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48화 (247/250)

외전 2-6화

“뭔 나라가 생일 선물로 영토를 줘. 통도 크다.”

이도하가 말했다. 황제에게 선물을 올리는 절차가 모두 끝난 뒤였다. 모두가 다 나서서야 사흘 밤낮을 새도 다 끝나지 않을 테니 추려진 몇몇이었는데도 근 한 시간이 지났다. 선물이라 읽고, 공물이라 읽는 게 더 마땅할 것들을 진상하는 자리는 황제와 일대일로 몇 마디나마 나눌 수 있는 귀한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책략이야.”

“응?”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도하의 손에서 술잔을 가져가고 대신 물 잔을 쥐여 준 시오한이 말했다. 시오한은 제게 빼앗긴 술잔을 쳐다보는 이도하의 입에 치즈 조각을 넣어 주었다.

“두 나라가 그 영토를 탐내고 있었거든. 올레이르는 조그만 왕국이라 두 나라의 싸움에 끼면 남아나지 못할 게 자명하니, 생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내게 바쳐 버린 거지.”

이도하는 치즈를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이건 상큼하고 조그만 과일 조각도 아삭하게 씹혔다. 맛있는데? 이도하가 썩 마음에 든 눈치이자, 시오한이 하나를 더 그의 입에 넣어 준다.

술렁임이 미풍처럼 한차례 홀을 쓸었다. 급하게 움직이느라고 삐죽 나온 이도하의 머리칼을 시오한이 다듬어 주었을 때도, 긴 소매에 익숙하지 못한 이도하가 과일 통에 소매를 담글 뻔한 걸 잡아 추슬러 주었을 때도 비슷했다.

타국의 사절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층 더 반응이 격렬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리스티리움의 대신들은 알 만하다는 얼굴을 한다. 그들은 그래도, 봐도 봐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던 황제의 저 ‘시중’을 몇 번 봐 온 탓이었다.

“언제나 등장이 화려하십니다.”

가령, 이제는 그 모습을 즐기는 지경에 온 시종장 일리온 시타 백작처럼.

“폐하, 오르페노스 공.”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이도하가 그를 청년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던, 나이보다 훨씬 젊은 얼굴 한가득 즐거운 웃음을 띤 채였다. ‘되게 웃음이 많네요.’ 일을 등한시하는 법이 없는 성군 아래에서 딱 그만큼 격무에 시달리는 시종장치고는 늘 저리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이도하가 물은 적 있었다. ‘요즘처럼 행복하게 출근하는 때가 또 없습니다.’ 그가 그랬던가. 여전히 그 싱글벙글 즐거워하는 얼굴로.

하기야. 그는 어제도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일리온 시타의 말에 따르면- 어느 노대신들과의 관례 행사를 이도하 효과로 시원하게 초 쳐 놓은 참이었다. 한번 시작되면 시종장조차 함부로 중간에 끼어들 수 없는, 별것 아니지만 그 노대신들에게는 거의 목숨쯤 되는 그런 자리에 이도하를 쑥 들여보내 시오한을 빼내는 식으로. 처음부터 일리온 시타가 꽤 마음에 들었던 이도하는 그런 일에 있어서 그와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시오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이도하를 망종이 아니라 그리해도 마땅한 인 외의 신쯤으로 만들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이도하에게 뭐든 안 된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도하가 궁의 어디든 제 방 마냥 들락날락해도 황제가 마냥 흐뭇한 얼굴로 보고 있으니, 대신들이야 할 말이 없었다.

“좀 그랬어요?”

이도하가 슬쩍 물었다. 그러나 다른 수가 없었던 걸 어떡하나. 소환은 무조건 계약주의 곁으로 지정되어 있는걸. 애초에 지각했을 때부터 예정된 사태였다.

“멋졌습니다.”

언제나 이도하와 죽이 잘 맞는 일리온 시타가 엄지손가락을 슥 들어 보였다.

“감축드리옵니다, 폐하.”

그리고 그는 다시 한번 시오한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좀 더 허리까지 숙여서. 축하에 꽤 진심이네. 어차피 물건이야 시오한에게 의미 없다. 생일 선물도 무슨 일거리처럼 떨어지는 마당에 이런 진심 어린 축하가 낫지. 이도하는 별생각 없이 만족스러워했다.

“한데 두 분, 미리 도망가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일리온 시타가 짐짓 태연하게 물었다. 그러면서 잠깐 시선을 주는 것이, 이건 분명 신호였다. 이렇게 빨리? 잠깐 당황한 이도하가 냅다 그 신호를 낚아챘다. 곧 인사니 뭐니 하며 하나둘씩 밀려올 것이 뻔한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다 타이밍을 놓치고 싶지도 않고.

“그래. 지금 도망가자, 우리.”

“도망?”

시오한은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재미있어하는 기색으로 물었고, 이도하가 슬슬 그를 당겼다. 석상이나 조각이나 하여간 인간 같지 않아 보이던 황제가 부드럽게 웃는 인간으로 변하자, 사절들과 대신들이 인사를 해 오려 눈치를 보고 있었다.

“오늘 당신 생일인데 우리끼리 놀자고. 이러다가 날 가겠어.”

“아무렴요.”

일리온 시타가 추임새를 넣었다. 이도하가 당기는 대로 끌려가는 시오한은 반항의 기미도 없었다. 어깨를 으쓱한 그가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하면 한번 전통적으로 도망가 볼까.”

눈웃음 지은 시오한이 고갯짓 한 쪽은, 커튼이 늘어진 창 쪽이었다.

“근데 당신, 오늘 힘 좀 많이 줬다?”

아주 당당하게 도망친 홀 밖은 정원이었다. 홀이 1층이라 테라스는 없었지만, 이도하가 대충 던진 말대로 날씨는 좋았다.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어 공기가 이전보다 더 싸늘했지만, 하늘은 무척 맑았다. 휘영청 뜬 달이 밝아 고아하게 흐르는 구름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

뜬금없는 말에 시오한이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다, 이내 아주 눈을 접으며 아주 화사하게 웃었다.

“그대에게 잘 보이려고. 마음에 들어?”

이 사람이 정말. 너무 마음에 든다. 오늘의 생일자인 시오한은 눈이 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평소 흰 계열의 옷을 즐겨 입는 것과 달리 그는 오늘 검은색에 짙은 청색이 어우러진 옷을 입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옷이 시오한과 아주 그린 듯이 어우러져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었다. 아침에는 이렇게 입고 있지 않았었는데.

게다가 그렇지 않아도 화려한 황금색 머리칼은 특히나 더 눈에 띄는 데다가 뭘 한 건지 또 유난히 반짝거린다. 얼굴에 뭘 한 건가, 뭐가 다른 건가. 가봉할 할 때 이미 한 번 봤지만 그 때와도 달랐다. 그냥 오늘 유난히 아찔하다.

“그대도 아주 잘 어울려.”

이도하는 누가 봐도 그와 한 쌍으로 맞춰 입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이리스티리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동안 이도하는 시오한의 평상복을 제 옷처럼 입고 다니기도 했으며, 시오한이 그를 위해 맞춘 이리스티리움의 옷들을 편하게 여기저기 입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차려입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옷은 처음이라 영 어색하기도 하고, 치렁치렁한 것이 불편해 다음에는 입지 말아야겠다, 했는데. 시오한과 완전히 한 쌍으로 맞추어진 걸 본 이도하는 마음을 달리 먹고 있었다.

“한데 어찌 장갑을 끼고 있어?”

이도하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오한의 말대로 그는 가죽이 아주 얇은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시오한의 것과 흡사한 화려한 검은 옷에 어울리지 않을 것도 없지만, 굳이? 싶은 장갑이었다.

“어, 손 시려서. 홀에 계약자들 많더라.”

대충 얼버무린 이도하가 말을 돌렸다.

“그, 기자도 있던데. 난 그 사람이 특기자인 줄도 몰랐어.”

주변에 관심이 없는 이도하의 눈에 그녀가 들어온 것은 우연이었다. 은색의 고운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검은 머리칼에 잠시 눈길이 머물고 보니, 낯이 익은 것이다. 가만 보니 그녀는 몇 번 마주친 기억이 있는 기자였다. 어느 왕국의 대사라는 이 옆에 선 그녀의 드러난 어깨에는 새까만 계약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명이 눈에 띄고 나니 몰랐던 이들이 하나둘씩 더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세오는 물론이고, 아이라에서 오다가다 본 몇몇 계약자들부터 시작해서 어디서 본 것 같은 기자 몇이 더 있었으며, 방송에서 얼굴이 많이 팔린 타국의 유명 계약자들도 있었다.

“누구이기에?”

“응?”

“그대가 기억하는 기자라 하니.”

“그냥, 몇 번 봐서. 이름도 몰라.”

이도하가 말했다.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김…… 무슨 기자였던 것 같은데. 정말 이름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문득 이도하가 시오한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고 있었고, 다른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도하는 조금 희한한 마음이 들었다. 눈을 잘 쓸어 놓은 길에서 훌쩍 벗어나 눈 위로 이도하가 시오한을 이끌었다. 시오한이 어리둥절하게 그를 보았다.

“길 따라 도망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과연, 그렇네.”

웃으며 시오한이 그를 따라 눈을 밟았다. 긴 옷자락이 눈 위에 쓸리고, 홀의 음악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가운데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도드라졌다.

“시오한, 있잖아.”

“응.”

호기심이 고양이도 죽인다는데. 이도하는 분명 제가 이 말을 하고 후회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입이 근질거렸다. 머리에서는 괜한 짓이라며 허튼짓 말라 경고음을 빽빽 울리는데도 입에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내가 만약에.”

닥쳐라, 이도하. 그러나 입이 멋대로 쫑알대려는 움직임이 느껴진다. 제가 아까 술을 한잔했던가. 이도하는 그 순간 생각했다.

“내가, 다른 사람이 좋- 예쁘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이성의 도움으로 중간에 브레이크가 한 번 걸린 이도하가 말을 씹었다. 이도하를 따라 눈밭을 걸어 보던 시오한이 눈을 들었다. 날이 날이니만큼 정원 여기저기에도 조명이 밝혀져 있어, 어두운 가운데도 그의 얼굴이 훤했다. 달빛이 비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친 그 순간부터 이도하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괜한 말인 걸 알고 있었지만, 진짜 괜한 말이었다.

“……글쎄.”

눈치를 보는 이도하를 본 시오한이 슬며시 웃더니, 다시 걸음을 옮긴다. 뽀드득, 뽀드득, 이도하는 그 소리에 제가 밟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건 정말 살면서 제가 해 본 헛소리 중에서 으뜸이었다. 이도하가 알아서 자진 납세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혹 그대에게 그런 마음이 생긴다면, 나는 모른 척하지 않을까.”

“……그, 시오한.”

“다시 그대의 마음에 들어 보려 애쓸 것이고.”

이도하의 말끝이 떨렸다. 머리라도 박고 싶었다.

“만약 그대가 그런 마음을 고백한다면, 그때는…… 빌고 애원하겠지.”

“…….”

“부디,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잘못-”

“그러나 진정 그게 그대의 행복이라고 한다면, 내게 어쩔 도리가 있겠어.”

시오한이 다시 이도하를 돌아보았다. 옅게 웃는 그 얼굴에, 이도하는 제 혀를 다 씹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가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이도하가 재빨리 말했다.

“잘못했어.”

이도하가 잽싸게 말했다. 시오한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여전히 웃고 있었는데, 이도하는 그 어떤 말을 들은 것보다 더 정신이 혼미했다. 마구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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