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우석은 퀭한 얼굴로 잠든 민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가이딩실 제일 구석 자리에 처박혀서는 가림막을 모두 친 상태였다.
술이나 퍼먹을 줄 알지 평소 자신의 가이딩 수치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민재 때문에 우석은 매일 밥이나 먹자고 민재를 꼬셔 틈틈이 가이딩을 했다.
오늘도 점심을 먹자고 불러서 가이딩을 주입하니, 그새 간이침대에 누워 잠이 든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조용한 가이딩실에 쾌청한 인사가 울려 퍼졌다. 민재가 가이딩실에 들어와 있을 때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우석은 간이침대의 가림막을 들춰 가이딩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꽤 어린 축에 속하는 얼굴의 에스퍼는 허리를 꾸벅꾸벅 숙여가며 가이딩실을 돌아다녔다. 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쟤 이름 뭐야.”
우석은 지나가던 후배를 낚아채 에스퍼를 가리키며 물었다.
“박지환 씨요. 요즘 자주 오시던데요.”
박지환? 아, 그 S급. 우석은 가이딩실 카운터 앞에서 재잘거리고 있는 지환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마 전 센터에 들어와 민재의 팀에 들어가게 된 놈이었다. 민재가 후배를 싫어하는 티를 대놓고 낸 것은 처음이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싫을 만하기도 했지만 우석은 지환이 어떤 성격인지 궁금했다.
지환은 가이딩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가림막이 쳐진 몇몇 간이침대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가이딩실은 여러 개의 간이침대들이 하얀 천 가림막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혹시 모를 여러 돌발 상황에 대비해 대체적으로는 가림막을 모두 걷어놓기 때문에 지환의 움직임이 잘 보였다.
지환은 가이딩실을 두리번거리며 점점 우석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교대로 점심 식사를 하는 시간대라 꽤 한산한 편이었다. 우석은 지환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안녕하세요!”
지환은 싹싹하게 웃어 보였다. 우석은 가볍게 묵례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지환의 시선이 우석이 차고 있는 목걸이 쪽으로 향했다. 가이드가 착용하는 가이딩실 출입 증명 카드였다. 우석은 지환이 하는 모양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제 막 점심 식사를 마치고 가이딩실로 들어서던 가이드 몇이 지환 앞에 서 있는 우석을 보더니 걸음을 늦췄다.
“내가 가이딩해 줘도 될까요?”
“네…?”
헉. 누군가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가이딩실로 들어오던 가이드들은 서로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환은 우석의 얼굴과 그가 내민 손을 바라보더니 해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지환은 가이딩 부족 초반을 알리는 노란색 경고등이 깜박이는 자신의 손목을 내밀었다.
우석은 악수를 하듯 지환의 손을 맞잡으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지환은 우석에게 잡힌 자신의 손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우석과 눈이 마주치자 큼큼 헛기침을 하며 가림막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요즘 자주 오던데. 임무가 힘든가 봐요?”
우석이 중얼거리듯 물었다. 떠보는 말투였다.
지환은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저는 임무에 참여하지 못해요.”
“왜요? 등급이 안 좋아요?”
우석의 질문에 지환의 입꼬리가 살짝 처졌다.
“음… 그런 건 아닌데요….”
“그럼요?”
이번에는 눈썹까지 축 늘어뜨렸다. 좀 재밌네. 우석은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가 잘못해서… 그러니까 아직은…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라서….”
“훈련이 많이 힘든가 봐요. 가이딩이 이렇게 자주 바닥이 날 정도로.”
“아… 제가 아직 방법을 터득하지 못해서요.”
우석과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지환의 목소리는 시무룩해졌다. 우석은 웃음을 참으며 한 수를 던졌다.
“담당 선배가 누구예요? 너무하네.”
“네??? 아니에요! 선배님은 아무래도 저한테 특별한 훈련을….”
말하다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그건 아닌지, 지환은 말끝을 흐렸다.
이렇게 투명해서 어쩌나. 우석은 민재가 질색하는 구석이 어떤 부분인지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에이, 괜찮아요. 힘들 땐 힘들다고 좀 털어놓을 곳도 있어야지. 안 그래요? 나는 누군지도 모르니까 이야기해도 돼요.”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에 지환은 홀라당 낚여 버렸다. 실은 제가요… 로 시작한 하소연이 이어질수록 우석은 웃음을 참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요지는 히어로가 꿈이었던 자신이 첫 임무부터 선배-민재-에게 실수를 해서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너무 어려운 훈련 과제를 받아서 일주일 넘게 선배 코빼기도 못 보고 임무 참여도 못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상에, 그 선배 좀 성격이 지랄 맞네요. 그죠?”
“네? 그건….”
허. 지환이 말끝을 흐림과 동시에 우석의 등 뒤에서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깼나 보네. 우석은 씨익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림막 천을 열어젖혔다.
“잘 잤어?”
“…….”
우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안부를 건넸다.
인상을 찌푸리며 우석을 노려본 민재는 시선을 돌려 지환을 바라보았다. 지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아, 재밌네 이거. 우석은 가림막을 붙들고 웃기 시작했다.
“재밌냐?”
“응. 완전.”
우석은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민재는 그런 우석의 멱살을 잡고는 잡아당겼다.
야, 야. 우석의 허우적거림을 무시한 민재는 그가 입고 있는 가운의 호주머니에서 가이딩 알약을 몇 개 찾아냈다.
“선배님, 그게 아니라요….”
지환이 그게 아니라는 말을 세 번째 반복했을 때였다. 민재는 가이딩 알약들을 지환 쪽으로 휙 던졌다. 지환은 얼떨결에 그것들을 받아냈다.
“지랄 맞은 선배 눈에 띄지 마라.”
민재는 상큼하게 웃어 보였다. 이를 악문 목소리와 대비되는 얼굴이었다. 꼴깍. 지환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우석에게도 들렸다. 하하. 우석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빨리 밥이나 사.”
민재는 몸을 일으키고는 가이딩실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우석은 그대로 굳어버린 지환의 어깨를 다독여 주고는 민재를 따라나섰다.
***
어두운 방 안에 핸드폰 불빛이 번쩍였다.
-의원님 걱정이 많으십니다. 도련님, 센터 생활은 좀 어떠십니까.
태현은 침대에 모로 누워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핸드폰 화면이 꺼지고 다시 방 안이 어두워졌다. 어차피 정말 필요할 때에는 받을 때까지 연락이 오니까 안부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눈을 감은 태현의 얼굴로 다시 빛이 파고들었다.
-누나.
전화였다. 화면이 꺼지지 않았다. 믿기지 않아 눈을 끔벅거리던 태현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센터로 들어온 지 3주 만에 오는 연락이었다.
큼, 큼. 목을 가다듬은 태현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고이 붙잡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누나?”
[태현아, 잘 지냈어?]
“누나, 괜찮아? 몸은 어때? 별일 없어? 밥은?”
태현은 빠르게 질문을 쏟아냈다. 수화기 너머의 누나는 그런 태현이 귀여운 듯 작게 웃었다.
[나는 괜찮아. 센터는 좀 어떤 것 같아? 불편한 거 없어?]
“누나는 안부를 물으면 대답을 잘 안 해주더라.”
태현의 목소리에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묻어났다.
나한테 힘들다 좋다 이런 걸 이야기해 주면 좋을 텐데. 누나가 말만 하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데. 하여간 내가 원하는 건 말해주는 법이 없지. 태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귓가에 다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곤란할 때 누나가 짓는 웃음이었다. 태현은 그 웃음이라도 좀 더 잘 듣고 싶어 귓가에 수화기를 더 바짝 가져다 대었다.
[아버지한테는 연락드렸어?]
그 말에 태현의 손에서 힘이 살짝 풀렸다.
“아니, 아직.”
[왜에. 아버지가 소식 궁금해하시는 것 같던데.]
“혹시 노친네가 누나 닦달했어?”
[무슨 소리야. 그럴 분 아니시란 거 알잖아.]
거짓말. 태현은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살갑게 대하는 게 아직 좀 어색해서 그래. 아빠랑 나 어색하잖아.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센터에서 누가 괴롭히진 않고?]
“누가 날 괴롭혀. 난 쩌리라 아무도 관심 안 가지던데?”
크기가 크지 않은 물건을 복구할 수 있는 ‘리커버’ 능력을 가진 태현은 서브팀에 배정받았다. 애초에 구조 활동에 힘쓸 수 있는 타입의 능력이 아니라 예상했던 바였다.
[그 S등급이라는 애는?]
“음….”
태현은 잠시 뜸을 들이며 말을 골랐다. 박지환. 비행 능력. 등급에 비해 실력은 형편없고….
“애가 착해. 착한데….”
[그런데?]
“멍청하고… 아직은 좀 더 봐야 알 것 같아. 우선 친하게 지내고 있어.”
[휘말리지 않게 조심해. 혹시 모르니까.]
따뜻하면서 서늘한 목소리였다. 태현은 누나와 통화를 할 때면 종종 이런 느낌을 받았다. 태현은 몸을 모로 돌려 누웠다.
“걱정해 주는 거야?”
[…당연하지. 또 사귄 친구는 없어?]
태현의 질문에 조금 미안해졌는지 누나는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하여간 귀엽다니까. 착해 빠졌고. 내가 아직도 코찔찔인 줄 알고.
“없어. 누나가 보고 싶어. 언제 와?”
태현은 코맹맹이 같은 소리를 내었다. 누나가 그렇게 알면 코찔찔이 하지, 뭐.
[오구우, 애기야. 최대한 빨리 갈게. 건강 잘 챙기고.]
“응, 누나.”
태현이 누나를 불렀다.
응, 태현아. 태현이 부른 것과 닮은 답이 들려왔다. 태현은 잠시 침묵했다.
“또 전화 줄 거지?”
태현은 어쩐지 초조해져 주먹을 그러쥐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럼, 당연하지.’ 하고 다정한 답이 들려왔다.
***
민재는 4차선 도로 한복판에서 멧돼지 떼와 대치하고 있었다.
우선 간이 펜스를 쳐서 인도나 다른 곳으로 섣불리 여파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뒤였으나 상당히 심란한 상황이긴 했다.
하필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튀어나와서 건물을 들이받질 않나 난리를 쳐대는 바람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사진과 동영상을 촬영하기 바빴다.
“무슨 도시 한복판에 멧돼지 떼가 나와?”
“와 미친. 존나 커.”
멧돼지는 일반적인 크기보다 크긴 컸다. 키가 거의 일반 성인 정도로 커다래서 민재는 벌름거리는 콧구멍이랑 마주하고 있어야 했다.
이거 꽤 기분 더럽네. 민재는 모자를 눌러쓰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멧돼지들은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발을 굴러 시멘트에 금이 가게 하고 시끄럽게 꿱꿱거렸다.
어차피 저 동물들을 실어 갈 구조용 대형 트럭이 올 때까지만 버티고 서 있으면 되는 거였다. 명목상 낮은 확률로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을 대비해 실장인 그와 몇 명 애송이 에스퍼들이 투입된 것이니, 민재는 대충 빨리 이 임무를 끝내고 싶었다.
“야. 이 좆밥 새끼야아!”
근방에서 서성거리며 구경하던 시민들 중 한 명이 갑자기 큰소리를 치며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 남자의 손에는 커다란 돌덩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무언가 촬영하는 것 같았다.
민재가 손짓하자 주변에 같이 늘어서 있던 경찰들이 그를 막아섰다. 그러나 손에서 던져지는 돌까지 막아내지는 못했다.
텅-! 금속성의 소리가 울리면서 펜스가 흔들리자 멧돼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멧돼지들이 서로를 들이받다가 펜스에 부딪혔고, 그것에 분노한 멧돼지들은 더 흥분했다.
결국 펜스 한쪽이 넘어지면서 한 마리가 시민들 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에이, 십팔. 민재는 욕을 짓씹으며 사고가 일어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멧돼지 앞을 가로막고는 현관문 크기만 한 실드를 형성했다. 투명한 실드에 부딪힌 멧돼지는 뒤로 물러섰다. 남자아이는 뒤로 튕겨져 나가 도로 구석에 처박혔다.
뒤이어 뛰어든 체력계 에스퍼와 방어형 에스퍼가 멧돼지를 다시 펜스 안쪽으로 몰아넣었다.
민재는 쓰러진 남자아이 쪽으로 걸어갔다. 파란색 점프수트를 입고 있는 아이였다. 민재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몰래 왔어?”
응급처치용 간이 텐트로 아이를 데려온 민재가 물었다. 민재는 가이딩 물약을 건네주고는 아이의 등 쪽으로 몰래 힐을 주입했다.
약을 들이켠 아이는 덜덜 떨면서 눈물을 떨구었다. 딸꾹질까지 했다.
“…아뇨….”
“…배치받았다고?”
“네…. 선생님, 무서워요. 근데 좀 자존심 상해요.”
아이는 무서우면서도 분한 건지 씩씩거렸다. 그래도 조금 진정된 것 같았으나 계속 울어 코가 빨갰다.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좀 이상한가. 민재는 자신의 어릴 때를 떠올려 보려다가 말았다.
“…나 선생님 아닌데.”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민재의 옷에 코 묻은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민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몇 살이야, 너?”
“열다섯 살인데요.”
“…하.”
민재의 헛웃음에 아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의 나이를 비웃은 거라고 받아들인 건지 아이의 눈에 분함의 눈물이 다시 고였다.
프헹! 아이는 민재의 수트에다가 대놓고 코를 풀었다. 민재는 이를 앙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