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여기가 어디지? 눈을 뜬 지환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숙소가 아닌 곳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환은 거실 바닥에 이상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누가 덮어준 것인지 모를 회색 담요를 지환은 천천히 걷어냈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속이 부대끼고 머리가 아파왔다. 목구멍 안에서 계속 알코올 냄새가 올라왔다.
이런 게 숙취라는 건가?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환에게는 생소한 고통이었다.
기억해 내보자. 할 수 있다. 지환은 되뇌면서 어제 일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어제는 너무 속상한 나머지 태현이 형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고… 마셨다. 그냥 마신 게 아니라 엄청 마셔댔다. 태현을 부둥켜안고 울었던 것 같기도 한데….
으. 지환은 몸을 가볍게 떨었다.
“나 훈련 가야 돼.”
술에 얼큰하게 취한 지환은 대뜸 훈련을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 새끼 이거 또라이네.”
태현이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태현의 표정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지환은 차라리 그만 떠올리고 싶었다. 이만큼 마셨으면 필름이 끊긴다던데. 왜 기억이 나는 거야!
그렇게 우기고 우긴 지환은 결국 훈련장으로 향했다. 아니, 결국 태현이 그냥 버리고 간 건가? 아무도 없는 텅 빈 훈련장에 앉아 눈물을 찔끔거렸던 기억이 났다.
기억이 드문드문 잘린 채로 밀려들었다. 창피함도 같이 지환을 찾아왔다. 아! 과거의 나 죽어버려! 지환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다가… 그러다가…. 지환은 갑자기 민재 선배에게 따져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대로 상자를 들고 날아서 민재 선배의 숙소 문을 두드렸고….
“아아악!”
지환은 비명을 질렀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아 버렸다. 여긴 민재 선배의 숙소다! 난 죽었다. 잠깐만, 나 이미 죽은 거 아냐?
지환은 자신의 몸을 더듬어보았으나 다친 곳이 보이진 않았다. 사지도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싫어하진 않아.”
“알겠으니까….”
지환은 회색 담요를 끌어 올려 자신의 몸을 감쌌다.
민재 선배가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출동 동행도 같이 해주겠다고(?) 했다! 지환은 둥둥 떠가는 구름에 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더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지환은 떠올리려고 했으나 어쩐지 팔에 소름이 돋아 그만두었다. 이미 엎질러진 일이니까 굳이 애쓰지 말자! 중요한 건 선배님이랑 화해했다는 사실이야!
잠시 행복을 만끽하던 지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엄청 느끼한 음식이 먹고 싶어졌다.
지환은 꾸역꾸역 몸을 일으켜 회색 담요를 곱게 개어두었다. 세수라도 하고 싶긴 했지만 이 숙소 안에 있는 걸 건드리기라도 했다가 선배와의 관계를 초기화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빨리 내 숙소로 가서 씻자. 지환은 생각하며 바로 현관 쪽으로 직진했다. 막 신발을 신으려는데 문에 붙어 있는 쪽지가 눈에 띄었다.
-상자 치워두고. 내일 훈련장으로 와라.
-ps. 다음부터 술 처먹고 찾아오면 대가리 쪼개 버릴 줄 알아.
민재 선배가 썼을 법한-민재 선배 말고는 쓸 사람이 없다- 쪽지였다.
지환은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문에 붙은 쪽지를 떼어냈다. 전달하는 바가 매우 간략한 쪽지였다. 다정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쪽지였지만 지환은 ‘내일’이라든가 ‘다음부터’라는 단어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내일도 있고 다음도 있어! 어쩐지 계속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쪽지를 곱게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은 지환은 현관문을 나섰다.
***
-선배님, 혹시 차 종류 뭐 좋아하시나요?
-안 좋아해.
-그럼 식사 종류는 뭐 좋아하시나요?
-귀찮게 하지 마.
-아…. 그럼 제가 좋아하실 만한 걸로 찾아볼게요!
“지랄….”
“지랄? 뭔 지랄.”
민재는 핸드폰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우석을 바라보았다. 점심시간 조금 전에 우석의 사무실에 들이닥쳐서는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 있던 참이었다.
우석은 대뜸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말도 없이 누워 있는 불청객을 익숙하다는 듯 쳐다보면서 잔소리를 시작했다.
“너 또 술 처먹고 자서 숙취 왔지?”
우석은 민재를 째려보았다. 그에 민재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술을 잔뜩 처먹은 건 따로 있지.”
“따로? 누구.”
“실수도 잔뜩 하고.”
“실수? 실수우? 누가, 내가?”
지환을 생각하며 중얼거리는 민재의 말에 지레 놀란 듯 우석이 헛기침을 했다.
“뭐야, 어제 술 먹고 실수했어?”
“아아니? 실수는 무슨. 맨날천날 네가 술 먹고 골골거리니까 하는 소리 아니야!”
잠시간 한심하다는 눈빛을 쏘아준 민재는 다시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제 술 처먹고 난동 피운 새끼 있어서 못 잔 거야.”
“누가.”
“누구겠냐.”
“그 꼬맹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우석은 재미있다는 듯 허허 웃어 보였다.
“내가 그 꼬맹이 너한테 한 번은 찾아갈 줄 알았다. 안 맞았냐?”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우석은 민재의 얼굴을 손으로 잡고는 홱홱 돌려가며 살폈다.
“나 할 말 있어서 왔어.”
민재는 그런 우석의 손을 잡아 빼며 말했다.
“뭔데. 말하고 꺼져.”
“센터장 쪽을 좀 주시해야겠어.”
“왜.”
“977이 종료됐어. 오늘 아침에 자살했대.”
“뭐?”
우석은 당황한 얼굴로 민재를 쳐다보았다.
“자살할 상태가 아니었어. 누가 머리를 휘저어놔서 빼낼 정보도 없었고. 살해당한 거야.”
“…확신하는 거야?”
“…그건 모르지.”
우석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민재는 하품을 했다. 어젯밤에 미친 새끼를 상대하느라 잠이 모자랐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볼게.”
“너밖에 없다.”
민재는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석의 어깨를 안마하듯 두드렸다. 실장님, 힘드시죠? 민재의 아부에 우석이 헛웃음을 흘렸다.
“야, 그….”
안마를 받던 우석이 머뭇거리며 민재를 불렀다. 왜. 민재가 묻자 우석은 잠시 민재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였다. 약간 미치광이 같았다.
“왜.”
민재가 다시 물었다.
“너 센터장실 다녀온 거지.”
“방금 오는 길인데? 왜, 또 그 서가 너는 안 들여보내 줘?”
윤 비서는 매번 우석의 방문을 막곤 했다. 그야 당연했다. 민재는 센터장이 필요로 할 때 호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석의 경우엔 ‘쳐들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우석이 센터장실에 들어갔다 하면 고성이 오가니 센터장이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을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석이 꽤나 속을 썩이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건데… 그, 비서가 너한테 뭐라 말한 건 없고?”
우석이 힐끔 민재의 눈치를 보았다. 뭐지? 민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큼. 우석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까 윤 비서가….”
“뭐라고 하던데?”
“…너 개자식이라고 그러던데.”
“하….”
우석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는 손으로 쥐어뜯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랑 다른데? 민재는 우석이 평소처럼 노발대발하며 비서를 욕할 줄 알았다.
“…무슨 일인데?”
“내가… 윤 비서 멱살을 잡았어.”
“…뭐라고?”
아무리 윤 비서가 만만해 보인대도 어쨌든 센터장 직속 비서였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센터장이 갈아치우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민재는 심란한 마음으로 우석을 바라보았다.
“뭐 때문에? 너가 다짜고짜 멱살잡이를 하진 않았을 거 아니야.”
“…애들 자꾸 곤죽 되어가지고 센터 오기에 눈 뒤집혀서. 하….”
콩. 우석은 책상에 다시 한번 머리를 박았다. 너… 민재는 말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우석이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평소 냉정하고 이성적인 편인 우석은 민재와 아이들 일에는 유독 감정적으로 굴었다. 불쌍한 자식. 민재는 헤집어진 우석의 머리를 정리했다.
“…그냥 가서 사과해. 어려우면 같이 가줄게.”
“…….”
“아님 내가 가서 멱살 한 번 더 잡아줘?”
“…아니.”
우석이 작은 목소리로 부정했다. 귀엽긴. 민재는 우석의 머리를 다시 헝클였다. 그리고 뻥이야. 윤 비서 네 욕 안 했어. 민재가 덧붙였다.
아, 미친놈. 우석이 힘없이 항의했다. 민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나 배고파, 실장님.”
민재는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민재가 턱 끝으로 시계를 가리키자 우석은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이었다. 뭐 먹을 건데. 피로감에 눈가를 꾹꾹 누르며 우석이 물었다.
***
눈앞으로 총알이 빗발치고 있었다. 호영은 현장을 잠시 바라보더니 휙휙 총알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발의 반동을 이용해 짧은 도약과 비행을 반복하며 총구 가까이 접근했다. 기계에 달린 총구를 뒤집어 꺾자 총구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벽 한쪽 면은 총알받이가 되어 구멍이 흉하게 뚫렸다.
호영은 땀을 닦으며 반대편 벽으로 걸어가 스위치를 눌렀다. 총이 발사를 멈추었다. 벽이 카드 뒤집히듯 뒤집히면서 깔끔한 흰색 벽만이 남았다. 호영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백지 같은 벽을 노려보았다.
터지는 플래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앞을 잘 볼 수가 없다. 눈앞에서 하얀 빛이 번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빛 앞에서 조금만 비켜나 있으면 잘 보인다. 그 빛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두가 어디를 주목하는지.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알고 싶지 않아도.
호영은 훈련장 구석에 마련된 의자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켰다. 가족들에게서 온 문자가 쌓여 있었다.
-영아, 엄마다. 몸 건강히 지내고 있니. 무얼 하든 다치지 말고 지내고. 언제든 전화하렴.
-오빠 나 받아쓰기 만점이다? 오빠도 훈련 만점 받아. 내가 기 줄게!
-형아 머찐 히어로라고 자랑해서. 칭구들이 부러워해써. 나는 형처럼 되 거야!
호영은 맞춤법이 다 틀린 막냇동생 준영의 문자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썼다.
호영에게는 나이가 많으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두 명의 동생이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집이었다. 가족들은 서로를 사랑했다.
그 사랑이 이따금 호영은 아팠다.
“호영아, 엄마 아빠는 호영이가 너무 자랑스러워.”
“형. 형은 멋진 히어로잖아!”
A급은 상위권에 속한다. 덕분에 어딜 가나 그럭저럭 괜찮은 대우를 받았다. 한국에선 대체로 흔한 편인 비행계 능력을 갖게 되었지만, 호영은 상위권에 속했기 때문에 조금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제1팀에 배정받은 것은 행운이었지만 A급에 속하게 된 건 운이 아니었다. 호영은 그동안 꾸준히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비행계 에스퍼 중에서는 대체할 수 없는 인력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S급은 최상위권이다. 그 대단한 우민재 에스퍼를 제외하고는 그 어느 누구도 S급 이상을 단 적이 없으니 최상위라고 봐야 했다. 그런 귀하신 몸이 하필 널리고 널린 비행계 능력을 타고날 줄 누가 알았을까.
지환은 등장하자마자 주목을 받았다. 모두의 이목을 끌었다. 누구를 들고 나르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비행계 에스퍼인데도.
호영은 지환에게로 쏠리는 카메라를 보았다. 그가 조명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건 아무리 노력해도 호영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호영은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진흙탕에 몸을 마구 굴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영아, 너는 정말로 빛나는 아이란다.”
엄마가 주문처럼 자주 해주던 말을 떠올렸다. 그게 정말일까요, 엄마. 호영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스위치를 켰다. 딸깍이는 소리와 함께 사위가 어두워졌다. 다시 총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