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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27)화 (2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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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나요.

오준은 멍하니 휴대폰 화면에 뜬 글자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오준은 실수를 연발했다.

비서실 입구에 즐비하게 놓인 난초들-언제 물을 줘야 하는지도 몰라 오준이 인터넷을 검색해 알아냈다-에 물을 주다가 얼마 전 새로 산 구두에도 물을 줘버렸다.

대걸레로 바닥에 흥건한 물을 닦아내고는 제자리에 두지 않아 출근하던 센터장이 오준을 흘긋 쳐다보는 일도 발생했다.

왜 쳐다보는 거지? 또 조지려고 그러나? 그렇게 눈치를 보던 오준은 이내 빨개진 얼굴로 급하게 대걸레를 치워야 했다.

“…하.”

오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숙취로 속도 계속 울렁거렸다. 죽고 싶다. 오준은 되뇌었다.

“…윤 비서님.”

“죽고 싶어….”

“…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와 멍하니 고개를 돌리던 오준은 파드득 몸을 일으켰다. 크고 동그란 눈에 귀여운 인상의 여성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괜찮으세요?”

부드러운 미성이었다. 오준은 재빠르게 센터장의 하루 일정표를 뒤적이며 오늘 만날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오후 3시, 가이드 이서연 회의 미팅.

아. 오준은 작게 신음했다.

“가이드 이서연 씨, 맞으시죠?”

“네.”

“죄송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니에요.”

서연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센터장실로 들어갔다. 후. 작게 한숨을 내쉰 오준은 다시 자리에 앉으며 생각했다.

가이드 이서연. 매달 1~2번은 센터장을 찾는 여자였다.

A급에 딱히 다른 직함도 달고 있지 않은데 독대로 센터장과 회의를 할 일이 뭐가 있지? 센터장이 이상한 짓 시키나? 자신의 상사에 대한 믿음이 하나도 없는 오준이 한 번은 몰래 문가에 귀를 대보기도 했으나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비선 실세 뭐 그런 건가. 가이드 실장도 따로 있는데 굳이 저 여자를 찾는 거라면….’

생각을 이어가던 오준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가이드 실장. 최우석.

생각하기 싫었는데 또 생각해 버렸다. 오준은 데스크에 머리를 쿵 박았다. 그러다가 혀를 씹었다.

입안이 부어서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계속 혀가 씹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아. 존나 아파. 오준은 중얼거렸다.

어제의 오준은 미쳤었다. 미쳐서 마구 성질을 부리고, 거기다 가이드 실장 최우석의 옷에 토하기까지 했다.

오준은 죽고 싶은 기분으로 오늘 새벽의 일을 떠올렸다.

*

오준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땐 날이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아직 어스름한 어둠이 공간 안에 가득 차 있었다. 방 밖에서 웅- 웅-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 머리 아파. 오준은 머리를 감싸 쥐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입안이 텁텁했다.

오준은 칫솔에 치약을 짠 뒤 대강 양치질을 했다. 입을 헹궈내고 물로 세수한 오준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뭐야.”

오준이 평소 사용하는 화장실이 아니었다. 칫솔도, 치약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상의도, 바지도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미친. 오준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이 누구의 집에 있는지 떠올려 버렸기 때문이다.

어젯밤, 오준이 만행을 저지른 후 우석은 바 화장실로 오준을 데려갔다. 찝찝해. 아, 찝찝해서 죄송해요. 계속 중얼거리는 오준을 잡고 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요.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오준은 어느새 찬 바닥에 누워 있었다.

시발. 지금 나 버리고 튄 거지. 최 실장 인성 더럽네. 오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너무 추워서 뼈가 시렸다. 그런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미치겠네.”

우석은 널브러진 오준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물과 구강청정제를 내밀었다. 오준은 우석을 노려보다가 구강청정제로 입을 헹궈내고는 물을 마셨다. 입에서 민트 향이 퍼지면서 두통이 조금 덜어지는 것도 같았다.

“안 죄송해요.”

“네?”

물로 닦아낸 건지 거의 푹 젖다시피 한 셔츠를 입고 있는 우석에게 오준은 죄송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석은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풉.

잠시 침묵하던 우석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후로는 배를 잡고 웃어댔다. 끅끅거리는 우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오준은 기분이 묘해졌다.

“…웃어?”

“아… 흐흐. 죄송해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우석이 사과해 왔다. 문득 오준은 이렇게 여러 번에 걸쳐 죄송하다는 사과를 자신에게 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죄송하다는 말을 잔뜩 하고 들은 날이라니.

오준은 신기한 기분으로 우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거듭 사과하는 우석의 몸이 유쾌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일자로 접힌 눈과 살짝 찡그려진 콧날이 보였다. 존나 잘생겼네. 오준은 왠지 모르게 배가 부글거리는 기분이었다.

오준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대로 우석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우석은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오준의 허리를 감아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오준은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윤 비서님, 잠깐….”

이끄는 대로 따라와서 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오준은 우석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괜찮겠어요? 그런 질문을 들었었나? 그랬다. 그 질문을 듣고도 오준은 먼저 손을 뻗어서 우석의 옷을 풀어 헤쳤다.

이 미친놈이!!! 오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깼어요?”

“…네?”

언제 온 건지, 우석이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오준은 바보처럼 되물었다. 우석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설명했다.

“옷은 세탁 중이에요.”

“아….”

오준은 작게 탄식했다. 우석은 불이 꺼진 방에 서서 화장실 불빛 아래 서 있는 오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준은 어쩐지 그 모습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우석의 눈이 살짝 아래로 향했다. 오준은 빠르게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가렸다. 아까 전 거울을 봐서 자신의 목에 무슨 자국이 있는지 확인해 버렸기 때문이다. 우석이 오준의 손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 그러니까….”

운은 뗐지만 오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할 말이 없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준이 사과했다.

“안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우석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음. 오준은 목을 가다듬었다.

“옷도 세탁해 주시고… 이 옷은, 그러니까….”

“내 옷이에요.”

“네, 그러니까요. 당연하겠죠. 여기 이 칫솔도 당연히….”

오준은 자신이 조금 전 사용해 버린 칫솔을 가리켰다. 우석은 의아한 표정으로 오준을 잠시 바라보다가 눈치를 챈 건지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세요….”

하하하. 우석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지 말라니까? 오준의 말에도 멈추지 않았다.

울컥한 오준은 우석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웃음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우석이 손을 뻗어 오준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윤 비서님.”

우석이 오준을 불렀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우석의 눈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부드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직함을 불린 오준은 웃을 수가 없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저지른 일도 문제였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였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지?

오준은 우석의 어깨를 밀쳤다. 갑자기 뒤로 밀쳐진 우석은 화장실 문 옆 벽에 등을 박았다. 그리고 멍한 표정으로 오준을 바라보았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오준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한 짓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벅찼다.

오준은 그대로 가방만 챙겨서 우석의 숙소를 뛰쳐나갔다. 누가 봐도 잠옷 같은 추리닝 차림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가면서 오준은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

오준은 쇼핑백에 담아온 우석의 옷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탁해서 주는 것도 이상하고 그냥 주는 것도 이상했다. 오준은 다시금 자신의 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우리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나요.

내가 다시 술 처마시면 인간이 아니다. 오준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데스크에 얼굴을 파묻었다.

***

은정은 시끄럽게 울리는 방의 알람을 껐다. 너무 세게 친 건지 시계가 조금 우그러진 것 같기도 했다. 은정은 주기적으로 시계를 망가뜨려서 아날로그 시계로 알람을 맞추곤 했다. 핸드폰을 부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어제 추격신을 찍은 후로 흰머리 변태 새끼를 찾아 줄곧 센터를 쏘다녔지만, 그 변태 새끼는 찾을 수 없었다. 덕분에 은정은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서연의 숙소를 청소할 수 있었다.

새벽에 잠든 은정은 피곤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은정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속에 토끼처럼 빨간 눈이 보였다.

오늘 서연이 오기 전에 반드시 잡아 족친다. 은정은 결심했다. 긴 시간 파견 끝에 복귀한 은정의 친구는 피곤할 것이다. 피곤한 애 방을 변태 새끼가 기웃거릴 거라는 생각을 하자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박지환 그 새끼도 안 그래 보였는데… 찾으면 일단 한 대 갈긴다. 은정은 이를 갈았다.

로비. 식당. 에스퍼 숙소의 전 층과 훈련장까지 은정은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둘이 잘 숨는 건지 은정이 찾지 못하는 건지, 통 보이지가 않았다.

조금 지친 은정이 가이딩실 근방 복도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은정은 저 앞에서 서성이는 갈색 머리와 흰머리를 발견했다.

“박지환!!! 너 딱 걸렸어. 이리 와!”

갈색 머리가 펄쩍 뛰는 게 보였다. 정확하게 얼굴은 보지 못했었는데 진짜 박지환이었다고? 은정은 변태의 도주를 도운 게 자신의 팀원인 지환이었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조금 더 기분이 나빠졌다.

“셋 센다. 하나-”

갈색 머리가 좌우로 흔들렸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대는 건지 떠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은정은 옆쪽에서 얼어 있던 흰머리가 튀려는 것을 보고는 급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야! 변태 새끼, 너 튀지 말-”

“악!”

앞만 보고 달려 나가던 은정은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다. 은정에게 부딪힌 누군가는 거의 튕겨져 나가다시피 하며 복도 쪽에 등을 부딪치고는 주저앉았다.

“괜찮으세요?”

이 근처에는 에스퍼보다 가이드가 많다는 걸 기억해 낸 은정이 기겁하며 넘어진 사람을 부축해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은정은 깜짝 놀랐다.

“서연이?”

“은정아, 무슨 일 있어?”

서연은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는지 허리 쪽을 손으로 짚고 있었다.

너를 스토킹하는 변태를 쫓고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은정은 서연의 허리를 같이 손으로 짚으며 물었다.

“너 괜찮아? 의무실, 아니지 병원 갈까? 삔 거 같아? 아리거나 찌르듯이 아파?”

“아냐아냐. 나 괜찮아.”

서연은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괜찮다는 듯 허리에서 두 손을 떼고 은정을 향해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그래도 의무실로 가야겠다. 은정이 의무실로 가자고 서연을 설득하려던 참이었다. 은정의 왼쪽에서 누군가 빠르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한 발소리에 은정은 우선 서연을 벽 쪽으로 조금 밀어 보호하려고 했다.

그때 뛰어온 누군가가 서연의 한쪽 손을 잡아당겼다. 서연의 몸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누나, 괜찮아??”

기우는 서연을 받아낸 사람은 흰머리 변태였다. 흰머리는 자신의 머리 색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연을 살폈다. 그 뒤에서 눈이 휘둥그레진 채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지환이 보였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서연을 살피던 흰머리가 대뜸 은정 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와 거의 동시에 은정이 흰머리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은정의 거친 행동으로 몸이 들어 올려진 흰머리의 고개가 휙 뒤로 꺾였다.

“야, 이 변태 새끼야! 네가 뭔데….”

“선배님, 선배님!”

“은정아, 내 동생이야.”

은정이 소리치기 시작함과 동시에 지환이 뛰어오며 은정을 불렀다. 그리고 멱살을 틀어쥔 은정의 손 위에 손을 포개어 올린 서연이 말했다.

“뭐?”

“엥?”

은정이 되물음과 동시에 지환도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의문에 가득 찬 것 같은 반응을 내놓았다.

은정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흰머리는 다시 땅에 발을 딛고 섰다. 그러고는 숨이 막혔는지 켁켁 기침을 했다.

“이렇게 다 보게 되네. 은정아, 이쪽은 내 동생 신태현이야. 태현아, 넌 내가 이야기해서 은정이 알지?”

켁켁거리는 태현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준 서연이 은정을 보며 소개했다. 태현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게 보였다.

“근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서연이 난처할 때 짓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게.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은정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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