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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46화 (245/250)

외전 2-4화

이도하가 흐뭇하게 거대한 곰 인형을 안고 있는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는데,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선택이다.

“인형은 어찌하여?”

사진으로든 뭐로든 좀 찍어 놓고 싶다. 시오한은 이제 곰 인형의 볼록한 뱃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냥, 뭐. 귀여워서.”

“응. 그러네.”

“대전 회의는 빨리 끝났나 보네?”

이도하가 고갯짓하여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전 회의가 지지부진하게 길어지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니 이쯤이면 마칠 무렵이거나, 운이 나쁘면 한창일 거라고 생각했다.

“요새 번거로운 일들이 많이 줄었기도 하고…….”

묘하게 이도하에게 시선을 준 시오한이 곧 편안히 말을 이었다.

“그대와 놀고 싶어서.”

“합격 목걸이라도 걸어 드려야 되겠는데.”

“그대의 환심을 좀 샀을까?”

“여기서 어떻게 더 사? 지금도 가끔 죽겠다고.”

시오한이 웃는다. 그래, 저렇게 웃을 때마다 죽겠는데 환심은 무슨.

“뭐 하고 있었어?”

어우. 이도하가 시선을 돌렸다. 시오한이 들여다보고 있던 탁자 위였다. 그가 곰 인형을 안은 그대로 앉은 채 탁자 위로 손을 뻗자, 탁자 위에 있던 것들이 알아서 그의 손아귀로 스르륵 빨려 들어갔다. 오즈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기 위해 이도하는 가급적 특기를 사용하지 않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시오한의 손에 들린 것은 옅게 무늬가 들어간 두 개의 반듯한 리본이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는데 만져 보니 리본이라기에는 좀 단단하고, 또 종이라기에는 너무 하늘거린다. 리본과 종이 사이의 무언가 같았다. 부드럽고 요철이 하나 없는 게 재질이 대단히 고급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총 두 개에, 하나씩 아주 정갈한 글씨로 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시오한 오르페노스.

화이람 오르페노스.

이도하는 몹시 묘한 기분으로 그리 적힌 제 이름을 바라보았다. 다들 저를 오르페노스 공, 하고 부를 때는 이런 기분이 들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연화지야.”

시오한이 그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제 지나갈 해는 미련 없이 모두 보내 버리고, 곧 다가올 해를 맞이하는 마음을 담아서 나무에 묶지.”

그가 온실 한가운데 자리한 나무로 시선을 이끌었다. 잎이 작으면서도 많아 유독 더 푸르러 보이는 이 나무는 오천 년은 된 것처럼 아주 거대했다. 열 사람이 둘러도 감당이 안 될 것 같은 둥치에는 군데군데 푸른 이끼들이 벨벳처럼 덮여 있었고, 작은 덩굴들도 엉켜 있었다. 푸른 잎사귀들은 바람이 없는데도 물가에 있는 양 얕게 흔들리는 듯했다.

“내 처음은 뭐든 그대잖아?”

시오한이 그 잎사귀처럼 웃었다. 이도하는 갑자기 뭉클한 감정이 올라와서 목이 탁 메었다. 시오한에게서 받아 든 리본-연화지를 만지작거리던 이도하가 괜히 투덜거렸다.

“황실이 어떻게 돼먹어 가지고.”

귀한 태자로 태어난 사람이 26살 먹도록 남들 다 해 본다는 리본 하나 못 묶어 보고. 못 묶어 본 것이든 안 묶어 본 것이든 아무튼.

“지금 묶어?”

“본래는 대문 위에 묶어 뒀다가 마지막 날 쯤에 묶는 것인데…….”

시오한의 대문이라고 하면 과연 어디인가. 에트레제로 들어오는 궁문 입구인가, 그보다 앞에 있는 성벽의 입구인가, 그도 아니면 성도로 들어오는 성벽 입구인가. 이 쓸모없는 고민을 하는 대신에 시오한은 이도하의 손목을 가져갔다. 그가 연화지를 두 번 감았다. 그의 이름이 쓰인 연화지였다.

“우리는 이리 하자. 잃어버리면 한 해 동안 불행하다고 하니, 행여나 잃어버리면 안 돼. 화이람.”

시오한이 달콤하게 말했다.

“……근데 당신 묶을 줄 알아?”

시오한은 그의 말대로 뭐든 잘하는 편이지만, 이건 그의 분야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게다가 남은 꽁지가 여간 짧아 보이는 게 아니다. 시오한이 그런 힘겨운 매듭을 묶어 봤을 것 같지 않다. 손목 위에서 느껴지는 꼼지락거림이 한참 이어지자 이도하가 슬그머니 물었고, 시오한이 애쓰는 중인 손과는 달리 평온하게 대답했다.

“알다마다.”

그러나 그건 머리와 손이 합의하지 않은 대답 같았다. 꿈지럭대는 그의 손은 서툴기도 서툴지만, 아주 느리기까지 하다. 그걸 보고 있다가는 어쨌든 그의 노력을 다 수포로 돌릴 것 같아, 이도하는 그냥 애를 쓰는 시오한의 얼굴이나 구경하고 있기로 했다.

그러다가 머리칼 곳곳에 붙은 꽃잎을 하나씩 떼 주기 시작했다. 긴 머리칼 사이에 장식처럼 낀 꽃잎을 거의 다 떼 냈을 즈음, 마침내 해낸 시오한이 풀썩 그의 무릎에 쓰러지듯 누웠다. 다시 꽃잎이 나풀나풀 떠올랐다. 그의 머리칼에서 뗀 마지막 꽃잎 하나를 손에 들고 있던 이도하가 조용히 그것을 내려놓았다.

“힘들다. 나도 그대에게 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안 되겠어.”

시오한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내가 당신보다 잘함.”

“보기보다 쉽지 않은걸.”

“자, 주인님. 잘 보고 배우세요.”

“그대가 정말 나보다 빨리하면 소원을 들어주지.”

“아, 오케이. 내가 지면 내가 소원 들어준다. 낙장불입, 남아일언중천금. 잘 아시죠?”

시오한이 쓱 손을 내밀었다. 이도하는 길고 헐렁한 정복 소매가 다 흘러내린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동안 시오한은 예의 그 거대한 곰 인형을 옆구리에 끼고 누워 구경했다.

그런데 변수가 있었다. 언뜻 봐서는 호리호리해 보이는 시오한이지만, 그의 손목은 예상외로 이도하보다 조금 더 굵었던 것이다. 연화지는 길이는 모두 동일하니, 두 번 두르고 나면 남는 건 정말 ‘꽁지’라고 불러야 할 수준이었다. 게다가 자신 있게 말했으나 곱게 자란 것은 이도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라고 딱히 손이 더 야무지지도 않았다.

“…….”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도 제왕의 미덕이지.”

인자하게 말하는 시오한의 눈에 푸른빛이 반짝 돌았다. 이도하의 손에 잔뜩 구겨져 꼬깃꼬깃한 연화지 끝이 저절로 스르륵 묶였다. 장렬히 실패한 이도하는 충격과 허망함에 빠져 잠시 말이 없었다.

“……난 제왕이 아닌데.”

그가 반박해 보았다.

“제왕과 한 몸이니 어찌 아니라 할 수 있겠어.”

“져도 아닌 척해야 제왕 아니야?”

“폭군이라 해야겠지.”

올려다보는 시오한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홱 뒤집어졌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을 때 그는 어느새 노을이 아주 짙게 깔린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둥근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름에 접어드는 봄날 같은 온실에 있으니 전혀 몰랐는데, 언제부턴가 조용히 눈도 내리고 있었다.

점점이 떨어지는 하얀 눈송이를 뒤로하고 시오한이 그를 내려다본다. 노을에 붉게 물든 황금빛 머리칼이 온통 쏟아져 그를 가두었다.

“……알지, 소원. 쏘세요.”

시오한이 깊이 눈웃음 지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이도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를 빗겨, 귓가에 닿은 입술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미친 거야?”

고개를 든 시오한이 짙게 웃었다.

“낙장불입.”

“아니, 잠깐만.”

“남아일언중천금.”

“아니, 아니. 좋은데! 타협! 타협하자! 그건 할 수 있잖- 야!”

“쉬.”

소복소복, 투명한 유리 천장 위로 조용히 눈이 쌓였다.

***

아주 부드러운 이불이 어깨를 감싼다. 아직 머리고 몸이고 무거웠다. 이도하는 몸을 뒤척이다 끄응, 하고 한 번 길게 신음하며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부볐다. 그런데 베개가 아닌 촉감이 걸린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다. 잠에서 아직 제대로 깨지 못한 이도하는 꿈지럭꿈지럭 기어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낮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안 자네. 잠결에 생각한 이도하는 잠시 더 그러고 있다가, 몸을 돌렸다. 눈을 떠 보니, 무릎에 턱을 괸 시오한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손에는 펜이 끼어 있고, 다른 한 손은 이도하에게 내준 채였다.

“더 자, 화이람.”

이도하는 뚱하게 그를 보다가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보니 아주 한밤중이었다. 잠기운이 묻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던 이도하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눈에 봐도 눈송이가 아주 컸다.

“……눈 엄청 오네.”

잠긴 목소리가 쩍쩍 갈라진다. 말해 놓고 이도하가 인상을 썼다. 큼, 목을 가다듬어 봐도 별 효과가 없었다. 에이 씨. 그가 민망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직 그의 머리맡에 깔려 있던 시오한의 손이 곱슬곱슬하게 말린 그의 머리칼을 매만진다.

이도하가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리며 다시 시오한을 보았다. 타닥-타닥, 벽난로가 튀는 소리가 들린다. 침전의 한쪽이 불그스름하고 따뜻한 빛을 비추고 있었고, 공기도 훈훈했지만 벗은 몸에는 싸늘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자다 말고 일을 하고 있어.”

이도하는 그 이불 위로 널린 서류들을 보았다. 시오한이 대답 없이 웃기만 한다. 아. 이도하가 깨달았다.

눈 때문이었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구나. 이도하는 흘긋, 눈이 펑펑 내리는 창밖으로 다시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쯧, 한 번 혀만 차고 말았다. 그가 시오한의 곁으로 좀 더 붙었다. 이리저리 작게 뒤척여 최적의 자리를 찾고서는 느리게 눈을 끔뻑인다. 시오한이 이미 잘 싸맨 이불을 한 번 더 여며 주었다.

“내일 장난 아니겠네.”

이도하가 느릿느릿 말했다. 제 세계였어도 교통대란이니 뭐니 하며 난리가 났을 기세다.

“첫눈이니, 좋아하는 이들도 있겠지.”

“나갈 일 없는 사람들이야 좋지. 당신한테는 완전 하늘에서 내리는 악마의 똥 가루 아니야.”

그것참 재미있는 표현이라는 기색으로 시오한이 픽 웃는다. 눈꺼풀이 퍽 무거워 보이는 얼굴로 그를 보던 이도하가 물었다.

“안 추워?”

시오한이 눈을 접었다. 그는 침의 하나만 어깨에 걸친 채였다. 늘어진 침의 틈새로 벗은 가슴과 배가 언뜻 보인다.

“추워?”

그가 도리어 묻는다. 안 추워. 당신이 추워 보인다고. 이도하가 말했다. 아무리 공기가 훈훈하다지만 다 싸맨 와중에 배와 가슴이 드러나면 보통은 쌀쌀하게 느껴질 텐데. 잠이 오는지 이도하는 눈가를 주무른다. 그는 반쯤 웅얼거리고 있었다. 시오한이 대답했다.

“추위를 잘 타지 않아서. 괜찮아.”

“……그랬나.”

“응. 그랬지.”

멀뚱히 보며, 이도하가 느리게 눈을 끔뻑인다. 눈꺼풀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도저히 못 이기겠다는 식으로 내려갔다가, 약간의 지연 후에 번쩍 뜨이는 걸 반복한다. 아주 빤히 쳐다보는데 정말 보고 있기는 한 건지 이미 멀리 가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떼지 못하고 그런 그를 지켜보는 시오한이 점점 더 따뜻하게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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