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히어로.
지환은 언제나 장래 희망을 적는 칸에 그렇게 적었다. 어릴 때 히어로와 빌런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을 접한 뒤로는 언제나 히어로가 되는 게 꿈이었다. 어린 지환의 눈에는 사람을 구해주는 히어로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멋있어 보였다.
초등학생 때는 모든 선생님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환을 다독였다. 그럼, 지환이는 히어로가 될 수 있지요!
중학교 담임 선생님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지환을 한 번, 장래 희망 기재란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부모님 서명만 받아 와.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지환을 쳐다보고는 한숨을 쉬시더니 장래희망란을 수정해서 제출했다. 센터 공무원 지망. 에스퍼나 가이드로 발현하지 않았지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주로 지원하는 곳이었다.
자신의 학생기록부에 기재된 장래 희망을 확인한 후 지환은 담임 선생님을 찾았다.
“아닌데요.”
대뜸 아니라는 말에 선생님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아니야 임마.
“공무원 지원 아니에요. 히어로인데요. 제 장래 희망.”
지환의 말에 선생님은 ‘너 발현했어?’라고 물었다. 18살이 넘으면 발현 가능성이 없다며, 에스퍼가 되는 건 포기하라는 말도 함께였다.
선생님은 철없는 놈 보듯이 지환을 바라봤다.
“대학. 안 갈 거야?”
선생님은 물었다. 지환이 부모님한테도 들었던 질문이었다. 대학은 나와야지. 대학 안 나온 히어로도 있다니. 영화 봐라. 히어로는 다 똑똑해. 지환은 그 말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제가 본 히어로는 사람만 구하고 다녀서 대학 나온 건지 모르겠는데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환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았다. 조용히 해. 이 화상아!
그럼 경찰이나 소방 공무원 쪽으로 지원해 보자. 선생님은 마지막 보루로 지환에게 그나마 히어로에 ‘가까운’ 전공을 내밀었다. 지환은 고개를 끄덕였고 부모님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망의 수능 날, 지환은 가방을 메고 달리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간당간당하게 시험장에 입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참고 달리던 지환은 급하게 몸을 멈춰 세웠다.
도로 한복판으로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주위를 급하게 둘러보았지만 부모로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도 섣불리 도로로 뛰어들려고 하지 않았다. 도로는 6차선으로 너비가 넓었다. 시속 80k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속도로 빠르게 달리는 차들이 대부분이었다.클랙슨 소리와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가방을 던지고 지환은 도로로 뛰어들었다. 이상하게 다리가 가볍고 몸이 재빨랐다. 순간 지환은 몸이 붕붕 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브레이크를 밟은 차가 굉음을 내며 아이에게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환은 빠르게 아이를 낚아챘고-
날았다.
허공에 뜬 몸에 놀라 버둥거리던 지환은 아이를 놓치지 않게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허공에 발을 내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첫 비행인데도 지환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지환은 스스로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날아오르는 것에 익숙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공중에서 지환은 자유로웠다.
도로가로 돌아온 지환의 곁으로 한 여성이 달려왔다. 내가 사람을 구했어. 지환은 믿기지 않았다. 심장이 환희로 세차게 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여성은 지환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지환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그때 지환의 입에서 무언가 울컥 튀어 나갔다. 바닥으로 빨간 피가 쏟아졌다. 지환의 몸이 덜덜 떨렸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여성이 지환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채듯 데려갔다. 다소 다급한 손길이었다. 미안하다는 말이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 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무슨 일이죠? 물어보려던 지환의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
“S급이에요. 아주 귀한 등급이네요. 축하드려요.”
가이드의 태도는 축하한다고 하기엔 꽤 차분하고 딱딱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것들은 지환의 기쁨을 막을 수 없었다.
지환은 기뻐 날뛰고 싶은 기분을 애써 참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더니 에스퍼가 되었다고 축하를 받았다. 그것도 그냥 에스퍼인가, 무려 S급이었다.
지환은 남몰래 자신의 볼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지환의 눈에 기쁨의 눈물이 고였다.
지환은 파란색 점프슈트를 받았다. 이따금 신문기사에 등장하는 히어로 센터의 상징이자 유니폼이었다.
잠시 후, 지환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작은 카드를 받았다. 주민등록증과 유사한 구조였다. 등록번호도 있었다.
“새로 발급된 신분증입니다.”
지환은 자신의 새로운 신분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에스퍼 등록증이라는 글자가 상단에 박혀 있었다. 드디어. 지환은 기쁜 마음을 곱씹으며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배정받은 훈련생 전용 숙소로 가기 위해 본부 건물을 막 벗어나기 시작했을 때였다. 엄청나게 큰 소리로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1층 복도에서는 붉은빛 조명도 번뜩이고 있었다.
불이 난 건가? 지환은 순간 당황해 몸을 움츠렸다.
“여보세요.”
그때 어디선가 여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상황에 여보세요? 지환은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대각선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검은색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뒷모습이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귓가에 가져다 댄 핸드폰이 보였다.
“경보 끄세요. 그냥 내가 갈 테니까.”
시끄러운 경보음과 붉은 조명. 그런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남자는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
남자의 말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 경보가 해제되었다. 시끄러운 경보음도 사라지고 조명도 원래의 흰색으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와. 지환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남자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본부 건물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앞으로 누군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고, 남자는 그와 함께 날아올랐다.
남자가 사라지고도 지환은 한참을 로비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갈 테니까.”
그 말이 계속 떠올랐다. 자신이 가면 해결된다는 확신이 있는 거겠지. 그 사람은 굉장히 유능한 사람처럼 보였다. 여유가 철철 흐르는 사람.
멋있다. 지환은 생각했다. 자신도 곧 저렇게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나중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같이 일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지환은 설레는 마음으로 정식 에스퍼가 된 자신의 활약을 상상해 보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지환은 그날 자신이 화재경보인 줄 알았던 것이 출동 명령 경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경보를 듣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모자를 눌러쓴 사람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지환은 히어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