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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26)화 (27/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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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따라 해. 나는.”

은정이 지루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훈련장 의자에 삐딱하게 앉아 있는 은정의 앞에는 엎드려뻗쳐 자세로 머리를 박고 있는 에스퍼 세 명이 있었다.

들어온 지 오래되지 않은 이 세 명은 센터에 입성한 이래로 어울려 다니며 가이드들을 희롱하거나 구조 현장에서 시민들에게 말실수를 하는 등의 사고를 꽤 쳐오던 놈들이었다.

에스퍼들에게도 징계와 처벌이 가해지곤 했지만, 징계 중에 인력 부족 사태가 발생할 경우 징계를 풀고 임무에 투입해야 했기 때문에 법이나 규칙대로 처벌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에스퍼들을 법 위에 둔 게 아니냐고 주장하는 반에스퍼 단체도 있었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조지지. 심란한 마음으로 은정은 세 개의 정수리를 쳐다보았다.

은정은 에스퍼 전용 중력 가중 아령을 던졌다 받았다 하고 있었다. 은정의 손에 아령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에스퍼들이 움찔거렸다.

“나는.”

은정은 한 번 더 말했다. 그러나 머리를 박고 있는 에스퍼들은 끙끙거리는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은정의 말을 따라 하지 않았다.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던 은정은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희들은 자기가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지.”

쿵-

은정은 아령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솔직히, 그쪽이 프로 의식 없었던 거 아니에요?”

조그맣게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불만이 가득 들어찬 목소리였다.

“그쪽?”

“야, 새끼야. 조용히 해….”

은정이 살벌한 목소리로 되묻자 정수리 중 하나가 말리려는 듯 핀잔을 줬다. 그러나 고개를 든 에스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가이드들은 애초에 에스퍼의 부상 치료와 폭주를 막기 위해 존재하는 거잖아요. 에스퍼들은 안 그래도 어린 나이부터 뜬금없이 발현되어서 국가를 위해 위험한 곳으로 뛰어드는데.”

“…하.”

“가이딩받으면 기분 좋기도 하고 에스퍼로 생활하면서 유일한 낙인데, 가이딩 한번 받으려고 끔찍하다는 시선이나 받고 그러면 좋을 리가 있어요?”

고개를 들었던 에스퍼는 피가 몰리는지 빨개진 얼굴로 이제 거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은정은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괴물 취급받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럽다고요. 그리고, 선배님은 대체 누구 편이세요?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기분이 더러워서 그랬다?”

은정의 말에 열변을 토하던 에스퍼가 말을 멈추었다. 나름의 궤변을 늘어놓던 에스퍼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여기 있는 새끼들 다 이 말에 동의하는 거냐.”

은정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정의 말에 다른 정수리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에스퍼는 힘겹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전, 아뇨, 아니요!”

“그럼?”

“네?”

“네 의견은 뭐냐고.”

“그… 너… 인마, 선배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사과드려!”

에스퍼의 말에 은정은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작스러운 은정의 반응에 에스퍼들은 당황한 듯 분주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하… 은정의 깊은 한숨이 적막을 채웠다.

“내가 후배를 잘못 키웠다고 하기에는 억울하네.”

“…네?”

“내가 너희를 키울 의무는 없는 거잖아.”

“…….”

“근데 참담은 하다.”

에스퍼들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가 하며 계속 은정의 눈치를 살폈다.

“가이드들도 에스퍼들과 똑같이 강제 징집되는 거야. 그리고….”

말끝을 늘이며 은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헙. 에스퍼 중 한 명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쾅!

은정은 좀 전까지 자신에게 따지던 에스퍼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벽에 등을 부딪친 충격이 센지 에스퍼는 컥, 하고 기침을 했다.

은정은 그런 에스퍼의 겉옷을 잡아채 마구잡이로 당기기 시작했다.

“왜, 왜 이러세요, 선배님!”

대꾸도 하지 않은 은정은 에스퍼의 겉옷을 찢어발기고는 안에 입은 티셔츠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에스퍼는 은정이 멱살을 잡은 손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지만 쉽지 않았다.

은정은 체격도 크고 힘도 센 데다 능력도 신체 강화였기 때문에 센터 내에서 힘으로 은정을 이길 수 있는 에스퍼는 없었다. 심지어 은정이 그의 멱살을 더 들어 올리는 바람에 에스퍼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다른 두 명의 에스퍼들은 자세를 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엎드린 채로 고개만 뒤로 돌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놓으라고! 씨발!”

결국 에스퍼는 욕설을 내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은정은 그런 에스퍼를 무감하게 바라보면서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의 힘을 풀었다.

다리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해 에스퍼는 앞으로 넘어졌다. 그는 목놓아 울면서 욕을 마구잡이로 내뱉었다.

“난 이렇게 약한 새끼들 족치는 게 재밌더라. 기분도 좋고.”

은정의 말에 엎드려 있던 에스퍼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야, 내가 너보다 등급도 높고 직급도 높고, 여기 있은 지도 오래되었잖아. 일하는 것도 좆같아서 귀여운 후배 데리고 좀 기분 좋게 놀겠다는데. 네가 그렇게 징징 짜면 되겠어?”

“씨발!”

울던 에스퍼는 자신의 분을 못 이기겠는지 소리를 지르면서 욕을 내뱉었다. 은정은 허리를 숙여 그런 에스퍼의 뒤통수를 쓰다듬듯이 툭툭 때리며 말을 이었다.

“프로 의식이 너무 없는 거 아냐?”

세 명의 에스퍼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정은 허리를 펴고는 기지개를 쭉 켜 보였다.

“양심이 있으면 엎드려 자세로 한 시간 더 있다가 가라.”

“…네.”

엎드려 있던 두 명의 에스퍼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엎어져 있던 에스퍼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훈련장을 나선 은정은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메시지창을 켰다. 그러나 그녀의 절친에게서 온 연락은 없었다.

요즘 답이 늦네. 은정은 중얼거렸다. 답이 오지 않아도 종종 은정은 서연에게 연락했다. 은정은 지금 그런 것이 필요했다. 일상적인 것. 따뜻한 것.

-밥은 먹었어? 보고 싶어.

날씨가 좋았다. 낮술이나 할까 중얼거리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은정은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곧 갈 수 있을 것 같아. 밥 잘 챙겨 먹어, 은정아.

곧 온다고? 은정은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뭐부터 하지? 은정은 꽤 긴 시간 방치되어 있는 서연의 숙소를 떠올렸다.

서연이가 오면 깔끔하게 지낼 수 있게 좀 치워둬야겠다. 은정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소 도구를 가지러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현관을 열자마자 은정은 서연의 숙소를 치우기 전에 자신의 숙소부터 치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사람 사는 집이 아니야! 하면서 경악하는 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은정은 온 방에 널브러진 옷가지들을 주워 세탁기 안에 구겨 넣었다.

두 시간이나 걸려 자신의 방을 청소한 은정은 어깨에 청소기랑 청소용 약품을 담은 트레이를 짊어지고는 가이드실 숙소로 향했다. 한 짐을 짊어지고 가는 은정을 에스퍼들이 힐끔거렸다.

“앞으로 시선 고정~”

은정의 말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역시 재밌어. 아무도 재밌어하지 않는 일에 혼자 킥킥거리고는 서연의 숙소가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그리고 은정은 서연의 숙소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수상한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하얀 머리카락이 삐져나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기웃거리면서 서연의 현관문 틈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이따금 여자 가이드들이 숙소 근처에서 서성이는 남자 에스퍼들 때문에 야간 근무가 있으면 아침에 퇴근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는 걸 은정은 떠올렸다.

서연이는 센터에 자주 있는 편도 아닌데 어느 틈에 변태 스토커 새끼가 붙었지? 저 흰머리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은정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야.”

은정이 남자를 불렀다. 남자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은정은 선 자리에 청소기와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남자는 은정의 반대편 쪽 복도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야, 이쪽으로 와봐.”

은정은 남자의 뒤통수에 대고 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남자는 무언가 생각하는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리로 가면 더 안 좋을 텐데.”

은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러자 남자는 빠른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은정은 반대편으로 멀어지는 남자의 뒤통수를 보면서 욕을 읊조렸다. 씨발.

“야!!!”

은정은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남들보다 다리가 긴 편에 다리 힘이 좋아 도약이 빠른 편인 은정은 웬만한 에스퍼들보다 달리기도 빠른 편이었다. 그런데 흰머리의 남자는 어찌나 빠른지 잡기가 힘들었다.

남자는 복도를 벗어나 사람이 많은 편인 로비로 향했다.

“야!!! 거기 안 서?”

은정이 험악한 소리를 내며 뛰어오자 근방에 있던 에스퍼들이 모두 구석으로 비켜섰다.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달려가고 있는데도 흰머리와의 거리가 계속 벌어졌다.

저 새끼 뭐야? 은정은 짜증이 났다. 그는 심지어 달리다가 누군가를 붙잡고 뭐라고 하는 듯했다. 은정은 때를 놓치지 않고 속도를 올렸다.

그런데 갑자기 흰머리가 다른 놈의 등에 업혀 날아올랐다.

닭 쫓던 개 꼴이 되어버린 은정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은정은 눈을 부릅뜨고 흰머리의 도망을 도와주는 새끼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다. 갈색 머리를 한 놈은 똥파리처럼 비틀거리면서 날아갔다.

뭐야, 저거 박지환 아니야? 박지환이 왜 변태를 들고 같이 도망치지? 은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야! 너네 잡히면 뒤질 줄 알아!!!”

은정이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가 로비를 울렸다.

***

평소보다 출근이 늦은 우석은 자신의 사무실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서연을 발견하고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야, 예고는 좀 하고 와라….”

“오랜만이에요, 실장님.”

서연은 맑게 웃어 보였다. 그 얼굴에 뭐라 할 수도 없어 우석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저 삼십 분 전에 복귀해서 실장님부터 찾아뵐 거라고 미리 보고드렸었는데….”

“어, 어, 알아.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얘는 은근히 웃으면서 꼽줄 거 다 준단 말이야. 우석은 큼, 헛기침을 해 보이고는 소파에 앉아 있는 서연을 지나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오늘 야근하세요?”

서연이 물었다.

“아니? 왜?”

“쇼핑백 들고 오셔서요. 갈아입을 옷 가져오셨나 했어요.”

“아, 그런 거 아냐.”

쇼핑백에는 오준의 옷이 들어 있었다. 우석은 쇼핑백을 빠른 손짓으로 책상 안쪽에 밀어 넣었다. 서연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일으켜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번 현장 보고서예요.”

-작성자 : A급 가이드 이서연.

우석은 보고서를 받아 들고는 간단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잘 작성된 보고서였다.

진짜 유능하긴 하지. 우석은 생각했다.

서연은 지방에서 장기로 가이드 파견 요청이 들어오면 꼭 신청해서 파견을 나갔다. 지방은 테러 빈도가 현저히 낮은 편이지만 그만큼 인력이 부족해 쉬운 일자리는 아니었다.

서연처럼 등급이 괜찮은 데다 은정과 같은 실력 있고 성격 괜찮은(?) 에스퍼와 페어를 맺은 가이드가 파견을 선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우석은 그런 서연이 좀 흥미로웠다. 그리고 은정을 아끼는 만큼 걱정되기도 했다. 위험 상태로 자신의 사무실을 찾는 은정을 보는 게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주 파견 나가는 거 힘들지 않아?”

“뭐,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은정이가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 너네 되게 친하잖아.”

“저도 되게 보고 싶었어요.”

우석은 고개를 들어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눈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같이 일한 지도 꽤 되었는데 우석은 서연을 대하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서연은 우석에게 꽤 살갑게 대하는 느낌인데도 그랬다.

묘하게 말이 잘 안 통한다고 해야 하나. 고집이 센 편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도 종종 실장님이 은정이 가이딩해 주신다고 들었어요. 잘 챙겨주셔서 감사해요.”

서연은 예의 바르게 웃어 보이며 인사를 하고는 우석의 사무실을 나갔다.

참나, 꼴에 페어라는 거지. 우석의 입에서 작은 실소가 새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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