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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24)화 (25/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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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환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쥐어짰다. 물이 뚝뚝 양동이로 떨어졌다. 가득 차 있는 물이 넘치거나 흔들리지 않도록 비행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물의 수위가 어느 정도 내려가면 다시 떠와야 했다.

지환은 정말로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이었다.

그는 훈련장 구석에 고이 벗어둔 재킷에서 민재가 준 카드를 꺼냈다. 지환은 앳된 민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좀 친해진 건가?”

지환은 비행 시연을 하게 되어 기뻐하던 자신의 앞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던 민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도 선배님이 카드도 주셨으니까! 지환은 손으로 카드를 문질러 닦았다.

이거 갖고 싶은데 잃어버렸다고 하면 진짜 화내시려나. 고민하던 지환은 카드를 다시 재킷 안에 고이 넣었다.

잠시 후, 양동이를 대충 정리해 둔 지환은 훈련장을 나와 돌아다녔다. 평소라면 지환이 훈련을 하고 있을 시간에 태현이 찾아왔을 텐데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센터를 다 뒤져도 태현을 찾지 못한 지환은 태현의 숙소 문을 두드렸다.

“형! 태현이 형!”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지환은 문에 귀를 대어보았다. 안에서 작게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환은 다시 신명 나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 열리는 문에 이마를 얻어맞았다.

“야, 시끄러워어.”

태현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오. 지환은 까치집을 세운 태현의 머리를 보며 감탄했다. 태현은 신경질적인 손길로 머리를 눌렀다.

“형, 어디 아파?”

“아니.”

“그럼 나 좀 도와주라.”

“…뭔데.”

평소라면 지환을 놀리거나, 장난 반 짜증 반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을 텐데. 태현의 반응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지환이 눈을 깜박였다.

“형, 정말 어디 아픈 데 없어?”

“없어. 뭔데.”

태현은 문을 좀 더 열며 지환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지환은 빠르게 태현의 방으로 들어섰다.

“아니, 나 비행 시연 하잖아.”

“그래. 네가 벌써 백번은 자랑해서 나도 안단다.”

커피? 태현은 간단한 질문을 하며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스턴트커피를 탄 태현은 한 잔은 지환에게 건네고 한 잔은 본인이 들었다. 커피를 받아 든 지환은 본론을 꺼냈다.

“형, 나 한번 타보지 않을래?”

풉!

태현은 커피를 삼키지 못하고 뱉어냈다. 정확히는 뿜었다. 얼굴에 커피를 맞은 지환이 눈을 끔벅거렸다. 사레가 들린 태현은 싱크대를 손으로 짚고 컥컥거렸다.

지환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물티슈를 꺼내 태현에게 건넸다. 자신의 얼굴도 잘 닦았다.

“형도 참, 칠칠맞긴.”

태현이 지환을 사납게 째려보았다. 지환은 입을 말아 넣었다.

성격이 급한 지환은 태현을 닦달해 함께 외부 운동장으로 향했다. 잡초가 드문드문 나 있는 흙바닥이었다. 뭔가… 학교 같네. 지환이 중얼거렸다.

“잠깐만, 근데 너 사람 들고 얼마나 날아봤어?”

태현이 물었다.

“꽤 많이?”

지환이 대답했다. 민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의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내쉰 태현이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안전하게. 알겠지?”

“응.”

지환은 태현을 공주님 안듯 안아 들었다. 어색하게 두 팔을 허공에 띄우고 있던 태현은 지환이 허공에 몸을 띄우자 급하게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저기까지만 갔다 오자.”

지환은 운동장 구역을 조금 벗어나 센터 외곽 쪽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바람의 세기가 세서 속도나 고도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았다. 중심을 잡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워서, 두 사람은 허공에서 계속 휘청거렸다.

형, 좀 꽉 잡아. 지환이 말했다. 그러자 태현은 지환의 어깨를 두드렸다.

목표 지점만 바라보고 비행하던 지환은 고개를 숙여 태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돌연 태현이 입을 꾹 다문 채 지환의 어깨를 빠르게 여러 번 내리쳤다. 태현이 눈을 부라렸다.

“…토할 것 같아.”

“뭐?”

어어어어! 잠시만! 잠시만! 태현의 구토를 몸으로 받고 싶지 않았던 지환은 빠르게 다시 운동장으로 향했다. 태현이 나지막하게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에에엑.

운동장에 착지하자마자 허리를 숙인 태현은 바닥에 게워냈다. 지환은 빠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형, 괜찮아?”

태현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어떡해. 내가 너무 못 날아서 형 화났나 봐. 지환은 조심스레 태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라고? 지환이 물었다.

“누나가 연락이 안 돼.”

“…어?”

내 비행 실력 때문이 아니라고? 지환은 생각했다. 태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고인 눈을 본 지환은 말을 잃어버렸다. 매번 여유가 넘치던 태현에게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 생긴 거면 어떡하지.”

태현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태현의 말에 의하면 그의 누나는 지방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지환은 최근 지방에서 발생한 큰 규모의 지진으로 에스퍼들이 대거 투입된 적이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지환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태현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

오준은 평소와 같이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시야에 들어오는 깨끗하게 다려진 정장 바지와 비싸 보이는 구두를 발견하고는 생각했다. 결국 올 게 왔구나.

오준은 입가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려고 노력하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필요한 것 있으신가요?”

“윤 비서.”

김진성은 마주 웃으며 오준을 불렀다. 네. 오준이 대답했다.

“어머님은 잘 계시나? 저번에 몸이 편찮으시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오준은 주먹을 쥐고 손톱으로 손바닥을 할퀴었다.

“네,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오준은 되묻지 않았다. 진성은 오준의 앞에서 움직이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최근에는 어린아이들이 임무에 투입되지 않았어.”

“…네.”

“그리고 얼마 뒤에 몇몇 언론 기자가 개별적으로 연락을 해오더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말이 나오고 말이야. 덕분에 빠르게 대처했네.”

“…….”

“센터장으로서 할 일이 많아. 센터 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알기가 쉽지 않아 안타깝네.”

말하는 것을 보니 김진성은 연락 온 기자들에게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라고 입을 털었을 터였다.

윤 비서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일종은 압박이었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알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사려 깊으십니다.”

“자네같이 뛰어난 아들을 두어 어머님이 얼마나 행복하시겠나 싶어. 내가 윤 비서를 믿고 채용한 보람이 있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김진성은 오준의 어깨를 다독였다.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인 진성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앞으로 지켜보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오준은 주저앉듯 의자에 앉았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다고?”

오준이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첫 출근 날 센터장이 한 질문이었다. 오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오준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기소개서에 쓴 적이 없었다. 물론 면접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뒷조사를 했구나. 오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히어로 센터를 가꾸는 일은 쉽지가 않을 거야. 자네같이 유능한 젊은 피를 나는 늘 원해왔어. 서로 열심히 해보자고”

유능한. 그 단어에 강세가 붙었다. 그 순간 오준은 센터장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지금이라면 결코 그가 내민 손을 붙잡지 않았겠지만, 그는 당시 엄마의 수술비와 병원비가 필요했다. 그가 꿰찰 수 있는 비서 자리 중 이곳만큼 돈을 주는 곳은 없었다.

“하….”

오준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의 병원비는 계속 필요했다. 그걸 아니까 센터장이 지금 자신의 목을 틀어쥐고 압박을 넣는 것이다. 이곳에서 잘리면 갈 곳이 없어지니까.

김진성에게는 그럴 만한 영향력이 있었다. 어쩌면 힘없는 일반인인 오준은 한순간에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내가 갑자기 죽으면 엄마는?’

오준은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이래서 씨발.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고. 오준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닦달하던 우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욕지거리를 씹었다 잘리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준은 알 수 없었다.

***

훈련장 구석에 무거운 양동이를 내려놓은 지환은 생각에 잠겨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으나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최근 지환은 자주 민재에게 문자를 했다. 오늘 자신이 몇 시간이나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지 보고 겸, 자신을 보러 와주실 수 있는지 묻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돌아오는 답은 별로 없었지만.

음…. 지환은 민재에게 메시지를 하나 더 보내도 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웅웅-

그때 지환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지환은 잽싸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지환아, 밥 같이 먹을래?

호영의 문자였다. 아…. 실망이 섞인 감탄사를 내뱉은 찰나, 헉 하고 숨을 들이켠 지환은 지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되물어야 했다.

호영 선배 문자에 실망을 느끼다니 미쳤다. 지환은 스스로를 나무라며 답장을 했다.

-네, 선배님. 좋아요!

웅웅-

-급식실에서 보자.

지환은 잠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기다려도 민재에게서 다른 답이 오진 않았다. 지환은 입을 삐죽이고는 훈련장을 나섰다. 그리고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호영과 마주쳤다.

“어? 선배님. 훈련장에 계셨어요?”

“응. 난 다른 구역에 있었어. 지환이 너도 열심이네.”

살짝 젖은 머리카락을 흔들며 호영이 웃어 보였다.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애먼 상자만 이리저리 옮겼던 지환은 조금 멋쩍게 마주 웃었다.

“그런데 선배님 훈련장 되게 자주 오시네요.”

“응? 나?”

“네. 제가 올 때마다 훈련장에 계시는 것 같아요.”

지환의 말에 호영은 약간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지?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지환은 걱정이 들었다.

“내가 가진 능력은 좀 흔한 편이니까… 노력이라도 해야지.”

“흔하다고요?”

지환은 처음 듣는 소리라는 얼굴을 했다.

“어…. 비행계 에스퍼는 꽤 많으니까….”

“……?”

많은 게 어떻다는 거지? 많으면 좋은 거 아닌가? 선배님들과 다 같이 날면 멋있을 것 같은데. 지환은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하는 지환을 보고 호영은 무언가 지레짐작을 한 것인지 손사래를 쳤다.

“그, 걱정하지 마! 지환이 너는 비행계여도 보통 비행계가 아니고 S등급이니까! 단연 특별하지!”

“…흔한 능력이라는 게 좋은 건 아니군요.”

어? 호영은 되물으며 순간 당황스러운 듯 눈 크기를 키웠다. 지환과 호영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지환은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호영 선배님 능력도 좋은 게 아니라고 말한 게 되는 건가? 호영 선배 화나셨나? 지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아냐!”

사과를 하려고 입을 떼는 지환에게 호영이 다시 손사래를 쳤다. 앗. 뭐가 아니지? 지환은 입을 빠르게 다시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어. 비행계가 흔하긴 해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능력이니까….”

지환은 왠지 조금 멍해진 기분이었다. 자신은 여태 에스퍼가 되었다는 것에 기쁘고, 유명한 민재 선배와 페어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뻐 다른 것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에스퍼가 되었으니 그냥 에스퍼로 살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어떤 에스퍼가 되어야 할지나 자신이 속한 센터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선배님.”

“응?”

“히어로 센터는… 어떤 곳이에요?”

지환이 묻자 호영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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