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슬윤 - 히어로는 반드시 현장에 나타난다 (3)화 (4/181)

003

지환은 눈앞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일반인을 치유할 수 있는 가이드라니, 그런 게 있나?

그렇지만 좀 전에 그는 분명 자신을 가이딩했다.

가이딩은 에스퍼의 체내 에너지를 채워주는 것으로, 일반인보다 회복력이 월등히 빠른 에스퍼들의 회복 속도를 올려주기도 한다. 지환은 그런 식의 가이딩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너무 놀라 삿대질까지 하며 어버버하는 지환의 앞으로 제1팀이 날아들었다.

제1팀은 숫자 ‘1’이 붙은 만큼 히어로 센터 내에서도 최정예로 손꼽히는 팀이었다.

SSS급 에스퍼이자 한국 히어로 센터의 에스퍼실 실장 우민재를 팀장으로 두고 있는 제1팀은, 센터 내 에이스인 A급 에스퍼 여은정, 그리고 A급 에스퍼 주호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힘과 기동력이 가장 강한 팀으로서 센터 안팎으로 이름들이 퍽 유명했다.

‘지금 나… 1팀 선배님들이랑 첫 임무 수행하는 거야?’

지환은 입을 틀어막았다. 믿기지 않는 상황들의 연속이었다.

“선배-!”

센터에서 유명한 은정이 발랄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그녀는 호영의 등에 업혀 있었다.

올려 묶은 은정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렸다. 은정은 센터에서 키가 제일 컸기 때문에 그에 비해 작은 편인 호영에게 업힌 모양새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은정은 가뿐하게 땅으로 착지해 손을 흔들며 방금 전까지 지환과 같이 있던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선배? 지환은 의아했다.

“왜 이제 왔어.”

차분하고 퉁명스러운 말투의 답에도 은정은 생글생글 웃으며 답했다.

“에이, 짜증 내는 거 보니 나 보고 싶었구나?”

애교 섞인 은정의 말투에 그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평소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사람을 바닥에 장독 파묻듯 메다꽂아 버린다고 소문난 은정 선배가? 애교? 지환은 자신 앞에 펼쳐진 일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알고 보면 되게 유명한 가이드인가? 에스퍼가 가이드한테 잘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 어떻게든 상황을 납득해 보기 위해 그런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누군가 아직 허공을 향해 뻗어 있는 지환의 손가락을 조용히 꺾었다. 억! 뒤로 꺾인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른 지환은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은정을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뭐 해?”

“앗,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180cm가 넘는 지환은 센터 내에서도 꽤 큰 편이었는데도 은정 앞에 마주 서면 그녀를 올려다봐야 했다.

은정은 앉아 있을 때 얼굴만 보면 귀엽고 순해 보였지만 몸을 일으키면 덩치가 커 은근한 압박감을 주었다. 은정의 크고 동그란 눈을 마주하고는 조금 소심해져 버린 지환은 힐끔힐끔 눈치를 살폈다.

“어, 사고뭉치잖아!”

은정은 그제야 지환을 알아보았다는 듯 말했다.지환은 갓 센터에 들어와 교육을 받을 때 훈련장 물품을 망가뜨린 적이 있었다.

그때, 지환은 (실장 대리로 사고 친 놈들을 조지러 다닌다는) 은정에게 혼날까 봐 3일간 숙소 안에만 처박혀 있다가, 결국 숙소까지 쳐들어온 은정에게 탈탈 털렸었다.

그 후, 은정은 지환과 마주치면 늘 사고뭉치라고 불렀다.

인사를 한 은정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네가 왜 여기 있어? 어디 팀인데?”

“네? 저는 그냥 조교님이 이리로 가면 된다고 하셔가지고….”

“그래? 너네 팀 팀장이 누군데?”

은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환은 조금 무서워져 옆에서 웃고만 있는 호영 쪽을 쳐다봤다.

센터 내의 아이돌이라는 별명을 가진 호영은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호영은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편은 아니었으나 웃을 때 묘하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저… 팀이 없는데요….”

“팀이 없다고? 근데 임무를 나왔다고?”

은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영은 따로 말을 거들어주지 않고 같이 지환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환은 재빠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네….”

“개판이네.”

은정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환은 고개를 살짝 움츠렸다.

“너 오늘 임무 첫 투입이야?”

“네? 네!”

“그래, 처음인데 고생했네. 질질 짠 건 아니지?”

은정은 눈치를 보는 지환에게 웃어 보이며 농담을 건넸다. 지환은 그에 안심하며 주접을 떨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저 선배님들이랑 첫 임무를 같이 수행할 수 있게 돼서 진짜 너무 영광이에요!! 제1팀 선배님들과 함께라니 전 진짜 여한이 없어요….”

“오냐.”

지환은 주저리주저리 주접을 떨기 시작했고, 은정은 그런 반응이 익숙한 듯 지환의 말에 대강 반응하며 현장을 살폈다.

지환은 은정을 따라다니며 좀 전까지 자신과 같이 있던 가이드 쪽을 살폈다. 여전히 모자를 눌러쓴 가이드는 계속 돌아다니며 사람들 구조를 돕고 있었다. 모자 아래로 선이 가늘고 미인형인 얼굴이 슬쩍슬쩍 보였다.

되게 잘생기셨을 것 같은데… 왜 가리고 다니지. 은정 선배가 선배라고 부르는 저 가이드는 누굴까. 지환은 생각했다.

“근데 너 용케 민재 선배랑 만나서 있었다?”

길 한복판에 떨어진 건물의 잔해들을 들어 옮기며 주변 정리를 시작하던 은정이 지환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민재 선배님이요?! 민재 선배님도 현장 오셨어요?”

깜짝 놀란 지환은 은정의 팔을 덥석 잡고는 물었다. 그러자 은정의 눈이 휘둥그레지다 말고 가느다랗게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어…? 왠지 불안해진 지환은 살며시 은정을 잡고 있던 손을 치웠다. 그때였다.

“선배애애액! 민재 선배애애애!!!”

은정은 엄청나게 큰 소리로 민재 선배를 외쳐댔다. 너무 놀라 버린 지환이 상대가 무서운 선배라는 것도 잊고 손으로 입을 막으려는 시늉을 할 정도였다.

“조용히 해.”

그런 지환의 마음을 모자를 쓴 가이드가 다가와 대변해 줬다. 네, 선배님.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지환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은정은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환과 민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민재 선배, 얘가 선배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데?”

“…허.”

헛웃음을 터뜨리는 가이드의 눈썹이 꺾여 올라갔다. 지환은 그제야 은정에게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한 사람이 그 ‘우민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찌푸려진 미간에 헤 벌어진 입. 공포영화에서 귀신과 마주친 것 같은 얼굴로 굳어버린 지환의 표정을 보고 은정은 웃음을 터뜨렸다.

은정이 손으로 지환의 어깨를 마구 쳐댄 덕분에 지환은 바람에 흔들리는 허수아비처럼 흔들렸다.

***

센터에 속한 에스퍼들은 모두 히어로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민재는 특별했다. SSS급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사람들에게 환상을 덧씌우기에는 충분했다.

우민재는 그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는 대단한 히어로였다. 국내 최고의 에스퍼. TV나 포스터의 사진으로 만나던 히어로 우민재는 강인한 인상이었다.

유일무이한, 최고의,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대단한 존재. 그것이 미디어가 대중에게 우민재를 노출시키는 방식이었고, 대중은 미디어가 씌어놓은 히어로 우민재의 가면만 확인할 수 있었다.

“어, 그러니까 선배님이….”

“우민재.”

손가락으로 민재를 가리킨 채 어버버 정신을 못 차리는 지환의 손가락을 은정이 손수 접어주며 덧붙였다.

손을 내리고는 뒷짐을 진 자세로 고개 숙인 지환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지? 그 우민재를? 지환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민재가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마주친 이후로 계속 찌푸리고 있는 인상이 까칠해 보여 더더욱 알아볼 수 없었다. 눈앞의 상대는 지환이 화면으로 보아온 우민재와는 확연히 다른 이미지였다.

화면 속 민재는 좀 더 커다랗고, 강직한 이미지에 늘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있는 사람이었다.

눈앞의 민재도 자세히 보면 똑같은 얼굴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인상과 느낌이 달랐다. 얇고 가는 선으로 죽죽 그어놓은 것 같은 섬세한 얼굴에 큰 눈은 ‘미남’보다는 ‘미인’에 가까웠다.

게다가 여태껏 센터에서는 히어로 우민재의 능력에 대해 크게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 에스퍼는 국가 인력이기 때문에 능력을 대중에게 대놓고 공개하진 않았다. 그저 이런저런 소문만이 있었을 뿐이다.

전투형 능력일 줄 알았는데, 힐이 되시는구나. 진짜 개멋있다. 그런 분이 내 선배라니, 선배라니! 근데 진짜 뭐지? 왜 몰랐지? 지환의 머릿속이 빠르게 팽팽 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자신의 우상을 못 알아봤는지 고민하던 지환은 갑자기 뒤통수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러니까 내가 그 우민재를 들어서 이렇게 저렇게 해버린 거 아니냐고.

어떻게 된 것인지 변명이라도 하고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환은 빠르게 얼굴을 들었다.

무릎이라도 꿇어야 하나? 아니면 우선 싹싹 빌어야 하나? 짧은 찰나 지환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민재가 눈앞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치를 보며 쩔쩔매는 지환에게는 아예 관심도 없어 보였다.

“망했다….”

지환은 자신의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지금 상황이 꿈일 가능성을 점쳐보았다. 왜 가이드라고 착각했지? 지환은 쓸모없는 머리통을 깨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좀… 좋았단 말이야…!”

지환은 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정말로 어이없지만, 민재가 자신의 다리를 치료해 줄 때 묘한 쾌감이 일었었다. 지환은 그게 상성이 잘 맞아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미쳤지, 박지환. 미쳤어! 지환은 스스로에게 꿀밤을 있는 힘껏 먹이고 싶었다.

자신을 미친놈 보듯 보던 선배님의 오해를 어떻게든 풀고 싶었으나, 현장은 그런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실실거리는 은정을 끌고 사라진 민재는 정말 빠르게, 엄청난 인원을 치료했다. 지환도 얼른 합류해 사람들을 운송해야 했다.

“화 많이 나셨겠지….”

얼얼한 통증이 지환의 얼굴에 퍼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지환은 머리를 마구 헝클며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서 선배들을 지원하러 날아올랐다.

***

“살려주세요!”

살려달라는 소리가 난무하는 현장이었다.

그래도 살려달라는 말이나마 외칠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아예 정신을 잃었거나 큰 부상으로 이미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는 부상자들이 더 많았다.

그런 경우 건물의 잔재 속에서 구조자 파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더 까다로웠다.

한마디로,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멍청한 후배를 달래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어차피 이번 임무가 끝나면 다시 볼 일도 딱히 없을 테니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선배!!”

몇 명에게 치유 능력을 사용했을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재의 손목에는 초기 단계의 가이딩 부족 경고등이 떠 있었다. 이쯤 되면 센터로 슬슬 복귀해야 했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민재의 곁으로 팀원인 에스퍼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그는 얼마 전까지 센터의 막내였던 에스퍼로, 비행과 신체 강화 능력을 갖추고 있어 민재가 종종 얻어 타던(?) 후배였다.

민재와 친구인 가이드실 실장 우석과, 은정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는 민재는 같은 팀인 그의 이름을 자꾸만 잊어버렸다.

팀이라고 해봤자 3명밖에 없는데 이름을 외우지 못한다고 후배는 매번 투덜거렸다.

이번에도 민재가 가만히 보고 있자, 후배는 표정을 구기며 자신을 소개했다.

“호영이요! 주호영!”

“어어. 왔어? 수치는.”

“아아-! 선배 진짜 너무하십니다!”

호영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민재는 호영의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아직은 양호한 상황이었다.

그런 작은 호의에도 호영은 감동받은 듯 헤헤 웃으며 목 뒤를 긁적였다.

“선배, 근데 오늘 사고 범위가 너무 넓어서 이동하시기 힘드셨죠. 뛰어다니신 거예요?”

빠르게 이동해야 할 때는 비행이 가능한 에스퍼들이 다른 에스퍼와 동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농담을 섞어 카풀이라고들 하는데, 팀으로 같이 움직이지 않을 때도 민재가 워낙 자주 호출하다 보니 호영은 묘하게 자신이 민재를 모시고 다니는 전용 에스퍼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조금 머쓱해진 민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괜찮아. 잘 왔어.”

토할 것 같았지만. 이라는 말은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호영이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민재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저 꼭 부르세요!!!”

“그래그래.”

민재는 가볍게 호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그리고 선배. 은정 선배가 최 실장님으로부터 들은 전언이 있다고, 대신 전해달라 하셨어요.”

호영은 실실 웃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꽤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뭔데?”

호영이 민재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귓속말을 하는 시늉을 했다. 큼큼 헛기침도 했다. 근처에 사람도 없는데 굳이? 싶었지만 민재는 그냥 얌전히 귓가를 대주었다.

“매가… 날아든 것 같다고 전하라 하셨어요.”

“……!”

매가 떴다고? 민재는 티 나지 않도록 움직임을 최소화한 채 빠르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