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47화 (246/250)

외전 2-5화

“……왜 웃어.”

“그리 쳐다보니 부끄러워서.”

“부끄럽기는 무슨…….”

기도 안 찬다는 듯 이도하가 코웃음을 친다. 눈은 반쯤 감긴 채였다. 그러더니 찰나 동안 무슨 꿈을 꾼 건지, 무슨 생각이 갑자기 머리를 스친 건지 혼자 픽 웃는다. 다시 번쩍 눈을 뜬 이도하가 가늘게 시오한의 옷깃 사이를 노려본다.

꽤 노골적인 시선 끝에 그가 다시 눈을 감더니 또 웃음을 흘렸다. 꽤 흐뭇해 보이는 미소였다. 야단났네. 시오한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잠깐만 보려고 했는데. 그는 도저히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얼마나 남았어? 다 해 가?”

“음. 거의.”

시오한이 온화하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닐 터였다. ‘거의’의 개념은 상대적이니. 그러나 이대로는 끝을 내기가 요원하긴 했다.

“자, 화이람.”

“…….”

눈을 감은 이도하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창밖으로 모든 소리를 다 덮는 듯 눈이 내리고, 벽난로에서 장작이 불꽃을 튀긴다. 영락없이 잠든 사람 같던 이도하가 별안간 나른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꿈지럭거리며 시오한의 허벅지에 이마를 붙였다.

“자장가, 불러 주면.”

“…….”

이번엔 시오한이 입을 다물었다. 눈을 감은 채 이도하가 씩 웃었다. 안 봐도 알겠다는 웃음이다. 그가 슬쩍 한쪽 눈을 떴다. 역시나, 시오한은 좀 싫은 기색이었다. 그럴 때면 시오한은 제대로 내색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처럼 서툴고 어색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꼭 어쩔 줄 모르겠는 것처럼. 늘 태연자약한 시오한에게서는 참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춤이 능숙한 것과는 별개로, 또 몹시 의외로 시오한은 노래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좋아 대충 흥얼거리기만 해도 반은 먹고 들어갔으며 음정도 꽤 정확한 편에 속했는데 어쨌든. 선호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도하의 웃음을 본 시오한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네. 그냥 같이 자련다.”

이도하가 말했다. 늘어선 서류들이 다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릴 모양이었다.

“내일은 나가지 말자.”

“……응, 그럴까.”

그가 흘긋 창밖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예쁘네.”

시오한이 말했다. 조곤조곤, 침전에 늦게까지 느린 말소리가 이어졌다.

다음 날, 느지막이 잠에서 깬 이도하는 침대에서 좀 더 미적거리며 하얗게 눈이 내린 날 벽난로 앞에서 뒹구는 여유를 즐겼다. 그가 일어나는 것만 보고 시오한은 잠깐 빠트릴 수 없는 정무를 보러 간 와중이었다. 황제의 명으로 배달된 바구니에 소복이 쌓인 새콤한 과일을 양껏 까 먹은 뒤 이도하는 꿈질꿈질 침대를 나섰다.

눈이 얼마나 많이 왔는지, 무릎까지 아주 다리가 푹푹 들어갔다. 이도하는 재난 영화를 찍는 기분으로 눈을 헤치고 걸어 온실에 도착했다. 바깥은 적막하기가 이를 데 없고 온통 새하얘서 눈이 부시기까지 한데, 이곳은 여전히 다른 세상인 양 푸르렀다. 이도하는 잔뜩 뭉개진 꽃밭을 못 본 척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곰 인형은 온데간데없었다. 침전에도 없었던 걸 생각해 보면 사라진 게 틀림없었다.

이러면, 역시 그거밖에 없겠지.

팔짱을 낀 채 이도하는 고심했다. 눈이 쌓이다 못해 흘러내려 구름이 꽉 찬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유리 천장, 그 아래 넓게 드리워진 거목. 선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 주변을 훑은 이도하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일주일은 정말로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그 일주일이 얼마나 정신없고 산만했는가 하면, 아침에 눈을 뜬 이도하가 오늘이 그 당일이라는 것도 깜빡할 정도였다.

이도하가 보기에 관리들이고 궁인들이고 할 것 없이 다들 내색하지 않고, 아주 차분하게 다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웬 관리가 우아하고 급한 걸음걸이로 궁을 가로지르다 난데없이 화병에 든 물을 제 머리에 쏟아붓는 것도 보았고, 옷을 뒤집어 입은 것도 보았으며, 어느 궁인이 침실에 들어오다 제가 열던 문에 머리를 박는 것도 보았다.

물론 정신이 팔려 있던 일이 있기는 했으나, 어쨌든 하는 일은 없던 이도하는 그 틈에 있으려니 저까지 혼비백산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시오한만 홀로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정확히는 평온하게, 혼란스러운 기색 없이 그저 두 배쯤 더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원래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거기에 성절과 관련된 업무들이 더 추가된 탓이었다.

그 와중에 또 논의할 게 뭐 그리 많은지, 연일 회의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이도하는 제가 다 입이 아프고 머리가 아팠다. 시오한이 어째서 성절을 제 생일 같은 개념이 아니라 그저 번거롭고 귀찮은 일거리 정도로 생각하는지, 어째서 아칼테케 황제를 비롯한 그의 선대가 ‘쓸데없는 놀음’이라며 연휴를 줄였는지 잘 알 것 같았다. 그리 바쁘니 매일 보는 얼굴도 새삼스러울 정도였다.

성절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날까지도 시오한은 일이 밀려 있는 모양으로 바빴다. 그런 적이 없는데, 이번에는 이도하를 도무지 기다릴 시간이 없었던 탓에 잠깐 깨워 인사만 하고 나갈 정도였다. 이미 정복을 다 갖춰 입은 상태였다.

오후에 봐, 하고 그는 좀 미안한 낯으로 사과했다. 고작 그 정도로 그가 그리 미안해했으니 이도하는 지금 저는 어찌해야 될지 견적이 안 나오는 상태였다.

<다 된 거 아니에요? 멀었어요?>

잠깐 사이에 골백번도 더 재촉을 받은 장인이 몹시 짜증스러운 눈초리로 이도하를 노려보았다. 이제 더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식이었다. 어느 모로 봐도 이 세계의 옷차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화려한 옷을 입고 난데없이 나타났던 이도하를 보고 처음 입을 쩍 벌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도하는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미치겠다. 환장하겠다. 발바닥으로 연신 바닥을 두드리던 이도하는 잠깐 앉아서 기다려 볼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삼 초도 견디지 못하고 일어나 여기저기를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을 사납게 하기 시작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도 모자라 특기가 질질 새어 나오며 공방의 물건들이 두둥실 떠오를 정도였다.

<아, 5분만 더 기다려요, 5분만. 일주일을 기다려 놓고 5분을 못 참아서. 덜 된 걸 주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니요! 무슨 물건이 뚝딱하면 나오는 줄 아나?>

눈앞에 둥실둥실 떠오른 공구를 잡아 내리며 장인이 버럭 소리쳤다. 이도하는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벌렸다가, 결국 얌전히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이제 턱을 괴고 장인의 손만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봐도 다 완성된 것 같은데 뭘 자꾸 더 건드리는지 모르겠으니 이러는 게 아닌가 말이다.

시계 초침 소리만 똑딱똑딱 흐르는 가운데, 마침내 진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이도하가 벌떡 일어나려던 때였다.

<여기 있소.>

이도하가 반색을 했다. 얼른 물건을 받아 든 이도하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장인은 조용해진 제 공방에 잠시 멀거니 앉아 있다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

아름답기로 유명한 에트레제는 백색 궁으로도 불리는 만큼 전체적으로 하얀 숲을 모티브로 하고 있었다. 높은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 하나하나가 새하얀 나무처럼 조각되어 있었고, 천장과 벽면에 걸쳐서 정교하게 음각된 나뭇잎 모양에 세밀하게 박힌 조그만 보석들은 빛을 받을 때마다 은은하게 빛났다.

궁이란 곳이 원래 그렇지만, 에트레제는 특히나 허투루 만들어진 곳이 없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이 가장 절정으로 응집된 곳이라고 하면 첫째가 대전이요, 둘째가 바로 이 홀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따로 이름조차 없고 그저 홀이라고 부르지만, 그 호칭 하나로 그냥 모든 것이 설명되는 곳. 특히나 현 황제 때에 이르러서 이 홀은 더더욱 그 이름이 높아졌는데……

이 홀에 모인 사람들은 어째서 그런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현 황제에 이르러서 홀이 더욱 이름 높아진 게 아니라, 현 황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보통 관례가 그러하듯 느지막이 등장한 황제는 도저히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권좌에 앉은 그는 그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조각된 석상 같았다. 지고의 자리에 앉은 권세의 주인, 광활한 대제국의 지배자, 바래지 않을 영원한 영광. 빛나는 그런 모든 추상적인 것들을 다 모아다 형태로 빚어 놓은 것 같았다.

본래 권좌를 더 위엄 있게, 아래로 찍어 누르듯 우러러보도록 빛의 각도부터 치밀하게 설계한 곳이라 한층 더 그랬다. 황제를 계속해서 보아 온 이리스티리움의 대신들과 귀족들도 새삼 머리가 얼얼할 정도였으니, 오늘에서야 황제를 처음 마주한 타국의 사절단들은 아예 채신도 잊고 넋이 나갈 정도였다.

하여 홀의 분위기는 몹시 묘했다. 저들끼리 어울리면서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신경이 온통 황제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 사실을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가운데 황제는 그 분위기에 어울려 줄 생각도, 분위기를 풀어 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는 무료해 보였고, 무관심했다.

그는 만백성의 사랑을 받는 성군인 동시에 귀족들에게는 단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몹시 어려운 황제였다. 그런 그가 언뜻 기분이 안 좋아 보이기까지 하니, 알아서 놀라는 듯한 무관심에도 모두가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때 허공에 파직- 푸른 불꽃이 튀었다. 작은 불꽃이었지만, 아닌 척 황제에게 신경이 쏠려 있던 모두가 그 기묘한 불꽃을 보았다. 음악이 멈추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불꽃이 불어나듯 확 몸을 키웠다. 꽃봉오리가 펼쳐지듯 순식간에 허공에 펼쳐진 것은 새파란 소환진이었다.

황제가 고개를 들었다. 환한 푸른빛이 그를 비추었다. 거대한 소환진에서 모두가 다 아는 그의 계약자가 황제의 등 뒤로 끌어안듯 떨어져 내렸다. 길고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펄럭거렸다.

“……나 많이 늦었어?”

망할. 염병할. 지각한 이도하는 시오한의 어깨 위로 고개를 푹 숙인 채 물었다. 눈을 깜빡이던 시오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제 등 뒤에 찰싹 붙은 이도하를 돌아보며, 그가 속삭였다.

“기다렸지. 나 혼자 아주 외로웠는걸.”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여길 좀 보라는 듯이 홀에 즐비한 이들을 향해 슬쩍 눈짓하고, 다시 제 권좌를 눈짓한다.

“…….”

이도하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가 눈치를 보다, 시오한의 뺨을 감쌌다. 고개를 제게로 조금 돌리고, 쪽. 이도하가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도하가 씩 웃었다.

“자기야, 미안해.”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다시 음악이 흐르고, 홀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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