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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11)화 (1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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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정해진 시간에 훈련장 문을 연 민재는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정리하고 있는 지환을 발견했다. 거울 뒤로 비치는 민재를 본 지환은 어깨를 흠칫 떨며 뒷짐을 지고 인사했다.

민재는 고개를 까딱이며 훈련장 안으로 향했다.

“스쿼트 이백 회.”

“…네?”

지환이 멍한 얼굴로 되묻자 민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들었으면서 뭘 물어. 지환은 재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해했습니다! 스쿼트 이백 회!”

민재는 터덜터덜 걸어 지환의 곁을 지나쳐 갔다. 아침부터 보드카를 잔뜩 들이켰더니 속이 좋지 않았다.

민재는 훈련장 구석에 배치된 의자에 널브러졌다. 덜 마른 빨래처럼 축 늘어진 민재를 지환이 소심하게 불렀다.

“저… 선배님, 다치셨어요?”

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어제 저도 모르는 임무가 있었다거나…?”

지환의 이어지는 질문에 민재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저 쫑알거리는 것을 금지시켜야겠다 싶었다. 길게 뻗은 검지가 지환 쪽을 가리켰다. 지환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

“하나. 질문하지 마.”

“네엡….”

규칙의 순서를 기억하기 귀찮은 민재는 다시 하나를 불렀다. 민재의 말에 지환은 시무룩해져서는 민재 근처에 서서 앉았다 일어나기를 시작했다. 하나, 둘, 세엣, 네엣, 다섯, 숫자를 세는 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지환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이 빙그르르 돌았다.

또 이러네. 민재는 코와 입을 가리고 천천히 호흡했다.

눈앞이 돌고 있을 때 가만히 있으면 과호흡이 왔다. 16살 즈음부터 생긴 후유증 중 하나였다. 원인을 알 수가 없네요. 문제가 없어요. 어느 병원을 가도 똑같은 말을 들었다.

여러 번 촬영한 민재의 뇌 사진들에서는 어떤 문제도 찾아볼 수 없었다.

7번째 사진을 다시 찍었을 때 민재는 두통약이 담긴 통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수통에 보드카를 담았다.

민재는 독한 술을 달고 살기 때문에 지금 앞이 빙글빙글 도는 게 후유증 때문인지 술 때문이지 정확하지는 않았다. 정확한 건 오늘 기분이 매우 엿 같다는 것뿐이었다. 기분이 엿 같은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별다를 것도 없었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며 민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선배님. …선배님?”

시간이 좀 지났을까. 자꾸만 부르는 소리에 눈을 뜬 민재는 자신을 살피고 있는 지환과 눈이 마주쳤다.

이제 보니 꽤 날카로운 눈매였다. 쭉 뻗은 선 안에 자리 잡은 다갈색 눈동자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부진 턱선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졌다.

참 성격과 안 어울리게 생겼다. 민재는 생각했다.

“저 스쿼트 다 했어요.”

누가 들어도 칭찬을 바라는 목소리였다. 허스키하면서도 약간의 미성이 섞인 목소리는 사춘기 소년의 그것 같았다. 그 목소리를 들으니 민재는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거짓말하지 마.”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그걸 다 했다니. 거짓말이다. 민재는 억지를 부려보았다.

“진짜예요….”

익은 것 같은 얼굴과 거칠게 내뱉는 호흡, 줄줄 흐르는 땀이 민재의 말을 억지로 만들고 있었지만 민재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근데 선배님, 몸 많이 안 좋으세요?”

걱정 어린 목소리가 민재의 귀를 간지럽혔다. 호흡이 부족한 건지 과한 건지 알 수 없으나 민재는 조금 몽롱한 상태였고, 그것이 거친 호흡을 하고 있는 지환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저게 숨을 너무 크게 쉬어서 그렇다. 민재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안 좋으면?”

그래서 삐딱한 목소리만 나갔다. 갈라진 목소리를 들은 지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뜨거운 손이 민재의 이마를 덮었다.

“어… 열이 있는 건가요?”

지환은 자신의 손으로 민재의 이마를 짚어놓고는 도리어 물어왔다. 민재는 코웃음을 흘리고는 지환의 손을 가볍게 치웠다.

“푸시업 이백 회.”

민재는 다음 과제를 알려줬다. 지환의 입이 헤 벌어졌다. 네? 라고 수차례 되묻고 싶으나 차마 말할 수 없다는 심정이 얼굴에 그대로 쓰여 있었다.

민재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이번엔 거짓말하나 안 하나 잘 봐줄 테니까, 해봐.”

울상을 지은 지환은 어기적거리며 몸을 엎드리고는 푸시업을 시작했다. 민재의 눈은 다시 나른하게 풀렸다.

***

지환은 최근 칼같이 아침 7시에 기상했다. ‘빠빠빠 굿모닝-!’의 ‘굿’이 나오자마자 경쾌하게 핸드폰을 내리친 지환은 상체를 일으키고는 눈을 비볐다. 그러고는 욕실로 향해 정성스레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샤워를 한 지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샤워 코롱을 뿌리고는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지환은 빗으로 머리 가르마를 탔다. 정확하게 2:8 비율로.

“이러면 좀 단정한가?”

좀 성숙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지환은 창문을 열고는 상체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 그대로 발을 박차 날아올랐다.

허공에 뜬 지환은 자신의 숙소 위층에서 생활하고 있는 태현의 창문을 두드렸다. 쿵, 쿵. 쿵.

그러자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는 인상을 찌푸린 태현의 얼굴이 솟아올랐다.

“야, 지금 몇 신 줄 알아?”

“헉, 형. 나 늦었어? 몇 신데?”

죽고 싶어? 태현이 물었다. 지환은 태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의 얼굴을 창 쪽으로 들이밀었다.

“형, 나 이 머리 어떤 것 같아? 좀 단정해 보여?”

지환의 2 대 8 머리를 본 태현은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창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지환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허공에서 지환의 팔다리가 허우적거렸다.

“아, 형!”

태현은 웃으면서 뒤로 멀어지려는 지환의 머리채를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악! 지환이 비명을 질렀다. 헝클어진 지환의 머리를 가만 쳐다보던 태현은 엄지를 세워 보이고는 창문을 닫았다.

결국 평소와 같은 머리로 훈련장에 도착한 지환은 오늘도 스쿼트와 푸시업을 했다.

민재는 아침마다 축 늘어져 있었다. 그런 민재의 몸에서는 언제나 은은하게 알코올 솜 냄새가 났다. 민재의 몸에 상처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환은 그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민재는 쓰러진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도 지환이 움직임을 멈추면 귀신처럼 눈을 뜨고는 쏘아보았다. 지환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한참 후에야 민재에게서 풀려난 지환은 급식실-사내식당을 모두 그렇게 부른다-로 들어섰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발뒤꿈치부터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기 때문에 엄청나게 천천히 걸어야 했다.

사람은 왜 걸을 때 자신도 모르게 팔을 휘적거리는지 지환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팔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그때 어기적거리는 지환의 어깨에 누군가 팔을 올렸다.

“으어어어억…. 아아… 아…. 누구세요….”

고생한 건 팔과 다리인데 왜인지 목까지 굳어버린 지환은 기름칠하지 않은 고철처럼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것인지 급하게 팔을 떼어내는 호영이 보였다.

아, 제1팀 선배님이다. 지환은 최선을 다해 웃어 보이며 인사했다.

“아… 선배님….”

“저기…. 음… 내가 밥이라도 사줄까?”

“…네?”

“같은 팀이 되었는데 밥도 한번 못 먹은 것 같아서… 불편하면 사주기만 하고 갈게.”

민망한지 호영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엄청 좋은 사람이다. 그를 보는 지환의 눈빛이 뜨거워졌다.

호영은 열렬한 지환의 반응에 상체를 살짝 뒤로 물렸다. 지환은 그런 호영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돈까스 이 인분 먹어도 되나요, 선배님?”

“어? 그래그래. 먹어.”

“흑… 감사합니다.”

지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마, 많이 힘들었구나, 너. 매우 당황한 호영은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며 터치형 스크린으로 돈까스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런 훈련을 시키신다고? 왜지?”

얼굴을 식판에 박다시피 하고 밥을 먹던 지환은 호영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원래 다 받으시는 훈련 아니었어요?”

“음, 아닐걸.”

“헝….”

울상이 된 지환이 음식을 밀어 넣는 속도를 늦췄다. 조금 입맛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괴롭힘당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우울해졌다.

축 처진 지환의 얼굴에 놀란 호영은 다급하게 지환을 달랬다.

“뭐… 뭔가 의도가 있으시지 않을까?”

“네?”

“횟수가 많은 걸 보면 중력 활용도를 보려고 하시는 거 아냐? 아니면 뭔가 다른 훈련을 시키고 싶으신 걸 수도….”

호영의 말에 지환이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역시! 민재 선배님은 너무 멋있어! 나한테 특훈을  해주시려는 거야!

순식간에 밝아진 지환의 표정을 본 호영은 난감한 웃음을 남겼다.

“지환이, 너… 굉장히 투명하구나…?”

“네?”

다시 씩씩하게 입속에 밥을 욱여넣는 지환을 보며 호영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지환은 다시 식판에 코를 박았다.

***

민재는 모자를 눌러쓰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관계자 외에는 들어설 수 없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창문도 없이 삭막한 복도에는 민재의 발소리만 울렸다.

그때 저 앞에서 회색 벽이 열리더니 커다란 고글을 쓴 남자가 튀어나왔다.

흰 가운을 걸치고 투명 고글을 쓴 남자는 철로 된 막대 같은 것을 들고 있었고, 몸에선 옅게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 민재 군!! 어서 와, 어서!!”

그는 다급한 듯 손을 퍼덕이며 자신 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손에 철 막대를 들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지 마구 휘저어대서 꽤 위협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민재는 노골적으로 한숨을 내쉬며 걸어갔다. 속도를 빨리하지도 않았다.

남자는 어딘가 모르게 비굴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좀 서둘러 줘.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작작, 적당히. 그런 거 모르세요?”

민재의 날 선 목소리에 남자는 소매로 자신의 이마를 닦아냈다. 더운 건지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짜증이 섞인 감탄사를 내뱉은 민재는 욕을 목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남자의 뒤쪽을 살폈다.

벽 안쪽 공간은 실험실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조 박사님.”

“엉??”

“뭔 짓 했어요?”

“아니! 내가 이거 실험을 좀… 그러니까 조금만 더…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조 박사는 말꼬리를 늘이며 민재의 눈치를 살폈다.

“냉각팬 틀어요. 시원해질 때까지 나 안 들어가요.”

“야, 그럼! 그… 으음, 죽을지도 몰라.”

“누가요. 조 박사님이? 그럼 좋겠네요.”

“아니! 그, 그….”

민재의 단호한 반응에 조 박사는 눈을 홉뜨고는 실험실 안을 마구 가리켰다. 실험실 안은 연기로 가득 차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어쨌든 냉각팬 틀어요.”

“알았어!”

박사는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윙윙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연기가 환풍구 쪽으로 흘러들어 가고 점차 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민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연기 안을 계속 주시했다.

“으!”

조 박사가 뭘 발견한 건지 벽에 몸을 붙이고 섰다.

실험실 벽면에 붙은 여러 장치와 중앙에 놓인 의자가 보였다. 의자 위에는 한 남자가 묶여 있었다. 지져진 건지 타버린 건지 화상을 잔뜩 입은 상태였다.

민재는 조 박사를 말없이 힐긋 노려보았다. 자기가 저질러 놓고 왜 놀라고 지랄이야. 민재는 혀를 찼다. 조 박사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고글을 고쳐 썼다.

의자에 가까이 다가간 민재는 힐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상처가 천천히 아물었다. 의자에 묶인 남자가 상처 하나 없는 말끔한 모습이 되고 나서야 민재는 손을 떼었다.

“선생님.”

민재가 남자를 불렀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짝!

민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남자의 뺨을 갈겼다. 그에 정신이 든 건지 남자는 윽! 하는 신음을 흘리며 눈을 뜨고 민재를 바라보았다.

“선생님?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괴물 같은 새끼…! 차라리 그냥 죽여라.”

“나이 서른일곱 살. 김석훈 선생님 맞으신가요.”

“…….”

“김 선생님. 얼마 전에 에스퍼 발현 후 폭주로 아들을 잃으셨네요. 유감입니다. 그게 이번 학교 테러를 저지르게 된 원인인가요.”

유감이라고 말하는 민재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남자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민재를 노려보았다. 분노와 증오가 담긴 눈이었다.

“인간도 아닌 것들… 너네 내가 죄다 까발릴 거야. 사람들의 몸을 빼앗고, 고문하고….”

민재는 다시 손을 뻗었다. 남자는 몸을 움츠리려다 실패했다.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재는 남자의 뺨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살짝 부어오른 남자의 뺨이 다시 멀쩡해졌다.

“까발릴 게 없으실 텐데요.”

“하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아악!!! 죽여줘. 제발… 제발….”

남자는 고개를 계속해서 저었다. 눈물과 콧물이 뒤섞여 턱으로 줄줄 흘러내렸다. 민재는 남자의 얼굴에서 손을 뗐다.

“조금 전에 말씀하신 ‘사람 몸을 빼앗는다’는 거 말인데요, 선생님.”

“내 아들… 죽여줘….”

“까마귀에서 오셨군요.”

남자와 민재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눈에 공포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민재는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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