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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퍼는 농담을 한 게 아니었던지 부담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로 민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가이드가 되어달라고 한 거 맞지? 민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울먹이는 소리가 뿌연 안개 같은 먼지들을 뚫고 날아들었다. 근처에 시민이 있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니 부상을 입은 상태일 수도 있었다. 민재는 눈을 가늘게 뜨며 먼지들 사이로 인영을 파악하려고 했다.
그때 민재의 옆으로 무언가가 훅 들어왔다. 무언가는 겨드랑이 사이로 쏙 빠져나와 민재의 몸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민재는 좀 전과 같이 몸이 달랑 들리는 것을 느꼈다.
“야!”
민재는 머리 위쪽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나 방향이 틀려 힘차게 응원하는 것 같은 포즈가 되어버렸다.
“잠시만요. 가이드님! 인명 구조가 우선이에요. 동행해 주세요!”
해맑은 꼬마 에스퍼는 다리가 치료되자 힘이 넘치는지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민재는 잠시 꼬마 에스퍼의 목을 뒤틀어 버리는 상상을 했으나 날아가는 게 시민 구조에 더 빠를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시민님! 구조 에스퍼입니다!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세요!”
“여기요…! 여기요…!”
요란하기는. 혀를 찬 민재는 몸에 힘을 빼며 귀를 후벼 팠다. 소리치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에스퍼래! 살 수 있어! 희망에 찬 목소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근방에서 들려왔다.
여기예요, 여기!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소리치는 인영들이 보였다. 어림잡아 열댓 명 정도였다. 민재는 팔을 들어 자신을 붙들고 있는 꼬마 에스퍼의 팔뚝을 툭툭 쳤다.
“가이드님, 불편하세요?”
민재의 호칭은 아까 전부터 시민에서 가이드로 정정되었다. 둘 다 틀렸으나 민재는 그걸 딱히 수정할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대충 눈치를 채게 될 텐데 굳이 나서서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민재는 고개를 대강 주억거리며 위쪽을 가리켰다.
“위로 좀 올라가요.”
“네? 지금 하강해야 해요. 저기 시민들이 계신데…!”
“네, 네. 일단 위로 올라가서 위치 파악하고 하강하세요.”
어…. 망설이는 듯 우물쭈물하던 꼬마 에스퍼가 빠른 속도로 고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민재는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욕지기를 뱉으려다 참았다.
“가이드님! 여기 A사 빌딩 남동쪽이요!”
“네.”
“근데 가이드님, 좀 전부터 궁금했는데 모자는 왜 그렇게 눌러쓰고 계신 거예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좀 실례인가요?”
“네, 실례예요.”
“아….”
큼큼. 에스퍼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했다. 민재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핸드폰을 꺼냈다. 띠링띠링! 띠디딩! 띠딩띵! 발랄한 키패드 음이 울려 퍼졌다.
A사 빌딩 남동쪽. 부상자 속출. 긴급 지원 요함. 문자 전송 버튼을 누르는데 귓가에서 풉, 하고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어요?”
“…아닙니다.”
민재가 살벌한 목소리로 묻자 꼬마 에스퍼는 조금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하강해요.”
더 말하는 것도 귀찮았다. 지적하려고 들면 할 것이 너무 많았다. 민재는 짧게 명령했다. 그의 몸을 잡은 꼬마 에스퍼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저기….”
꼬마 에스퍼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또 왜요.”
민재가 짜증스레 답했다.
“꽉 잡으세요.”
뭘? 묻기도 전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의 몸이 안전 바 없이 자이로드롭에 탄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고 있었다.
놀란 민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벌리기만 했다. 순식간에 들이닥친 공포로 발끝이 저릿하고 머리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자신의 가슴께를 단단히 붙잡은 팔이 느껴졌다. 순간 그 팔이 생명을 구해줄 동아줄처럼 느껴진 민재는 그 팔에 매달리듯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이 미친 새끼야악!!!”
물론 꽉 잡는 것과 욕을 하는 건 별개였다.
***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널찍한 테이블이 있는 넓은 평수의 사무실 안, 그곳에 금박으로 수놓아진 명패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는 남자가 있었다.
명패에는 센터장 김진성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는 선명한 얼굴선에 비해 전체적으로 둥근 인상으로, 다부진 광대뼈와 깊은 눈매가 신뢰감을 주는 외모였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누구보다 빠르게 ‘히어로 센터’의 설립을 주장한 인물이었다.
당시 꽤 젊은 편에 속하는 정치인이었던 김진성은 자신의 사비로 국내 히어로 센터를 설립했다. 이후 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센터의 크기를 키우고 지금의 시스템을 갖춰 나갔다.
그리고 끝내 ‘공포스러운 미지의 대상’을 위험으로부터 구해주는 ‘영웅적 존재’로 바꾸어놓는 데 성공했다. 히어로 센터는 설립 2주년에 국가가 공식으로 인정한 인명구조기관이 되었다.
히어로 센터를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김진성은 다른 관직을 노리지 않고 오로지 국회의 의원으로서만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계에 발을 담가보려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그가 국방부의 장관급 정도 되는 권력을 쥐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진성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태블릿을 켜니 비서가 정리해 놓은 오늘 자 기사들이 쭉 올라왔다.
-SSS급 에스퍼 우민재의 진짜 정체는?
-SSS급 에스퍼 우민재의 능력이 조작된 가짜라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당일 새벽 유명 미스터리 커뮤니티에 현 히어로 센터 센터장이자 정치인인 ‘김진성 의원’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용병들을 만들어내 자신들의 슬하에 두고 있으며, 그것을 초능력자로 꾸며내 대국민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는 내용이….
“정말, 유치하게도 나오는군.”
잘 갖추어진 정장의 넥타이를 잡아 느슨하게 풀며 진성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피로한 듯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시의 쉬는 시간도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건지, 웅- 웅- 그의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현장 도착. 폭파 후 위치 감지 어려움.
메시지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잠시 고민했다. 민중은 이런 가십거리에 쉽게 휩쓸린다. 그러나 정치가인 김진성은 언제나 새로운 파도를 만들 줄 알았다.
화면 속 활자들을 노려보던 남자는 쯧, 혀를 차며 자신의 넥타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단정하고, 완벽한 매무새였다.
진성은 책상 아래쪽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작은 스피커를 통해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센터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윤 비서.”
[네, 넵!]
“우리 에스퍼 실장님이 아주 맛있게 씹히고 계시던데요. 물론 나도 그렇고.”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꿀꺽. 스피커를 통해 윤 비서가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대응할까요?]
“글쎄요. 뭐, 나한테 그러는 것은 그냥 오늘 국민들에게 재미난 기삿거리 하나 선물했다 치면 되겠지만….”
[…….]
“민재 군은 우리 센터를 대표하는 에스퍼인데 내가 또 우리 히어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못 참지 않습니까.”
[그, 그렇죠….]
진성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가 원하는 말을 비서가 대신해 주길 바랄 때 그가 취하는 태도였다. 잠시 뒤, 윤 비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넘어왔다.
[기자회견, 준비할까요?]
“역시. 윤 비서님만 믿을게요.”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윤 비서는 빠르게 대답해 왔다.
[네, 센터장님. 맡겨주십-]
진성은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버튼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와 동시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도 끊겼다.
그는 서랍에서 태블릿을 꺼내 보도된 기사 목록들을 다시 훑기 시작했다. 조용한 사무실에 톡. 톡. 스크롤을 내리는 소리만 간혹 들려왔다.
***
토할 것 같았다.
꼬마 에스퍼 새끼는 차고 넘치는 곳 중에 부상자 코앞에 착지를 해서, 민재는 토를 할 수도 없었다. 부상자 앞에서 토하는 에스퍼라니, 신뢰가 바닥을 찍을 테니까.
“여기 철근에 다리가 깔린 사람이 있어요!”
어떡하지? 라는 말을 남발하던 꼬마 에스퍼는 다리가 철근에 깔린 사람이 있다는 말에 ‘가이드님 여기 꼼짝 말고 있으세요! 위험해요!’라는 말을 지껄이고는 빠르게 날아갔다.
죄다 매뉴얼대로 하면서 구조자 앞에서 ‘어떡하지?’ 같은 질문을 하면 안 된다는 건 왜 안 지키는 건데. 어이가 없어진 민재는 숨을 들이쉬려다가 먼지를 마시고는 콜록거려야 했다.
울렁거리는 속 때문에 주먹으로 가슴을 몇 번 퍽퍽 친 민재는 주위를 살피다 대각선 방향에 쓰러지듯 누워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어디를 다치셨나요?”
“으….”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은 초점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의사소통이 힘들어 보였다. 민재는 남성의 몸을 살피다가 재킷 안의 셔츠가 젖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상의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남성의 옆구리는 크게 찢어져 있었다. 셔츠가 어두운색이라 정확한 파악이 어려웠지만 손을 대면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질 정도로 출혈이 심했다.
민재는 망설이지 않고 남성의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능력을 사용했다.
민재의 손에서 빛이 번져 나오며 남자의 상처가 눈에 띄게 좁아졌다. 점점 아물어가던 상처는 완전히 봉합되어 살짝 붉은 자국에 불과해졌다. 이내 그것마저 옅어지기 시작했다.
으…. 다시 한번 남성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상처가 깔끔하게 사라지자 민재는 손으로 남성의 눈꺼풀을 살짝 올려 동공을 확인한 후 머리 쪽에도 능력을 사용했다.
“뇌 손상이 있을까 싶어 우선 힐을 주입해 드렸는데, 이미 출혈이 많았기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겼을 수 있어요. 검사는 받아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금 있으면 구조대가 올 테니 기다리세요. 그때까지는 괜찮을 겁니다.”
민재는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했다. 의식이 가물가물한지, 남성은 몽롱한 눈을 한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민재는 감사 인사에 답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바람에 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눈가가 따가웠다.
먼지 속으로 걸어가는데 알림음이 울렸다. 문자 왔숑! 민재는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롸져.
두 글자의 답이었다. 빠져 가지고. 중얼거린 민재가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가이드님!!! 어디 계세요!! 도와주세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전에는 가만히 있으라더니 이제는 도와달란다. 그것도 지 말마따나 ‘가이드’한테.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정신머리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민재는 먼지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여자의 다리를 누르고 있는 구조물은 철근이라기에는 두께가 좀 두툼했다. 벽이었던 콘크리트 구조물과 그 옆의 철근이 뭉친 채 그대로 무너져 여자를 깔아뭉갠 모양이었다.
멍청한 에스퍼는 그 구조물을 들어 올리려고 낑낑거리며 민재를 반겼다.
“가이드님!! 와주셨군요!”
냅다 날아와서 구조물을 들어 올리긴 했는데 구조할 시민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라 이도 저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민님…! 조금 움직이실 수 있으실까요?”
“아뇨! 못 하겠어요…!”
좌측 허벅지 아래가 깔려 있었던 여성은 고통 때문에 계속 울고 있었다. 민재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시민을 붙잡고 물었다.
“다치고 얼마 정도 지난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한참…? 너무 아파요…!”
시민의 눈에선 눈물이 거의 쏟아지듯 나오고 있었다.
“가이드님, 시민분 좀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꼬마 에스퍼가 낑낑거리면서 물었다. 오른쪽 발등도 찍혀 있는데 어떻게 그냥 들어서 옮겨? 민재는 고개를 돌려 꼬마 에스퍼를 보며 말했다.
“버텨.”
긴급한 상황이라 싸늘하게 말이 나갔다. …네. 조금 당황한 듯한 꼬마 에스퍼의 답이 들려왔다.
“시민님, 제가 지금 응급처치를 하려면 바지를 조금 걷어 올려야 해요. 괜찮으신가요?”
민재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시민을 확인한 뒤 민재는 바지를 조심스레 걷어 올렸다. 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민재는 숨을 삼켰다. 상처가 깊고 심각해 출혈도 많았지만 다행히 아직 괴사가 진행된 건 아니었다. 괴사가 진행되면 능력 사용을 많이 해야 하고, 자신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상처 옆쪽에 손을 대고 능력을 사용했다. 옅은 빛이 다리 쪽을 감싸며 은은하게 번졌다.
상처가 점점 아무는 것을 본 꼬마 에스퍼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품하는 하마처럼 입을 벌린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어…? 어어어?!”
민재가 시민의 상처가 아문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안아 올려 철근이 쓰러져도 닿지 않을 위치에 앉혀둘 동안, 꼬마 에스퍼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줄곧 민재를 가이드라고 부르더니 놀란 모양이었다.
“뭐 해? 이제 내려도 돼.”
민재가 말하자 에스퍼는 구조물을 받쳐 올리고 있던 손을 빼고 앞으로 몸을 뺐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민재를 가리켰다.
어디서 삿대질이야. 민재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쿠궁-! 쩌저적!
“어어어어어어?!”
에스퍼의 등 뒤로 커다란 구조물이 쓰러졌다. 그리고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큰 목소리도 다시 울렸다. 어어어어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