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쿵쿵쿵!
쿵쿵!
한참 두통에 시달리다 보드카를 들이켠 뒤에야 겨우 잠들었던 민재는 누군가 자신의 숙소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깨버렸다.
핸드폰 화면을 켜 시간을 확인한 민재는 욕을 짓씹었다.
“어느 좆같은 새끼가 새벽 세 시 반에 문을 두드리고 지랄이야.”
진짜 비상사태 아니면 죽인다. 그렇게 생각한 민재는 거칠게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말문을 잃었다.
잠이 덜 깨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민재의 눈앞에는 커다란 상자를 든 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지환이 있었다.
얼굴이 벌겋고 온몸에서 술 냄새가 나는 걸 보아하니 술독에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민재는 지금 자신 앞에 떠 있는 것이 사람인지 술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선배.”
지환이 민재를 불렀다.
“왜.”
민재는 답했다.
“민재 선배에~”
지환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 이거 들었어요.”
“알아. 보여.”
후. 지환은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갑자기 날아서 뒤로 가기 시작했다. 뭐야. 민재는 중얼거렸다.
뒤로 간 지환은 저 앞에서 다시 돌아 민재 앞으로 다시 날아왔다. 그동안 상자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환은 상자를 민재 앞에 내려놓았다. 쿠웅. 상자를 내려놓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콩, 콩, 상자 안의 공들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들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근데?”
지금 그래서 들고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민재는 생각했다.
“들 수 있으면 부르라고 그랬잖아요!”
갑자기 지환이 큰 소리로 말했다. 지환의 목소리가 웅웅 복도를 울렸다.
“시끄러워.”
민재는 나지막이 경고했다.
“부르라는 건 온다는 거잖아요.”
“…너 우냐?”
지환이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겠네. 민재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나는… 나는….”
“뭐.”
“선배 살리려고 첫 키스도 포기했는데!”
뭐라고? 민재는 엄청나게 큰 소리가 튀어나오는 지환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미쳤어? 뭐라는 거야.”
“으어!”
지환은 웅얼거리다가 민재의 손을 깨물었다. 악! 민재는 손을 허공에 털며 지환을 쏘아보았다. 한 대 칠까? 민재는 잠시 망설였다.
“그거… 내 처음….”
“…….”
“책임지세요.”
뭘 책임져? 민재는 황당했다.
“너 진짜….”
죽고 싶냐고 물어보려는데 지환이 몸을 꾸물거리더니 얼굴을 들이밀었다. 지환은 민재의 입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야, 야.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오는 지환에 당황한 민재는 그의 얼굴을 잡고 뒤로 밀쳤다.
“뭐 하는 짓이야.”
지환은 자신의 얼굴이 민재의 손으로 덮이자 민재의 손에 입을 맞췄다. 눈까지 감은 채였다. 자신의 입 맞추고 있는 게 손인지 입술인지도 분간이 가지 않는 듯했다.
지환의 혀가 민재의 손바닥을 핥아 올리는 게 느껴졌다. 민재는 빠르게 손을 뒤로 뺐다. 그리고 지환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미친 새끼야, 적당히 못 해?”
“이렇게 했는데….”
멱살이 잡힌 줄도 모르고 지환은 민재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 민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선배가 약을 못 먹어서… 내가… 내가…. 지환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지환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민재는 너무 어이가 없어 전의를 모두 상실해 버린 채로 지환을 바라보았다. 싱크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민재는 생각했다.
“내가… 얼마나….”
지환은 말을 하다 말고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서럽게 울어댔다.
진짜 환장하겠네. 민재는 쓰러지려고 하는 지환의 몸을 받치고 고개를 잡아 올렸다. 그래그래. 민재는 우선 지환을 달래려고 했다.
“선배는 절 왜 그렇게 싫어하세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지환이 민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환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순간 민재는 도리어 멱살이 잡힌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울음에 젖은 지환의 눈은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얜 지금 본인이 무슨 눈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 민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환을 쳐다보자 지환은 손으로 거칠게 눈물을 닦아냈다.
“…싫어하진 않아.”
민재가 말했다. 지환은 눈을 비비다가 동작을 멈추고는 민재를 쳐다보았다.
“…그럼요?”
지환이 물었다. 몸을 일으킨 지환은 민재 쪽으로 걸음을 한 걸음 옮겼다. 지환의 발에 차인 상자에서 퉁퉁 공 소리가 났다.
“…싫어하진 않는다고.”
민재가 말했다. 지환의 상체가 다시 점점 앞으로 기울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지는 바람에 민재는 몸을 살짝 뒤로 빼야 했다.
“그럼요….”
지환은 계속 말꼬리를 늘였다. 민재는 지환의 상체를 살짝 뒤로 밀어냈다. 그러자 지환의 몸이 뒤로 홱 넘어갔다. 민재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지환의 멱살을 잡아야 했다.
대가리 깨뜨릴 뻔했네. 지가 무슨 오뚝이야? 민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술 취한 몸으로 상자를 날라올 정도로 제 나름 억울했나 보다 싶어 민재는 입을 열었다.
“…상자 들게 한 건 네가 비행하면서 중심도 못 잡으니까 시킨 거야. 기본이 잘되어 있어야지, S등급이라는 걸 믿고….”
“…상자는 백번도 더 들 수 있어요.”
지환의 비장한 표정으로 민재의 말을 잘라먹었다. 그럼 뭐 어쩌라는 거야.
“그래,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꺼져.”
민재는 피로감을 누르며 말했다.
“그럼요, 저랑 다녀주세요.”
“뭐?”
은근슬쩍 문을 닫으려고 뻗어낸 민재의 손을 지환이 낚아채 잡아당겼다.
“…페어잖아요. 왜 출동할 때 매번 호영 선배만….”
지환의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고였다. 이 새끼 주사 진짜 구리네. 민재는 생각했다.
“그래, 그래. 알겠으니까.”
민재의 목소리에는 1g의 영혼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환은 그 대답에 눈을 반짝이며 민재의 손을 더 끌어당겼다.
“진짜요?”
“그래.”
“진짜….”
“알겠다고.”
한마디만 더 하면 죽는다고 말하려던 민재의 입이 멈췄다. 재차 약속을 받아대던 지환의 몸이 완전히 앞으로 기울면서 민재에게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엉겁결에 그를 받아낸 민재는 욕을 읊조렸다.
이대로 밀쳐서 문밖으로 버린 다음에 문 닫아버리면 되지 않을까. 복도니까 얼어 뒤질 일도 없겠지. 민재가 결심하고 지환을 밀어내려던 순간이었다.
“밍재 선배….”
지환이 잠꼬대하듯 어눌한 발음으로 민재를 불렀다. 민재는 자신의 가슴팍에 고개를 처박은 채 웅얼거리는 머리통을 쳐다보았다.
하. 깊은 한숨을 내쉰 민재는 지환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는 문 안으로 들였다. 잠금장치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
새벽에 들이닥친 불청객 때문에 밤잠을 설친 민재는 좀비처럼 걸어 출근했다. 센터 건물 내 엘리베이터에 올라 꼭대기 층에 다다른 그는 어쩐지 자신처럼 좀비 행색을 하고 있는 윤 비서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민재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준은 그를 보고 흠칫하더니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그려냈다.
“안녕하세요, 우 실장님.”
우 실장이라. 센터 내에서 비서인 오준을 제외하고는 잘 부르지 않는 호칭이라 낯설었다.
민재에게 인사를 건넨 윤 비서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민재는 한동안 그 앞에서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윤 비서님, 무슨 일 있으세요?”
“네? 아뇨? 왜 그러시죠?”
오준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답했다. 답이 아니고 오히려 되물은 것이지만.
“많이 피곤해 보이셔서….”
“아, 제가….”
무언가 말을 하려고 하던 오준은 다시 말끝을 흐리더니 아랫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깨물었다. 자꾸 이상하게 행동하는 오준 때문에 민재는 조금 민망해졌다.
“요즘 일이 좀 바쁘신가 봐요.”
“네? 아뇨, 별다르게….”
아니라고 답하는 경우는 또 처음 봤다. 멍청하니 이상한 소리를 뱉어놓고 오준은 본인도 민망한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 센터장님, 계세요?”
“아, 네!”
오준은 센터장실의 문을 열어주었다. 민재는 오준에게 묵례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부르셨죠.”
“…….”
센터장은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온 민재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앉으라는 권유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재는 센터장의 책상 맞은편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툭. 센터장은 신문을 민재가 앉아 있는 의자 앞의 테이블로 가볍게 던졌다. ‘SSS급 에스퍼와 S급 에스퍼의 불화설 불거져’라는 헤드라인이 적힌 기사였다.
이거군. 민재는 언론에 예민한 센터장치고는 조금 반응이 늦었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네, 일부러 이러나?”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난번에 알아듣게 이야기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
“다신 이런 이야기 나올 수 없게 하게.”
“알겠어요.”
민재는 성의 없는 투로 대답했다. 센터장은 민재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덧붙였다.
“곧 시작될 비행 시연 자네랑 지환 군이랑 해.”
“싫어요.”
비행 시연은 쉽게 말해 에스퍼들이 하는 퍼레이드 같은 거였다. 관람할 시민들을 불러 모아다가 비행계 에스퍼와 체력계 에스퍼가 펼치는 쇼와 비슷했다.
취지는 에스퍼 이미지 개선이었으나 에스퍼들을 우리 안의 짐승으로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는 걸로 알고 있겠네.”
센터장은 민재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좆같네. 민재는 그 말을 삼켰다.
“977 상황은 안 물어보시네요.”
민재가 싱크홀 현장에서 잡아들인 테러범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센터장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였다. 그런데 오늘 센터장은 민재를 불러 ‘불화설’ 이야기만 했다. 민재는 그게 이상했다.
“그건 내가 묻지 않아도 자네가 보고해야지.”
어디까지 어떤 식으로 보고가 들어갔을까. 민재는 생각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구구절절 보고하고 싶진 않았다. 민재는 우선 침묵을 선택했다.
“심증만으로 사람을 잡아들여 놓고 아무런 수확도 내지 못하고 말이야. 그 테러범 죽었다고 하던데. 애초에 테러범이 맞는 건 확실한가?”
뭐?
민재는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했다.
“…죽었다고요?”
“죽은 것도 모르고 있었나? 오늘 새벽 시체로 발견되었어. 자살했다던데.”
“…말도 안 돼”
그 남자는 분명 자살을 할 상태가 아니었다. 분명 조 박사의 실험실에서 봤을 때만 해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자살을 했다는 것도 이상했다. 가족들이 걱정한다며 자기를 보내달라던 남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 얼굴은 살 의지가 없는 사람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말도 안 되는 건 지금 자네의 일 처리 방식이야!”
센터장은 주먹으로 자신의 책상을 쿵 내리쳤다.
“센터의 대표 마스코트라고 귀엽다, 귀엽다 해줬더니 이딴 사고나 치고 말이야. 한 번만 더-”
잠시 말을 끊은 센터장은 손을 들어 올려 민재를 향해 검지를 뻗어 보였다.
“이런 일이 생기면 지금처럼 넘어가진 않을 줄 알아, 우민재.”
평소에 고상한 척을 한답시고 민재 군이라고 부르던 호칭도 집어던진 모양이었다.
“경고야.”
센터장은 검지를 한 번 더 뻗어내며 덧붙였다. 하고 싶지도 않은 마스코트 자리 앉힌 게 누군데 이제 그 자리로 협박을 해? 지랄하네. 민재는 생각했다.
“나가보게.”
큼. 헛기침을 한 센터장은 살짝 흐트러진 자신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민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