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49화 (248/250)

외전 2-7화

“하늘이 뒤집어져도 그런 적 없고, 그럴 일도 없어. 절대 없어. 그냥 내가 헛소리한 거야. 잘못했어.”

“그리 사과를 하니 조금 더 마음이 아픈 것 같아.”

“…….”

시오한이 연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뽀얀 입김이 피어올라 흩어지니, 아스라한 분위기까지 얹어졌다. 접싯물이 있으면 코라도 박고 싶다. 이도하가 제 입을 탁 때렸다. 처연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있던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입이 방정이다. 진짜 입이 방정이야. 그냥 떼 버릴게.”

“화이람- 이런.”

그가 재차 입을 때리려는 이도하의 손을 얼른 잡아챘다. 책망하듯 가늘어진 눈길에 이도하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아니면 뭐, 입으로 때리든……가. 음.”

뭐에 홀린 듯 뻔뻔하게 또 한 번 더 헛소리를 하던 이도하는 뒤늦게 수치를 느꼈다. 망할. 염병할. 그가 속으로 험한 말을 읊조렸다. 얼굴이 화끈해서 이대로 눈밭에 파묻혀 버리고 싶었다.

시오한이 웃지도 않고 쳐다보고 있으니 머리까지 뜨거워졌다. 진짜 잘못했다. 그가 한 번 더 웅얼거리려는 순간이었다. 시오한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반짝 웃었다. 서늘한 입술이 입에 닿았다.

입맞춤은 아주 농밀하고 짙었다. 그 와중에도 지독하게 다정해서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네가 너무 다정해서 죽을 것 같다. 이도하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지금과 같은 순간이었다. 닿고 있어도 목이 마르다. 그건 절대로 채워지지 않을 갈증처럼 느껴졌다. 이건 병인가, 돌아 버린 건가. 이도하는 문득 생각했다.

이대로는 조금 위태롭다, 싶을 즈음 입술이 떨어졌다. 이도하는 잠시 숨을 고르다, 시오한의 어깨에 고개를 떨어트렸다.

“……미안. 그런 생각 하지 마, 시오한. 내가 진짜 잘못했어.”

시오한이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다행히-”

그가 말했다.

“나보다 예쁜 사람은 없을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도하도 웃어 버렸다.

“암요. 없지, 그런 사람은.”

이미 이 시대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시오한인데.

“그냥, 갑자기 당신도 질투를 하나 싶어서 해 본 헛소리야.”

다시 손을 잡고 걸으며, 이도하가 궁색한 변명을 해 보았다. 기자를 안다는 말에 그가 관심을 보이기에 문득 든 아주 충동적인 호기심이었다.

“화이람, 그대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해. 나는 내가 그대의 곁에 없는 모든 순간을 질투하는걸.”

부지런히 걸은 덕에 그들은 어느새 이도하가 목표했던 곳에 도착해 있었다. 온실이었다.

시오한이 흥미로워하는 기색으로 문을 열어 주었다. 한 발만 들어서도 따뜻한 공기가 온몸을 순식간에 감싸 안았다. 촉촉한 풀 냄새와 꽃향기가 향긋하다. 둥그스름한 천장과 따뜻한 내부 공기 덕에 천장에는 눈이 하나도 쌓이지 않아 하늘이 그대로 다 올려다보였다. 달이 밝아 그 하늘에는 별이 그다지 보이지 않았으나…….

지천으로 깔린 조그만 꽃마다 별 가루를 뿌린 듯 반짝거리고 있었으며, 거목에는 과실처럼 가득 달린 조명이 빛나고 있다. 시오한은 제가 지시한 적 없는 온실의 색다른 변모에 이도하를 돌아보았다. 이 온실은 황제의 소유라 시오한이 아니고서는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가 아니라면 그의 계약자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도하가 어색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이끌려고 했는데, 중간에 좀 망해 버렸다. 제 손으로 엎지른 격이라 탓할 사람도 없다. 어디 이런 걸 해 본 적이 있어야지. 멋쩍게 마른세수를 몇 번 한 이도하가 나무 아래로 시오한을 이끌었다. 그가 장갑을 벗었다. 드러난 맨손의 약지에는 반지 두 개가 끼워져 있었다.

“……케이스에 넣어서 좀 멋있게 주고 싶었는데, 잠깐 방심하면 잃어버릴 것 같더라고.”

이도하가 하나를 뺐다. 잠깐 머뭇거리다, 반지를 들어 보이며 씩 웃는다. 반지는 묘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우아한 물결 모양 같기도 했으나, 자세히 보면 그건 글씨였다. 획들이 교묘하게 붙어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화이람 오르페노스.

시오한은 그 글자를 알아보았다. 그건 그의 글씨체였다.

“저번에 당신이 써 준 내 이름.”

이도하가 제 손에 낀 또 다른 반지를 보여 주었다. 그것 역시, 그의 글씨체였다. 지금도 그의 손목에 묶여 있는 연화지의 글씨.

시오한 오르페노스.

“내 세계에서는 이런 거 많이 하거든. 커플링이라고. 이리스티리움에서는 장신구 안 끼는 거 아는데,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밖에 없더라.”

멀거니 선 시오한의 손을 가져가며, 이도하가 계속 떠들었다. 내내 끼고 있었던 탓에 따뜻하게 온기를 품은 반지가 시오한의 손가락을 타고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의 손에 맞춘 것처럼 아주 꼭 맞았다.

그가 자는 동안에 열심히 손가락 사이즈를 재 본 결과였다. 마디가 좀 굵은 제 손과는 달리 시오한의 손은 무슨 펜으로 그린 것처럼 매끄러워서 유독 반지가 돋보였다. 이도하가 뿌듯함에 웃었다. 예쁘다.

“빼면 쓱싹 사라지는 거 알지? 특기로 주조한 백금이니까 녹슬 일도 없어. 그냥 평생 끼고 있으면 돼.”

반지가 끼워진 시오한의 손만 만지작거리던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그를 보고 있었다.

“생일 축하해, 시오한.”

그가 말했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

“…….”

시오한은 아무 말이 없었다. 가만히 쳐다보기만 한다. 제 손에 끼워진, 아마도 그에게는 낯선 감촉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그러나 이도하는 심장이 하도 두근거려서 가슴이 좀 숨이 찰 정도였다. 속이 울렁이는 게 아주 범상치가 않았는데, 예전 같으면 이게 무슨 일인가, 했겠으나 이제 알았다.

이건 시오한의 감정이었다. 감정을 숨기고 다스리는 게 너무 익숙해 좀처럼 느낄 일이 없는 그의 감정이다. 그가 기뻐하고 있었다.

“당신 좀 많이 기쁜데?”

중간에 좀 삐끗하긴 했지만, 어쨌든 한참을 고심했던 선물을 성공한 이도하는 신이 났다. 감격해서 말을 잃은 시오한이란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라 아주 귀엽기 짝이 없었다. 좀 더 놀려 보려던 이도하는,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도하를 안은 채, 시오한이 말했다.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이도하가 입을 다물었다.

“다행이야. 말로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니.”

“……뭐 내가 선물이니, 진짜 그렇게 퉁 칠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목소리가 덩달아 메인다. 이도하가 괜히 농담을 던져 보았고, 시오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어깨가 흔들리는 그 웃음이 좋아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대를 달라 하려 했지.”

“뭐?”

“생일 선물로, 그대를 달라고 하려 했어.”

이도하의 눈에 지진이 일었다. 진짜 그건 좀 심하게 날로 먹는듯싶어 폐기한 아이디어였는데. 박스에 들어가서 목에 리본 따위를 매고 짜잔! 하는 걸 생각하니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더랬다. 설마 그게 정답이었나. 시오한의 취향이……?

“에트레제의 서궁에 가면, 그곳에 황가의 계보가 있어.”

시오한이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안다. 이도하도 궁을 돌아다니다 가 본 적이 있었다. 홀처럼 아주 넓은 전시실에, 역대 황제의 초상화들이 그들의 황후와 함께 나란히 걸려 있는 곳. 황가의 모든 일원들이 기록된 계보야 따로 보관되어 있고, 오직 황제와 황후의 초상만이 나란한 곳.

잠시 이도하의 머리칼에 가만히 입술을 누르고 있던 시오한이 그를 보았다.

“……그대만 허락한다면, 내 이름 옆에 그대의 이름을 적고 싶어, 화이람.”

“…….”

“이걸, 그 허락으로 받아도 될까?”

이도하의 손가락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깍지를 꼈다. 손목 안쪽을 부드럽게 쓸고 내려와 단단히 맞물린 손가락에 약지에 낀 반지가 부딪쳤다. 쿵, 고양이가 애정을 표현하듯 그가 이마를 맞대 온다. 다정하게 휘어진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은 비단 별 가루 같은 조명 때문은 아닐 터였다.

“……당신 이미 허락받은 얼굴인데?”

너무 가까워 빛무리처럼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가 더 깊이 휘어졌다.

“응.”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응, 화이람.”

쪽, 시오한이 입을 맞추었다. 이도하가 애써 입가를 갈무리했다. 이미 제 답을 알면서 꼭 이리 허락을 구하는 것도, 재촉하듯 입을 맞춰 오는 것도 모두 몹시 귀엽다. 좀 더 이 순간을 음미해 보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단추를 잠그거나 끄르는 것처럼, 그에게는 사소하게 낯설 일들을 절 위해 매번 서슴없이 서툰 그가 벅차서.

쪽- 다시 그가 입을 맞춰 온 순간, 결국 이도하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닌 척하는 것도 성미가 맞아야 하는 법이었다.

“기다릴게.”

“아, 하지 마.”

웃으면서도 이도하가 질색을 했다.

“기다리지 마. 다시는 기다리지 마. 그런 거 하지 마. 언제 가, 지금 가?”

“하하.”

“이제 보니 그래서 바빴구나.”

안 그래도 바쁜데 무슨 회의를 그렇게 뻔질나게 하는가 했더니. 나이가 지긋한 노대신이나 귀족들이 참석하는 자리들은 다 명목상이고 고루한 허세일 뿐이라며 일리온 시타는 신랄한 얼굴로 씹어 댔었다. 이리스티리움은 역사가 긴 만큼 그런 허울도 많았고, 그나마도 아칼테케 황제 때 많이 쳐 냈으나 아직도 남았다며.

종종 그런 자리를 끊어 먹는 데 이도하를 치트키처럼 알차게 써먹던 일리온 시타가 이번에는 별로 그런 기색이 없기에 그래도 이번에는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가 했더니만.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남자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다른 세상의 사람이다. 그런 이를 그리 계보에, 서궁에, 황제의 초상화 옆에 올린다는 건 아무리 시오한이 유례없이 강력한 황권을 휘두르는 황제라도 반발에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맹약자였다. 그들을 묶어 놓은 약속은 그 어떤 기록이나 형식보다 더 굳은 맹세였으며 오직 죽음으로야 끝날 영원. 하니 굳이 그럴 필요 없었을 텐데도.

이도하는 연회장에서 잠깐 눈이 마주쳤던 상서령을 떠올렸다. 아무르 후작, 시오한의 외조부.

그가 고개를 숙였더랬다. 대쪽같이 꼿꼿한 그 노인은 원래도 이도하에게 예우를 지키는 편이었으나, 그건 황제의 계약자로서의 예우였다. 시오한에게 국혼을 올려야 한다고 매번 주청하던 그가 이번에는 뭔가 좀 묘하게 다르다 싶었는데…….

“어느 하루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에는 좀 그러고 싶었어.”

생각을 관철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으나, 성절-그의 생일에 맞추느라 바빴다는 말이다. 그가 자랑하듯 슬쩍 어깨를 으쓱거렸고, 그걸 보니 이도하도 뽐낼 게 있었다.

“왜, 난 완전 했는데.”

별안간 새된 소리가 길게 이어지더니, 펑, 하고 폭죽이 터졌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색색의 빛들이 주변을 환하게 비추었다. 이도하가 화려한 폭죽이 수놓은 하늘을 뿌듯하게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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