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하여 이도하는 아주 고민이었다.
더군다나 남의 생일을 챙기는 섬세한 짓은 해 본 적이 없는 이도하는 그의 생일을 알아차리는 것도 늦었다. 시오한이 유난히 바쁘고, 사람들도 바쁜 동시에 들떠 보이고, 뭔가 분위기는 떠들썩하고. 그래서 그는 아무 생각 없이 물어봤었더랬다. 일리온 시타 백작에게.
‘뭐 행사 같은 거 있나 봐요.’
그냥 연말이라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일리온 시타 백작은 아주 묘한 얼굴로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너 좀 큰일 난 것 같다.’ 하는 안쓰러움이 섞인 표정이었다. 유능한 시종장인 그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곧 성절이니까요.’
‘성절?’
그게 뭐람. 이도하는 멍청하게 생각했었다.
‘폐하의 탄신일이요.’
‘……예?’
‘폐하께서야 본래 그저 일거리 중 하나라고 여기시는 편인데, 이번에는 공께서 계시니만큼 만전을 기하고 있답니다.’
제 주인의 행복이 제 행복이라는 듯 그가 방긋 웃었다. 이도하에게는 ‘넌 진짜 대박 망했다’ 하는 얼굴로 보였다. 순간적으로 아찔해서 눈앞이 핑 돌 정도였다.
겨울의 12일.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에게 들어 알고 있었는데. 이도하는 제 머리를 팡팡 두드렸으나 그래 봐야 별수 없었다. 그는 시간을 돌릴 수도 있었지만 이제 시간이라면 지긋지긋했다. 털끝 하나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해서 그는 겸허히, 제 발등이 아주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던 것이다.
“아, 미치겠네.”
이도하가 정말이지 초조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봐도 마음에 드는 생각은 안 떠오르고, 생일은 시시각각 다가온다. 시오한이 그가 오즈에서 야바위로 상품을 타다 줘도 기뻐할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이 생일을 그렇게 퉁 쳐 버릴 만큼 이도하도 삭막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건 정말 중요했다.
둘이 보내는 첫 생일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선물’ 따위의 뻔뻔한 짓거리를 한번 해 볼까도 생각했다. 마음이 절박하니 목에 리본을 걸고 선물 상자에서 튀어나오는 미친 짓을 해 볼까 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들었다. 그래도 이성이 좀 돌아오자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물건 같은 것. 이도하는 제가 없어도 그에게 남아 있을 무언가를 주고 싶었다.
이를테면, 증거 같은 것.
제 눈 밑에 새겨진 이 이름처럼. 태반을 오즈에서 보내는 그이지만, 그래도 종종 제 세계로 돌아와야 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이도하는 제 부재가 못내 신경 쓰였다. 그 시간에마저도 저를 기다리고 있을 그를 알아서.
Q. 님들 계약주 선물 대체 어떻게 줌???
└ 오즈에서 사서 주면 되잖음.
└ 지 돈으로 지 선물 산다고 지랄함.
└ 님 계약주는 그냥 여기 물건이 갖고 싶은 듯ㅋㅋㅋㅋ 가끔 그런 계약주들 있음.
└ 액세서리도 꽤 많이 함. 몸에서 안 떼면 안 없어짐. 나도 계약주 발찌 사 줬는데 아직까지 잘 하고 있음.
└ 애인도 아니고 웬 액세서리;;; 남자끼리 액세서리 선물은 에바지.
└ 괜찮은데. 기사나 용병 아니면 팔찌 정도 괜차늠
액세서리. 당연히 생각해 봤다. 제일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오한은 팔찌고 귀걸이고 아무것도 몸에 걸친 게 없었다. 장신구를 할 법도 한데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리온 시타 백작에게 또 슬쩍 물어보니, 원래 그렇단다. 이리스티리움은 몸에 장신구를 걸치는 문화가 아니라고. 맨살에 금속, 온기가 없는 것을 접촉하는 걸 좋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라던가.
그럼 제가 길거리에 다니면서 간혹 본 장신구는 다 무엇인가 했더니, 옷에 하는 것이란다. 이리스티리움의 옷이 왜 그렇게 화려한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풍속이 그런 것이다. 남들이 몸에 뭘 걸치고 있는지 아닌지 눈여겨 쳐다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몰랐고, 시오한은 맨몸으로도 화려한 사람이라 그런 걸 안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혹시 애인이나 부부끼리 반지도 안 하냐 물으니 하기야, 다른 나라에서는 그런 걸 하기도 하지요. 하고 대답하는 게 아닌가.
진짜 염병할 일이었다. 되는 게 없다. 이도하는 머리를 싸맸다. 이래서 시오한이 그리 말한 것이다. 이렇게 답이 없는 걸 알아서. 생일은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기성품은 싫고, 뭔가 특별하고 의미 있는 걸 하려면 아주 촉박한 시간이다. 이건 제 머리로는 안 된다. 이도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Q. 계약주 생일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뭘 사야 할지 고민입니다. 20대 남자이고, 이리스티리움 사람입니다. 오즈에서 사서 줄 수는 없고, 여기서 가져가야 하는데 뭘 사야 될까요.
이도하는 성급하게 새로고침했다.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이래서야 정말 공기 따위나 선물하게 되겠다. 두어 번 더 새로고침한 이도하가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때 달칵, 문이 열렸다.
“? 뭐 하는 거예요?”
“……고민.”
“도하 군이?”
너도 그런 걸 하냐는 듯한 어투다. 한숨과 함께,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주승현이 그의 앞에 두꺼운 서류 봉투를 내려놓으며 앉았다. 연한 베이지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크게 구불거리는 주승현은 이전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유한 이미지였다. 나이보다 좀 더 젊어 보이기도 했다.
“머리, 잘 어울리네요. 옷도 잘 어울리고.”
주승현이 눈짓했다. 다 헤집어 놓아서 엉망이 된 머리칼은 곱슬곱슬하게 말려 있어 또 그런대로 어울렸다. 처음 보았을 때는 좀 황당했던 그의 이리스티리움 복식도 이제 익숙하다. 이도하는 키가 제법 큰 데다가 옷 태가 좋아 이곳에서는 영 이질적으로 보이는 그런 복식도 꽤 잘 어울렸다. 이도하가 흘긋 주승현을 보고는 시큰둥하게 서류 봉투나 열어 본다. 빠르게 서류를 훑은 그가 미간을 구겼다.
“좀 많죠.”
“좀?”
이도하가 짜증스럽게 그녀를 보았다.
“꽤?”
“바퀴벌레도 아니고…….”
“중동 쪽은 길게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쉽게 포기하는 곳이었으면 여태껏 지지부진한 전쟁들을 끈질기게 이어 오지도 않았을 테니. 워낙에-”
잠깐 적절한 단어를 찾는 듯, 주승현이 눈썹을 들었다.
“역사가 유구한 곳이기도 하고.”
오랜 전쟁이나 내전으로 파탄 난 곳 외에도, 오일 머니로 특수를 누리던 중동의 부유한 국가들이 마력 매개 에너지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이후 꾸준히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는 건 일반 상식이다. 몰락까지는 아니어도, 명백한 쇠락의 길쯤은 되었다. 게다가 그쪽은 유독 특기자가 드물고, 개중 계약자는 더더욱 드물다. 그러니 주승현의 말처럼 그들의 역사는 유구하다고 할 만하다.
“좆같은 수작질에 역사는 무슨.”
이도하가 싸늘하게 이죽거렸다. 계약주의 매개로 존재를 속여 세계에 눌러앉는 ‘계약자’들 이외에는 서로 소통할 수도, 교류할 수 없다는 두 세계. 그들의 존재 외에는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다는 두 세계 사이에서 사실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수작질.
계약자를 인위적으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든가, 얼마 없는 계약자로도 최대의 마력 매개 에너지를 창출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든가. 둘을 다 한다든가. 그 외에 참 기발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다채롭게 해낸다. 거기에 각국과 세계를 넘어선 교묘한 정보전과 정치질까지 더해지면 대환장의 하모니가 완성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물 밑의 암투라고 고상하게 표현하지만 이도하는 단순하게 수작질이라고 불렀다.
“싹 다 불태워 버리든가 해야지.”
그가 서류를 챙겨 넣으며 일어섰다. 주승현이 고개만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극단적이시네?”
“일단 한번 즈려 밟아 놓고도 또 머리가 기발하게 돌아가는지 보자고. 오슬란드 대통령이랑은 얘기됐다며?”
주승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뭘 굳이 확인까지 하냐는 몸짓이다. 당연히 그랬을걸. 미 대통령과의 암묵적인 이야기가 잘 마무리됐다는 얘기를 저렇게 별것 아닌 것처럼 하니, 확실히 난사람은 난사람이다. 대단히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임은 틀림없는 것이다.
“식사나 한번 하자던데.”
“하든가.”
“도하 군이랑요.”
“꿈 깨라고 해. 그 양반은 한국인인가, 뭘 만날 밥 타령이야.”
이도하가 문득 멈춰 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새까만 눈에 푸른빛이 으슥하게 넘실거린다. 절 내려다보는 싸늘하고 차가우며, 그 아래에 거대한 무언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눈동자에도 주승현은 빤히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그 어떤 의구심도 모르는 사람처럼.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인사처럼 서류 봉투로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린 그가 문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나서야 주승현이 아. 하고 소리를 냈다.
“지금 밖에 안 나가는 게 좋을 텐데.”
타이밍을 놓친 경고를 혼자 중얼거린 주승현이 곧 일어났다. 뭐, 말할 틈도 없이 제가 그리 나가 버린 것을 어쩌겠는가. 알아서 잘하겠지.
***
핸드폰을 켠 이도하는 동시에 시간을 확인했다. 시오한이 대전 회의가 있는 김에 두어 시간 정도만 다녀온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이 좀 남았다. 예정보다 빨리 돌아가는 것도 상관없지만 그는 지금 해결해야 할 난제가 있었다.
김윤혜에게 로비에서 커피나 한잔하고 있겠다는 메시지를 날린 이도하는 서류 봉투를 옆구리에 끼고 다시 핸드폰에 골몰하며 걸었다. 어차피 아이라 건물이라면 어렸을 적부터 하도 드나들어서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었다.
Q. 계약주 생일 선물을 하려고 하는데 뭘 사야 할지 고민입니다. 20대 남자이고, 이리스티리움 사람입니다. 오즈에서 사서 줄 수는 없고, 여기서 가져가야 하는데 뭘 사야 될까요.
└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이리스티리움인 생일 선물ㅋㅋㅋㅋㅋㅋㅋㅋ
└ 남자면 걍 팔찌 같은 거 사 주면 안 됨? 하면 안 되는 정도까진 아니잖음. 요샌 인식도 많이 바뀌었다던데
└ 우리 계약주……. 괜찮다고 내가 사 준거면 하고 다니겠다고 해서 존나 비싼 팔찌 사 줬는데 씻는다고 끌렀다가 지우개 당함ㅎㅎㅎㅎㅎㅎㅎㅎ 진짜 존나 눈치 보는데 뭐라 할 수도 없곻ㅎㅎㅎㅎㅎㅎ 이리스티리움인들은 액세서리 안 사 주는 게 나음 걍 버릇이 안 되어 있어서 암 생각 없이 끌렀다가 잃어버리고 혼비백산함.
└ 밥 사 주는 게 나을 듯
└ 돈 없다잖아
└ ? 계약자가 왜 돈이 없어
└ 오즈에서 돈 못 쓴다고 하잖음.
└ ??? 계약주 돈으로 주기 싫은 거면 주변 계약자한테 빌리면 안 됨?
돈을 빌리라고? 이건 생각 못 했다. 그러나 이도하는 곧 인상을 썼다. 이도하는 생전 처음으로 물욕이 아주 드글드글 달아오른 상태였다. 그냥 그런 거 말고, 어중간한 그런 거 말고. 아주 그냥 최고로, 몹시 비싸고 엄청난 걸 선물하고 싶었다. 시오한은 황제이니, 그 정도는 되어야 마땅하다. 그만한 돈을 빌리기도 꺼림칙하고, 다시 생각해 보니 ‘빌려서’ 사기도 싫다.
└ 여기서 사서 가야 되는 거면 답 없는 것 같은데…….
집단 지성의 도움은커녕 이건 진짜 답이 없는 문제라고 확인 사살만 당한 이도하는 속이 절절 끓었다. 냉수가 필요하다. 뭐라도 좀 쏟아부어야겠다. 미간을 문지르던 이도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 도착한 로비가 아주 북적거리고 있었다. 원래 좀 복작복작한 편이지만, 그것보다 유난히 더.
게다가 웬 방송 카메라들까지 즐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