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네가 생각하는 센터는 어떤 곳인데?”
역으로 물어오는 호영의 얼굴은 꽤 진지했다. 입을 꾹 다문 표정이 조금은 화나 보이기도 했다.
“어떤… 곳이라뇨…?”
센터는 어떤 곳이지? 지환은 생각했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기관이고, 에스퍼들은 사람을 구하고 가이드들은 에스퍼들을 돕고….”
무의식적으로 센터에 들어오자마자 배운 센터의 정의와 역사를 읊어대던 지환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이전에 은정이 지나가듯 물었던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좀 알아?”
그러게요.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요. 이상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얼마 전까지 수월하게 하던 대답이 쉽지가 않았다.
“어… 잘 모르겠어요.”
“응?”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르겠어요, 선배님.”
에스퍼들이 사람을 구하고, 가이드들은 그런 에스퍼들을 돕고. 이렇게 멋진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가득 찬 공간인데 왜 민재 선배님은 그런 말을 하셨을까요? 지환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돌덩이를 삼킨 것 같았다.
“나도.”
“네?”
“잘 모르겠어, 나도.”
호영이 쓰게 웃었다.
“선배님.”
“응?”
혹시, 선배님도 히어로가 되고 싶지 않으셨나요?
지환은 묻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질문을 하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대신 다른 질문을 했다.
“혹시 방수복은 어디서 파는지 아세요?”
“…방수복?”
지환이 말을 돌리자 호영은 잠시 지환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다 바뀐 화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네, 필요해서요.”
“있긴 해도 비싸지 않을까? 근데 땀 흡수도 안 되는 거 아니야?”
“쓸데없겠죠?”
지환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호영은 씩 웃더니 지환의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었다.
꼼수 쓰려 하지 말고 훈련 열심히 받아. 호영이 선배답게 가벼운 훈수를 두었다. 지환은 그저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우석은 힘든 하루를 보냈다. 민재의 보모 노릇은 물론이요-민재는 자꾸 찾아오는 우석을 귀찮게 생각하지만 우석은 민재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가이딩실에서도 커다란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우석은 의자에 몸을 파묻고는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용~]
“술 마셨냐.”
은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두 배 정도 기분 좋아 보였다.
[웅! 최 실장도 올래?]
“됐어. 그건 그렇고….”
우석은 은정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신체적 접촉으로 가이딩을 하는 직업의 특성상, 가이드들의 인권을 위한 세심한 규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연인 관계이거나 각인을 마친 상대가 아니면 가이딩할 때엔 손을 잡는 정도의 가벼운 접촉을 권고한다.
필요시 가이드들의 판단하에 목 뒤, 척추 부근, 심장 아래쪽에 가이딩을 주입해 혈관과 신경계로 빠르게 퍼지도록 하는 방법도 있지만 주로 응급 시에 활용됐다.
문제는 ‘애매한 응급’ 상황에 있었다. 완전히 정신을 놓을 만큼은 아니지만 가이딩 위험 수치에 처한 에스퍼 하나가 경험이 적은 가이드에게 달려든 것이다.
에스퍼는 죽을까 봐 무서웠다고 진술했으나 우석은 그 말도 미덥지 않았다. 에스퍼에게 가이드를 아예 안 붙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단 가이딩 물약을 처방하고 경험이 많아 노련한 후배를 붙여주었다.
[미친 거 아니야? 대가리를 왜 달고 다니는 거야. 가이딩 알약은 없었대?]
“있었다곤 하던데… 아무튼 너무 뭐라고 하기보다는 에스퍼 전체 인원에게 가이딩 알약 필수로 챙기라고 교육 좀 해줘. 버티지 말고 제때 제대로 와서 정식으로 가이딩을 받으라고.”
[알았어. 한번 집합시키지, 뭐.]
“…고맙다, 은정아.”
[별말씀을. 근데 진짜 안 와?]
은정이 같이 술을 마시자고 재차 권했으나 우석은 거절했다. 오늘은 누가 됐건 같이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아냐, 됐어. 피곤해.”
[알았어. 그럼 나중에 연락해.]
전화를 끊은 우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첫 매칭을 그런 식으로 받게 된 가이드는 완전히 공포에 질려 가이딩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만 반복했다. 우석은 그 가이드와 했던 면담을 떠올렸다.
“네가… B급 판정을 받았구나.”
차트를 뒤적이던 우석은 머리를 짚었다. 그래, 저기… 우석은 말을 쉽사리 시작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저 사표 내면 안 되나요.”
가이드의 말에 우석은 할 말을 잃었다.
가이드. 에스퍼와 동일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으나, 일반인과 다른 파장을 갖고 있어 에스퍼의 치유 속도와 폭주를 막는 존재.
가이드들은 초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일반인도 아니었다. 그래서 센터에 강제적으로 소속되어야 했다. 일반 회사와 달리 센터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실장님, 저는 다 모르겠어요.”
기운과 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쉽게 느껴지지도 않는 것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준다는 것. 그건 이상한 일이다.
처음 센터로 들어왔을 때, 어린 우석은 주기적으로 하는 등급 심사 전날마다 하늘에 빌었다. 제발 쓸모없는 등급이 나오게 해주세요. 여기서 버려지게 해주세요.
그러다 SS등급이 찍힌 결과지를 받게 된 날. 모두가 우석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석은 그런 어른들이 너무 무서웠다.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네 마음, 이해해.”
우석은 입이 자꾸만 바짝 마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해하신다고요.”
“응급 쪽에 배치받으면 오히려 더 힘들 수도 있어. 아까와 같은 상태의 에스퍼들이 많이 들어오니까.”
“…….”
“대신 첫 매칭 때 다른 가이드와 동반하고, 네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몇 번이라도 매칭을 바꿔줄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이드는 우석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석은 쓴웃음을 삼켰다.
창밖이 어둑했다. 의자에 몸을 파묻고 있던 우석은 복잡한 생각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늘은 혼자 술을 마셔야겠다고 우석은 생각했다.
***
오준은 꿈을 꾸고 있었다. 꿈속에서 오준은 병원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 깨어나셨어요.”
늘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는 언제 일어난 것인지 오준을 안심시켰다. 엄마 괜찮아, 얘.
엄마는 건강한 모습으로 오준과 같이 밥을 먹고, 산책을 했다.
“엄마는 이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볼까 해. 그동안은 네가 너무 어릴 때부터 날 보살펴 주었잖니.”
그럼 이제 끝이야? 나 더 이상 센터에서 눈치 보고 싫은 소리 안 해도 되는 거야, 엄마? 오준은 엉엉 울었다.
꿈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꿈이니까 더더욱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오준은 가슴 속에 사표 10장을 품고 가서는 센터장 얼굴에 표창처럼 한 장씩 날려댔다. 화장실 변기통에서 떠온 물도 냅다 끼얹었다.
“엿 먹어라, 이 새끼야!”
센터장 얼굴이 와락 구겨지는 걸 보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이제 맨날 눈치 보면서 보초나 서던 생활도, 자신한테 떽떽거리던 에스퍼들도 다 끝이다! 미친, 짜릿해!
그렇게 오준이 행복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윤 비서님?”
누군가 그를 불렀다. 난 이제 비서가 아냐! 생각한 오준은 눈을 떴고, 자신이 비운 것으로 추정되는 와인 잔과 마주쳤다.
되게 좋은 꿈이었는데. 망했다. 오준은 중얼거렸다.
“이런 데서 다 보네요.”
오준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젠장.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준은 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최우석 실장님.”
최우석 실장도 오준을 보며 마주 웃었다. 실실 쪼개는 얼굴이 재수 없게 느껴졌다. 다 너 때문이야!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오준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여기 자주 오세요?”
자연스럽게 오준의 옆에 합석한 우석이 물었다. 앉지 마! 앉지 마라! 오준은 간절히 외쳤지만 속으로만 외쳤기 때문에 아무도 듣지 못했다.
“자주는 아니고… 가끔요.”
거짓말이다. 인생이 뭣 같아서 이 바에 출석 도장 찍기 시작한 지 몇 주 되었다. 그것도 이 자식을 만났으니 더는 못 할 것이다.
왜 이런 구석진 바에 온 거람. 오준은 지금 상황이 너무 불편했다.
“조금 전에 깜박 잠드신 것 같던데…. 많이 피곤하신가 봐요.”
우석이 말했다. 네…. 오준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제 주량이 와인 한 잔이라 잠시 곯아떨어졌던 거지만 굳이 그런 이야길 하고 싶진 않았다. 우석은 바텐더에게 와인 2잔을 주문했다.
“바쁘신 분이니 제가 한잔 살게요.”
답장을 잘 안 주시길래. 우석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준이 센터장에게 망할 보도 자료를 보고한 날, 우석은 괜찮냐는 문자를 보내왔었다. 그 후로 우석은 종종 오준에게 안부 문자를 보냈다. 물론 오준은 대답할 이유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눈치가 보이긴 하는지 우석이 한동안 센터장실을 찾아오는 일도 없었다. 근데 지금 비꼬는 거지, 이거. 오준은 살짝 울컥했지만 참았다.
“사주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받아주세요.”
와인을 받아 든 우석이 오준 쪽으로 잔을 밀었다.
“이거 뇌물이에요. 다음에는 답 좀 달라고요.”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은 말이었다. 오준은 대답하지 않고 우석을 바라보았다.
“…감사한 것도 있고요. 답례라고 생각해 주세요. 약소하지만.”
우석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꼬는 건지 사람을 놀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오준은 지금 기분이 더럽다는 것이었다.
‘또’라는 말과 함께 우석이 다른 말을 하려고 운을 뗐을 때였다. 오준은 자신 쪽으로 내밀어진 잔을 한 번에 들이켰다.
“어이쿠.”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우석이 놀란 시늉을 했다. 오준은 마주 웃어 보이며 우석의 잔까지 뺏어 든 다음 또다시 단번에 들이켰다. 우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렇게 우스워요?”
오준이 물었다.
“…네? 아니-”
“괜찮아요. 나도 내가 우스워요.”
“…윤 비서님.”
“잘리지 않아도 되는 직장을 거저 얻어서 히어로 놀이나 하고 다니는 주제에.”
오준은 온 힘을 다해 우석을 노려보았다. 우석은 당황한 듯 입이 헤벌어진 채 오준을 바라보았다. 한 방 맞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오준은 한 방 때린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예의 없나요?”
“…….”
“근데 실장님도 마찬가지잖아요.”
“…….”
“그만둘 수만 있었으면 아주 진즉에 그만뒀어.”
오준의 말에 당황한 듯 우석의 눈이 흔들렸다. 마치 커다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오준은 아주 조금 통쾌한 기분을 느꼈다.
“알아?”
오준은 괜히 되물었다. 두 잔을 연거푸 마셔 버린 와인이 얼굴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윤 비서님, 정말 미안해요.”
뭐? 오준은 방금 들은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우석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아, 그, 아니…. 정말 죄송합니다.”
우석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에 한 말이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비서님 표정을 보고 분위기도 풀어볼 겸 장난을 친 건데. 불쾌하셨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우석은 재차 사과를 해왔다.
“원래 방금도 사과드리려고 한 건데… 제가 사리 분별 없이 행동했어요. 사과드릴게요.”
이렇게 바로 사과할 줄은 몰랐던 오준은 조금 민망해졌다. 그러나 이내 급격히 올라오는 토기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우욱!
붉은 와인을 게워낸 오준은 젖어버린 우석의 바지를 발견하고는 눈을 감았다.
“윤 비서님, 괜찮으세요?”
우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을 리가. 오준은 지금 이 상황이 조금 전과 같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