얼굴을 박고 있어서 숨이 막혔던 건지 지환의 뺨이 붉었다.
“저 진짜 열심히 했거든요.”
“…그래.”
그래도 제법 빠르게 비행 실력이 는 걸 보니 노력했다 싶었다.
“이제 야외 훈련 하면 되겠다.”
“…같이요?”
“그럼, 너 혼자 할래?”
“아뇨! 같이 할래요!”
지환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젖은 앞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턱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뭐가 저렇게 쉬워. 민재는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다.
“근데 너… 설마 내 카드 잃어버렸냐.”
“네? 아뇨?”
“근데 왜 안 써?”
훈련시켜 놓았으니 음료나 사 먹으라고 기껏 카드도 줬더니 지환은 한 번도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다. 결제 알림이 민재에게 날아들지 않았던 것이다.
민재의 질문에 지환은 당황하더니 뭐라 답을 못 하고 계속 우물쭈물했다. 뭐, 하긴 실장 카드로 자기 혼자 사 먹기가 뭐했겠지. 민재는 손을 지환 쪽으로 내밀었다.
“그냥 카드 줘. 내가 나중에 사주든지 할 테니까.”
“저!”
지환이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로 인해 양동이의 물이 넘쳐 지환의 가슴팍이 젖어 들었다. 누가 보면 민재가 돈이라도 갈취하려 한 줄 알 것만 같았다.
민재는 당황스러웠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일그러지는 민재의 표정을 눈치챈 지환이 당황해하며 말을 이었다.
“조금 천천히… 사 먹으면 안 될까요? 너무 아까워서….”
“아니, 그러니까 안 사준다는 게-”
“제가! 사 먹을 수 있습니다!”
지환의 표정은 비장했다. 절대로 민재에게 카드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결의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진짜 또라이 아니야? 민재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갔다. 알고 보면 나한테 음료 사준 거 되게 아까웠던 건가? 민재는 당황스러움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떨떠름한 목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 카드가 없으면 당장 큰일 나는 것도 아니고 상관없기는 했다. 애초에 본인이 줘 놓고 당장 내놓으라고 난리 치는 것도 선배로서 좀 면이 안 살기도 하고.
민재는 내밀었던 손을 내렸다. 그러자 지환이 눈에 띄게 안심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민재는 왠지 조금 울컥하는 기분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그의 속도 모르고 지환은 해맑게 웃었다. 요즘 애들은 다 이런가. 이해하기를 포기한 민재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
민재는 로비 근방 벤치에 앉아 호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민재는 호영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선배님, 저 제1팀 호영입니다. 혹시 내일 면담 가능한 시간이 있으실까요?
평소 시간이 있냐거나 밥을 사달라거나 하는 편한 분위기로 연락을 해오던 후배였기 때문에 의외였다. 덕분에 민재는 긴장을 했다.
“선배님!”
호영은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민재에게 다가왔다. 민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주었다. 가까이 다가온 호영은 민재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야?”
“엄마가 실장님 드리라고 하셔서요.”
쇼핑백 안에는 붉은 액체가 담긴 커다란 병이 들어 있었다.
그 비주얼에 다소 충격을 받은 민재는 뭐라 반응하지 못하고 가만히 병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호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용물에 대해 설명해 줬다.
“복분자주예요. 실장님 뭐 좋아하시냐고 해서 술 좋아하신다고 했더니 술을 먹어도 약주를 먹어야 한다면서 담그셨어요.”
“아…. 너무 감사하다고 전해줄래? 나… 복분자주 너무 좋아해.”
사실 민재는 복분자주 같은 건 먹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가 직접 담가 선물해 준 술은 더더욱 처음이었다. 이렇게 반응하는 게 맞나? 민재는 호영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호영은 민재의 말에 웃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싫어하시면 어쩌나 했는데…. 제가 주책이라고 말려도 엄마가 고집을 부리셔서요.”
호영은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냐, 이렇게 정성이 담긴 선물을 주시다니. 너무 감사하다. 민재는 열심히 해야 할 법한 인사말을 머릿속에서 쥐어짜 냈다.
민재는 복분자주가 담긴 병을 다시 쇼핑백 안에 집어넣었다.
민재는 호영의 이름을 자주 까먹기까지 했는데 이런 선물까지 받게 되다니. 양심이 쿡쿡 찔렸다. 어째 조금 전보다 병 무게가 더 묵직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가 면담 요청을 드린 건… 이걸 드리려고 한 것도 있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어? 어어, 이야기해 봐.”
호영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듯했다. 민재는 차분히 호영의 말을 기다렸다.
꽤 긴 시간의 정적 끝에 호영이 입을 열었다. 사정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선배님, 저 이번 비행 시연에 선배님 파트너 시켜 주시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