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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45화 (244/250)

외전 2-3화

이건 또 뭔가 해서 쳐다보던 이도하는 즐비한 카메라와 사람들 속 유세오와 눈이 딱 마주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쫙 빼입고 있었다. 유세오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안 들어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우와, 형! 안녕하세요!

이도하가 손을 까딱였다. 유세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도하가 다시 손을 까딱였다. 유세오가 눈을 깜빡이더니, 손가락으로 절 가리켰다. 저요? 빙그레 웃은 이도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유세오가 웃는다. 이도하의 손짓을 못 본 척하더니, 고개를 흔든다. 헤헤헤. 이도하가 입을 벙긋거렸다. 당장 튀어 와. 유세오가 울상을 했다. 혀엉.

딴짓하던 유세오는 진행자의 눈에 딱 걸렸다. 촬영 중에 뭘 하나 했는지 고개를 돌린 진행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유세오의 시선 끝에 선 이도하를 발견한 것이다. 우르르, 시선이 돌아가고, 술렁술렁해지더니 카메라까지 우르르 돌아선다. 유세오가 하하 웃으며 뭐라 대꾸하더니 슬금슬금 몸을 뺀다. 그가 황급히 달려왔다.

“아, 형! 촬영 중인데!”

“맨날 팔아먹으면서 싫은 척은.”

유세오가 찔끔했다. 그가 방송에서 틈만 나면 제 얘기를 하는 걸 이도하도 알고 있었다. 유세오가 나서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하도 사람들이 이리스티리움에서의 이도하를 궁금해하기 때문이었다. 이도하는 인터넷에서 몇 시, 언제쯤 어디로 가면 에트레제에서 이도하를 볼 수 있다더라, 하는 글도 본 적 있었다. 저를 무슨 전설의 동물쯤으로 취급하는 모양새로.

어쨌든 착한 관종인 유세오는 또 물어보는 데 빼지는 않는다. 뭐랬더라. 엄청 쿨하고 멋있는데 어디로 튈지 몰라서 좀 무서운 형이라고 했던가. 가끔 형 보고 있으면 옆구리가 시려요, 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말한 적 있다는 것도 들었다. 이리 방송에서 곁다리나마 나오면 또 사람들이 어찌 반응할지도 이도하는 알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이 없을 뿐.

“너 소버스 경한테 선물 준 적 있어?”

“선물이요?”

촬영 중에 불러 놓고 이게 뭔 뜬금없는 소린가 하는 얼굴이다. 그리고 유세오가 손뼉을 짝 쳤다.

“아, 성절 때문에 그러는구나, 폐하 생신! 돈 빌려줄까요, 형?”

이도하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구겼다. 바로 그 얘기가 나온다고? 이건 그냥 돈 빌리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말 아닌가?

“그거 말고 방법 없어?”

이도하가 물었다. 유세오가 만날 강아지 같은 얼굴로 칠렐레팔렐레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어쨌든 계약자 생활로 따지면 이도하보다 짬이 많다.

“어…… 뭐, 장신구 같은 건 안 되잖아요. 이리나는 기사라 못 주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폐하도 기사시고……. 보통은 지갑 같은 거 사지 않아요?”

“…….”

아무리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자는 심산이었다지만, 유세오한테 물어본 건 좀 괜한 짓이었던 것 같다. 짜게 식은 눈빛에 유세오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면 뭐, 생일상 차려 주는 이벤트라도……?”

황제에게 하기에는 좀 소박할 수도 있겠지만, 폐하라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 뭐 그런 어투였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

“됐다. 가.”

“앗, 형! 인터뷰 한 번만 해 주면 안 돼요? 은호도 있는데!”

“뭐?”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 보니, 복작복작하게 즐비한 사람들 중에 정말 신은호도 있었다. 쟤가 왜 저기 있어. 유세오가 부른 게 아주 틀림없어 보인다. 이도하가 유세오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

“짜식아, 애를 왜 자꾸 불러내.”

“아니, 제가 부른 게 아니라…….”

이마를 붙잡은 유세오가 꿍얼거렸다. 14살이 된 신은호는 반 학기 만에 교복을 새로 사야 할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었다. 그 신은호가 저만 한 인형을 안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새하얀 털이 아주 보들보들해 보이는 거대 곰 인형이었다.

“저건 또 뭐야.”

“지친 직장인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합니다! 특집 아이라 편이요.”

이도하가 유세오를 보았다. 말머리부터 말끝까지 어떻게 한 자도 빠짐없이 다 이렇게 어처구니없을 수 있냐, 하는 시선에도 유세오가 강아지처럼 웃었다. 그가 허공을 끌어안는 시늉을 한다.

“곰 인형을 안으면 행복해진답니다. 형도 안아 볼래요?”

이도하의 시큰둥한 태도에 타격이 없을 뿐, 유세오도 그가 이런 일에 콧방귀나 뀌는 형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럴까.”

“넹?”

“안아 보라며?”

엥? 유세오가 상황 파악을 못 하는 사이, 이도하가 척척 걸어갔다. 유세오는 감독의 눈에 불이 번쩍 튀는 것을 보았다. 잠깐 사이에 그의 머릿속에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할 예고편이 버전별로 수십 개는 좌르륵 스쳤다는 데 유세오는 제 특기도 걸 수 있었다.

“이야, 이거, 우와! 이도하 씨! 안녕하세요!”

진행자가 과격한 감탄을 터트리며 인사했다. 이도하는 그가 내미는 손에 적당히 악수해 주고, 주변의 인사도 적당히 받아 주었다. 눈곱만큼의 미소도 없는 얼굴이었으나 프로들답게 요만큼의 민망함이나 어색함도 없이 하하 웃는다. 역시 까칠하고 쿨한 이도하! 하는 반응이다.

“아니, 이도하 씨께서 어쩐 일로……?”

아니, 여기 아이라예요! 옆의 출연자들이 떠들썩하게 오디오를 채웠다. 이도하의 옷차림에 신기한 눈빛이 스쳤다.

“세오가 인형 한번 안아 보라고 해서요.”

“아, 인형이요. 예, 인형 좋죠, 그럼요. 이도하 씨가 인형을……!”

무심한 대꾸에도 진행자는 찰떡처럼 반응했다. 이도하가 팔을 벌렸다. 기분 좋은 얼굴로 인형을 안고 있던 신은호가 미간을 콱 구겼다. 뭐 하냐는 얼굴이다. 이도하가 눈썹을 들었다. 얼른 내놔라.

신은호가 입술을 삐죽인다. 속으로 오만가지 구시렁을 하고 있을 얼굴로 신은호가 인형을 넘겼다. 푹신한 인형이 얼마나 큰지, 품을 아주 가득가득 채우며 착 안겨 왔다. 오?

이야, 이도하 씨 표정이! 꽤 만족스러우신 것 같아요! 웃음을 터트리며 출연자들이 뭐라 뭐라 얘기를 나누는 동안 이도하는 인형을 좀 더 꼼꼼하게 끌어안아 보았다. 몇 번 자세까지 바꿔 가며 안던 이도하가 신은호를 바라보았다.

“넌 당장 학교 튀어 가라.”

쳇, 신은호가 군말 없이 입맛만 다셨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이거 어디서 사요?”

***

햇볕을 받아 반짝거리는 금발이 움직임에 따라 악기 소리가 날 것처럼 차르르 흘러내렸다. 허리를 숙인 채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던 시오한의 눈에 문득 온기가 피어올랐다. 옅게 미소를 띠고 몸을 돌린 그가 돌연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 눈동자가 드물게 당혹으로 얼룩진 것과 동시에, 볼록한 무언가가 그를 부드럽고 탄력 있게 퉁, 밀었다. 밀려난 시오한이 종이 인형처럼 속절없이 풀썩 쓰러졌다. 바닥에 즐비하게 깔린 꽃잎들이 나풀거리며 떠올랐다. 그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주 푹신하고 거대한 것이 그를 묵직하게 깔아뭉개고 있었다.

“……?”

푸하하하! 웃음소리가 울린다. 화창한 하늘이 보이는 유리 천장 아래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얼굴이 쏙 나타났다. 화이람-그의 계약자가 머리맡에서 무릎을 짚은 채 한껏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느라고 흔들리는 새까만 머리칼 사이의 얼굴을 그는 찰나 동안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넘어진다고?”

“아주 치명적이었는걸. 도리가 없었어.”

좀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는 시오한을 보며 이도하가 또 웃음을 터트렸다. 시오한의 얼굴에도 점차 웃음이 물들듯 번져 나갔다. 잠시 뒤 이도하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예쁘네, 당신.”

시오한이 누운 곳은 완전히 꽃밭이었다. 새끼손톱만 한 아주 작고 하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위로 화려한 정복 차림의 시오한이 누워 있으니 그대로 그림이었다. 그의 위로 거대한 곰 인형이 엎어져 있지 않았더라면 명화라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시오한이 눈을 감고 턱을 조금 들어 올렸다. 그럼 어서 입맞춤이나 해 달라는 자세다. 이도하가 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맡에 앉았다. 고개를 숙이고, 얌전히 기다리는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끝이 차가운 손가락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와, 이도하가 등허리를 떨었다. 잠시 후,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맞춘 그가 물었다.

“곰 인형을 안으면 행복해진다는데, 어때. 좀 행복한 기분이 들어?”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글쎄……. 분명 색다른 기분이 들긴 하네. 이 아이와 그대가 자리를 바꾸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 같긴 해.”

“어허, 동심의 상징 앞에서.”

이도하가 짐짓 엄한 시늉을 하다가, 제 풀에 픽 웃어 버렸다. 시오한이 인형 아래에서 손을 내밀었다. 잡고 힘을 주자 그가 훌쩍 상체를 일으킨다. 긴 머리칼을 따라 꽃잎이 떠올랐다. 이도하가 바닥에 떨어진 제관을 주워 다시 씌워 주었다.

연약한 습기 위로 꽃과 풀 내음이 가득 감도는 그곳은 따뜻한 온실이었다. 무슨 기막힌 기술로 지었는지, 다른 재료라고는 하나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육각형의 유리들이 이어져 하늘 아래서 둥근 천장으로 만났다.

보는 이에 따라 반짝거리는 하나의 거대한 벌집 같기도, 거대한 물방울 같기도 한 이 유리 온실은 어쨌건 어느 모로 보나 매우 예뻐 이도하도 아주 좋아하는 곳이었다. 특히나 밤에는 하늘에 흐드러지게 핀 별들이 가득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노을이 지려고 하늘이 파스텔 빛으로 변한 지금도.

“눈을 가려 놓으면 몹쓸 짓일까?”

시오한이 곰 인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오한을 완전히 깔아뭉갤 정도로 엄청나게 거대한 곰 인형은 보슬보슬하고 몹시 부드러운 흰 털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에는 까만 콩 같은 눈알 두 개가 반질반질하게 빛났으며 입은 아주 상냥하게 방긋 웃고 있었다. 무슨 소린가, 했던 이도하는 곧 입을 벌렸다. 제 옆에 앉힌 인형에게서 고개를 돌린 시오한이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다.

“동심의 상징이라 하니. 지켜 줘야겠기에.”

불그스름하게 조금씩 노을이 물들어 가는 빛을 받으며 그렇게 웃는다.

“……그렇게 웃기 없기.”

“응?”

“씁, 당신 이제 모른 척하는 것도 금지야.”

고개를 흔들며, 이도하가 냅다 인형을 시오한의 품에 안겼다. 시오한이 낮게 웃음을 터트렸다. 방긋 웃는 곰 인형을 그렇게 안겨 놓으니 귀여움이 추가되어 좀 괜찮아졌다. 아니, 몹시 귀여웠다. 긴 머리칼 곳곳에 꽃잎이 붙어 있는 게 귀여움을 한 스푼 정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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