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23)화 (2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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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님, 여기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안 먹어.”

“앗, 카페인이 몸에 잘 안 받으시나요? 그럼 페퍼민트 티?”

“…야.”

민재의 떨떠름한 표정에도 지환은 꿋꿋했다. 6개의 테이크아웃 잔이 가득 찬 트레이를 발견한 민재는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자는 건데.”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 준비해 봤어요!”

“난 좋아하는 거 없어.”

지환은 입을 쭉 내밀어 보였다. 민재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선배님이 저랑 같이 다녀주신다고도 하셨고, 또… 싫어하지 않는다고도 해주셨으니까.”

“…….”

“감사해서요. 여기 있는 거 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거라도 사올게요.”

지환은 민재 앞에서 서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미소 지어 보이는 지환의 얼굴에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 좀 오버했나. 지환은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민재는 손을 뻗어 트레이에서 차가운 페퍼민트 티를 꺼냈다. 페퍼민트 좋아하시는구나. 기억해 둬야겠다. 지환은 다짐했다.

“너는.”

“네?”

민재는 다시 말해주지 않았다. 아. 지환은 허둥거리며 레몬에이드를 집어 들었다.

그런 지환을 힐끔 쳐다본 민재는 나머지 네 잔의 음료를 들고 훈련장 문을 열었다. 지나가던 에스퍼 한 명이 문을 여는 민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게 보였다.

“실장님…?”

“야, 이거 갖고 가서 나눠 먹어.”

“네?”

민재는 어리둥절해하는 에스퍼에게 4개의 음료를 안겨주고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지환은 순간 밀려드는 서운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다시 몸을 돌리는 민재를 보며 지환은 열심히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너 돈 많냐?”

민재가 물었다. 네? 아뇨. 지환은 멍하니 고개를 저었다.

하. 다시 한숨을 내쉰 민재는 주머니에서 작은 카드를 꺼내 지환에게 내밀었다.

지환은 그 카드를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카드에는 조금 앳되어 보이는 민재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결제용으로 쓰이기도 하는 출입 카드였다.

“다음 훈련 때까지 여섯 잔 사서 마셔.”

엥? 당황한 지환은 두 손을 휘두르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괜찮아요!”

“난 어차피 출입 카드 많아. 근데 잃어버리면 뒤지는 거야.”

민재는 카드를 지환의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 지환은 푸드덕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서운해한 게 그렇게 티가 났나? 너무 어린애 같았나? 지환은 지레 헛기침을 하며 표정을 숨기려고 했다.

민재는 지환의 불타는 얼굴에도 별말을 하지 않고 턱 끝으로 훈련장 구석을 가리켰다.

“이제 저거 들어.”

저게 뭐지? 지환은 자신의 무릎 위쪽까지 올라오는 커다란 철 양동이를 바라보았다. 양동이인 건 알지만 왠지 알고 싶지 않았다.

“저게… 뭘까요?”

지환이 민재의 눈치를 보자 민재가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질문이 늘었다?”

닥치고 들라는 말이었다. 지환은 미적미적 양동이 가까이로 다가갔다. 양동이는 비어 있었다. 지환이 양동이를 가볍게 들자 민재가 바로 명령했다.

“이제 거기에 물 채워와.”

“…콩쥐 팥쥐.”

“뭐?”

“아니에요.”

민재의 매서운 눈초리에 지환은 빠르게 움직였다. 다행히 구멍 뚫린 양동이는 아니라서 두꺼비도 필요 없었다.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이 넘실거려서 지환의 가슴팍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지환은 느릿느릿 날아서 민재의 앞으로 갔다.

“그거 안 넘치게 해.”

“또….”

지환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이런 미션이었다. 상자도 들었는데 이번엔 양동이라니! 술 먹고 선배를 찾아갔을 때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줄 알았는데. 지환은 우울했다.

“이번엔 상자 들 때처럼 시간 많이 못 줘. 삼 일 내로 맞춰서 해내.”

“엥….”

“너랑 나랑 비행 시연 하게 되었으니까. 그 일정에 맞춰서 어떻게든… 해야 할 거 아니야.”

“네, 비행 시연을 제가… 네??”

너는 비행을 못하니까 라는 말로 시작하는 질책을 들을 거라 생각했던 지환은 생각지 못한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비행 시연이라고 하셨죠?”

비행 시연이라니! 지환의 머릿속에 민재와 함께 하늘을 날며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지환은 민재의 손을 덥석 잡아 올렸다.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그래.”

지환은 갑자기 사랑스러워 보이는 양동이를 고쳐 안았다. 가슴팍으로 차가운 물이 엎어졌지만 지환은 행복했다.

***

오준은 평소보다 30분 일찍 출근했다. 오랜만에 책상을 정리하고 어제 밤새 준비한 자료를 펼쳐서 다시 확인했다. 눈이 뻑뻑했다. 하. 오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 한 명의 기자가 히어로 센터에 관해 부정 보도를 발표했다. 용감한 기자는 어린아이들을 무분별하게 임무에 투입해 ‘영웅적인’ 요소로 보여지게끔 하는 센터의 태도가 상당히 기만적이라고 지적했다.

에스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아직 존재하는 만큼, 나라와 시민을 위해 혹사 혹은 희생되는 어리고 숭고한 존재들로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꽤나 날카로웠다.

심지어 기사 말미에는 인권 운운하며 언제나 진보의 측에 서 있는 정치인인 김진성 센터장이 이 상황을 주도한 것이라면 다가오는 2년 뒤 대선을 벌써 의식하고 있다고 해석된다고 적어놓았다. 대놓고 비난하는 기사였다.

오준은 이런 글을 찾으려고 일주일 동안 발표된 모든 기사를 뒤졌다. 사람들이 좀처럼 보지 않는 신문사의 기사들도 꼼꼼하게 살폈다. 별 볼 일 없는 가십이나 다루는 신문사에서 이 기사가 업로드되고 있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묻혔다. 아무도 이런 기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오준은 기사 전문을 스크랩했다. 그리고 매일 보고에 올리는 ‘센터에 관한 보도 자료 모음’에 포함시켰다.

“유능한 인재를 맞이해 기대가 크네.”

첫 출근 날 진성이 오준에게 한 말이었다. 그러나 오준은 알았다. 그 말은 경고였다.

오준은 눈치가 빨랐다. 대학에 갓 졸업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히어로 센터장 비서직에 앉은 그가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가 똑똑해서도, 뛰어나서도, 특히 유능해서도 아니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으려면 멍청하고, 무능해야 했다. 그게 오준이 첫날 눈치챈 사실이었다.

오준은 꽤 오랫동안 잘 해냈다.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무능하게 행동했다. 문지기 역할이나 착실하게 수행해 왔다. 계속 그러면 되는데. 왜. 오준은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개자식.”

오준은 욕을 지껄여 보았다. 계속 그렇게 살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우석이 그의 멱살을 잡고 말해 버렸지 않은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과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 다르다고.

센터장의 책상에 보고할 자료를 올려놓은 오준은 문을 닫고 화장실로 향했다. 김진성의 사무실 안에는 cctv가 설치되어 있다. 한 번 제출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었다.

“멍청한 놈….”

오준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코가 시큰거렸다.

[윤 비서님.]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진성이 오준을 불렀다. 오준은 자신의 책상에 연결된 작은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네.”

[보도 자료. 확인했습니다.]

“…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오준은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딸깍이며 진성이 마이크 스위치를 켜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 일은 꽤 건방진 처사예요.]

오준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마이크에서는 더 이상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

우석은 가이딩실 침대에 기대어 섰다. 지방 현장에 투입되었던 에스퍼들이 복귀해 가이딩실로 밀려드는 바람에 한동안 바빴다. 우석은 뻐근한 목덜미를 손으로 주물렀다. 고개를 돌리자 뚜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뼈 부러지시겠어요.”

지나가던 후배가 우석에게 말을 건네왔다. 우석은 파리를 쫓아내듯 손을 휘저었다.

“교대반 들어왔으니까 실장님도 들어가서 좀 쉬세요.”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해 정신이 멍했다. 고개를 끄덕인 우석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제 아이들이 투입되는 일은 줄어들 겁니다.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우석은 눈을 비볐다. 그러나 화면 속 글자는 그대로였다. 윤 비서. 우석은 자신이 저장해 놓은 발신자명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우석은 타자를 치다가 지웠다. 지금은 추궁하는 질문을 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상황 같았다.

그렇지만 이상했다. 윤 비서는 분명 센터장의 라인이 아니었던가? 겁쟁이긴 해도 늘 꽤 강경하게 우석의 입장을 막아서곤 했었다. 그 남자는 문지기 역할에 충실했고, 그래서 우석은 그가 센터장의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센터장의 행보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충견은 아니었다는 건가. 그렇다면 왜?

-어떻게 된 일입니까?

우석은 완성한 문장을 다시 지웠다. 예상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비서는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것이다. 정확히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세세한 과정을 물어보는 것이 지금 의미가 있는 일일까 싶었다.

센터장이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우석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럴 리가 없었다. 김진성은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센터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 것 중에 망가지지 않은 것들이 있었던가? 우석의 머릿속에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아. 우석은 신음했다.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허리를 숙여 간이침대에 머리를 처박았다. 사람의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시트는 차가웠다. 정수리가 짓눌리는 느낌에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 유약한 비서가 무슨 짓을 했을까. 우석은 자신에게 멱살이 잡혀 하얗게 질려가던 얼굴을 떠올렸다. 끝까지 내리깔고 있던 눈도. 그렇게 모른 척하고 싶어 했으면서. 왜.

우석이 보기에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스스로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우석도 앞뒤 생각하지 않고 화를 냈다.

아니, 정말로 그랬나? 우석은 화를 내던 순간만큼은 오준이 무언가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왜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는지 정말 몰랐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우석은 오준이 몰염치하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위험에 처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우석은 자신의 모순에 화가 났다.

우석은 손을 뒤로 젖혀 자신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게 세게 힘을 주진 않았으나 퍽퍽 소리가 났다. 우석의 등 뒤에서 커튼이 젖혀지는 소리가 났다.

“실장님? 괜찮으세요?”

누군가 물었다.

“꺼져.”

우석은 침대에 처박은 얼굴을 들지 않고 말했다. 아, 네. 당황한 후배의 대답이 들려왔다. 커튼이 다시 우석을 가렸다.

우석은 가이드다. 원치 않더라도 히어로 센터에 평생 소속되어 있을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그게 저주였지만 성인이 된 후로 누군가에겐 ‘안정성이 보장된 일’이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서는 우석과 다르다. 윤오준은 일반인이다. 그건 약한 몸뚱어리에 별다른 능력이 없다는 뜻이고, 히어로 센터에 소속된 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제든 눈 밖에 나면 내쳐질 존재라는 말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우석은 다시 핸드폰을 잡았다.

-괜찮아요?

이 질문은 더더욱 해선 안 되었다. 염치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우석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답장이 왔다. 내내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던 우석의 눈 위로 활자가 떠올랐다.

-아직은요.

차라리 욕을 해라. 우석은 욕을 짓씹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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