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번쩍. 지환의 핸드폰 불빛이 번쩍였다. 무음 모드인 핸드폰 화면이 켜지자마자 지환은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진실을 밝히고 싶다면 이쪽으로 연락 주세요.
-010-0000-0000.
아아… 또. 지환은 신음했다. 기사가 나간 후로 이런 식으로 인터뷰를 제안하는 기자들의 연락이 쏟아졌다.
지환은 현재 상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이 민재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는 것만은 알았다. 기자들의 연락을 모조리 무시하는 것 말고는 지환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시나 싶어 민재와의 메신저 창을 들어가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와 있지 않았다.
지환은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고는 상자를 노려보았다. 저 상자를 들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잠시 밥을 먹을 때를 제외하고 지환은 훈련장을 벗어나지 않았다.
상자를 들어 올리면 공들이 계속 벽면을 쿵쿵 때렸다. 지환의 마음처럼 쿵쿵 쾅쾅 굴러다녔다.
지환은 계속 휘청거리면서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틈틈이 민재의 상황을 확인하러 우석을 찾아갔다.
우석은 곤란한 듯 어색하게 웃으면서 지환을 맞아주었다. 하도 훈련을 해대서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지환의 가이딩 수치를 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이딩을 해주기도 했다.
“나가.”
상처가 아물지 않은 민재의 손이 지환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차라리 찾아와서 화를 내주시면 좋겠는데. 지환은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에도 화가 났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들어주려고 하지도 않는 민재에게 울컥하는 마음도 없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잘못했나? 오해를 풀 기회는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뭐 해?”
태현이 물었다. 태현은 심각한 표정으로 상자를 노려보고 있는 지환의 모습이 익숙한 듯 훈련장 안으로 걸어 들어와 지환의 곁에 앉았다.
“…생각해.”
“무슨 생각.”
“우울한 생각. 형은 기분 좋아 보인다.”
지환이 힘없이 물었다. 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어, 좋은 일 있어.”
“뭔데?”
지환은 입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태현은 그런 지환에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곧 누나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멀리 출장 갔었는데 곧 온대.”
“아아.”
고개를 끄덕이며 지환은 태현에게서 종종 누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누나분이랑 사이가 되게 좋구나.”
“응, 우리 누나 완전 천사야.”
“그렇구나. 좋겠다.”
영혼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지환의 목소리에 태현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형, 형.”
“왜, 동생.”
“나 술 사주면 안 돼?”
“응, 안 될 것 같아. 근데 왜 내가 산다는 선택지밖에 없을까?”
“…혀엉.”
지환은 축 처진 목소리로 나름의 애교를 시도했다. 그런 지환을 잠시 바라보던 태현은 선심을 쓰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 내가 인심 쓴다.”
“형! 역시 형밖에 없어.”
지환은 태현에게 매달렸다.
“근데 쏘는 건 아니야.”
“형, 치사해.”
태현은 지환이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고는 지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자! 숙취의 세계로! 지환은 찜찜한 기분으로 본인이 제안한 술자리에 질질 끌려서 갔다.
***
“태현이 형.”
지환이 태현을 불렀다. 왜. 태현이 대답했다. 태현은 아까부터 몸을 작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지환은 그게 못내 거슬렸다.
“몸을 왜 그렇게 자꾸 흔들어어. 흥이 주체가 안 돼?”
“참나.”
태현이 어이없어했다. 왜 어이가 없지? 지환은 궁금했다.
“어? 뭐지? 그 반응은?”
“너 진짜 술 못하는구나. 물 마셔라.”
태현은 지환의 소주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크. 지환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소주잔에 든 것을 마셨다.
“근데 있잖아… 형은… 형도 스무 살 넘어서 센터에 왔잖아, 나랑….”
“그랬지.”
“그럼 고등학교도 일반으루… 다녔자나? 형은 원래 꿈이… 있었어?”
“…넌?”
“난 당연히 히어로가 꿈이어찌!”
지환은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태현이 지환의 팔을 잡아 내렸다.
“야, 원래 십 대 애들은 다 너처럼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해?”
지환은 태현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태현의 말투는 마치 일반적인 십 대라고 칭하는 애들이 겪은 것들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지환은 뻑뻑한 눈을 끔벅였다.
“그르게….”
“그러게는 뭐가 그러게야.”
태현이 지환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는 지인짜 되고 싶었는데.”
지환은 턱을 괴었다.
“형은?”
지환이 다시 물었다. 태현은 그런 지환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난 꿈이랄 게 없었어. 아파서 학교도 거의 못 갔고.”
어… 지환은 눈을 끔벅이다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찹찹 쳤다.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형… 힘들었겠다.”
“그렇다고 동정하진 말고.”
태현이 덧붙였다.
“그런 거 아닌데….”
푸- 지환은 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내가 학교에서 어땠더라?
히어로.
지환은 언제나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그렇게 적었다. 어릴 때 히어로와 빌런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한 번 접한 뒤로는 언제나 히어로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린 지환의 눈에는 사람을 구해주는 히어로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멋있어 보였다.
지환은 마침내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꿈을 이루어냈다.
근데 이게 맞나?
지환은 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며 소주를 삼키는 태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했던 말대로 자신은 그냥 멍청한 놈일지도 모른다.
누구를 제대로 구해내지도 못하면서. 히어로는 개뿔. 어쩐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야, 너 울어?”
태현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지환은 앞이 보이지 않았다.
“헝, 태현이 형. 지금은 괜찮아?”
“어어. 야, 괜찮아…. 너 좀 그쳐봐라.”
태현은 테이블에 놓인 휴지를 쑥쑥 뽑아내서 지환에게 건넸다. 지환은 그걸 받아서 코를 풀었다. 야, 좀. 태현이 나지막하게 지환을 불렀다.
“형, 아프지 마.”
지환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지환은 계속해서 민재를 떠올렸다. 인질로 잡힌 지환을 구하기 위해 망가졌던 손과, 주삿바늘이 꽂힌 손. 울긋불긋하고 푸르스름한 색이 섞인 상처투성이의 손.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에서 그렇게 아픈 모습을 한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히어로가 그렇게 아픈 것도 지환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바보야. 지환은 중얼거렸다.
“계속 울면 두고 간다.”
태현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태현은 투박하게 지환의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위로의 의미 같았다.
지환은 그런 태현의 손을 붙들었다. 태현이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손을 뒤로 가져가려고 힘을 주었다.
“형, 우리는 베프지…?”
“내가 형인데 왜 프렌드지?”
헝… 태현의 말에 지환이 다시 우는소리를 내었다. 그런 지환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태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베프야. 됐냐.”
“응, 됐어.”
지환은 태현을 부둥켜안았다. 태현은 질색하며 지환을 내팽개쳤다.
***
민재는 훈련장 B 구역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민재는 생각했다.
지환은 병실에서 쫓겨난 후로 매일매일 문자로 사과를 해왔다. 자기가 화를 내놓고도 뭐 이렇게까지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환에게 악의가 없었다는 것은 민재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런 루머는 지환이 현장에 오는 순간 어떻게든 지어내질 수 있는 것이었다.
어디에나 개처럼 잘 물어뜯는 기자는 많았기 때문에 정말로 민재를 해치고 싶었다면 다른 정보를 팔 수 있었을 것이다.
벌써 두 번째. 가이딩이 갑자기 동나는 이상한 상황을 보여 버렸다. 지환이 멍청이라서 망정이지 다른 에스퍼였다면 이미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싱크홀 안에서 지환은 망설임 없이 그를 구하고 싶어 했다. 지반이 불안정해 아래로 꺼진 상황에 폭발까지 있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민재는 한편으로는 지환이 구하러 내려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환은 왔다. 민재가 눈을 뜰 때까지 퉁퉁 부은 눈으로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민재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루머가 적힌 기사들을 보고야 말았을 때는 배신감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배신감이었다.
왜? 민재는 생각했다. 배신감이 들 이유가 뭐가 있는가. 루머의 일부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는 지환을 무시했고, 싸가지 없게 대했다. 훈련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지환이 스스로 빠르게 나가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재가 지환을 내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지환이 자신에 대한 루머를 퍼뜨린다고 해서 배신감이 들 건 뭐란 말인가.
지환과 훈련을 하던 훈련장은 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어두운 공간에 민재의 걸음 소리만 울려 퍼졌다.
민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불을 켰다. 빛과 함께 텅 빈 훈련장이 눈 속을 파고들었다. 민재는 눈을 찌푸렸다.
“제가 진짜, 얼마나….”
민재는 지환의 말을 떠올렸다. 지환의 얼굴에서 민재는 자신이 정말로 죽을 뻔했다는 걸 깨달았다.
죽을 수도 있었다.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노려지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우발적인 것도 아니고 함정을 놓고 민재를 기다린 것처럼….
아니, 정말 내가 노려진 게 맞나? 우민재가 아니라 에스퍼라면 그 누구라도 상관없었나? 민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문자 왔숑! 민재의 핸드폰이 울렸다. 민재는 느릿느릿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내일 오전 중으로 좀 봅시다.
센터장의 문자였다.
귀찮아 죽겠네. 민재는 생각했다. 루머 쪽인가, 아니면 977인가. 어디까지 이야기가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으나 내일은 꼼짝없이 싫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가서 잠이나 자자. 민재는 스위치를 눌러 다시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