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외전. 새벽바람 사초롱
날이 몹시 좋았다. 하늘이 높고 화창한 데다가 햇빛이 아주 쨍해서, 공기가 싸늘한데도 불구하고 나른하게 눈이 감기는 정오다. 이도하는 창가에 앉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하게 깔린 성도의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넋이 나가 있었다. 시오한이 쥐여 준 주전부리 바구니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은 것도 모를 정도로.
“…….”
차가운 바람이 곱슬하게 말린 머리칼을 흔드는 와중에도 이도하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찌나 푹 생각에 잠겼는지, 간을 보던 새가 바구니에서 제 덩치만 한 과자를 잽싸게 훔치고 코앞에서 포르르 날아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화이람.”
“…….”
“화이람.”
흠칫 정신을 차린 이도하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 하나가 그의 볼을 쿡 찔렀다.
“……헐.”
볼이 찌그러진 채로 이도하가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냈다. 검지를 접으며 시오한이 나직이 웃었다. 그가 치렁치렁한 정복을 우아하게 추스르며 이도하의 앞에 앉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
“어…… 딱히. 그냥 멍 때렸던 거지. 잠깐 휴식?”
시오한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하게 묶어 놓았던 머리칼이 느슨하게 흘러내린다. 이도하가 손짓했다. 시오한이 눈웃음을 지으며 돌아앉는다. 이도하는 반쯤 풀린 머리끈을 풀고, 기다렸다는 듯 바람에 흩어지는 머리칼을 서툴게 그러모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긴 머리칼이 손에 엉키지 않도록 조심하느라 이도하가 미간을 모았다.
영상도 찾아보고, 후배 이주연의 머리카락으로 연습까지 했는데 실전은 매번 달랐다. 이주연이 놀렸던 것처럼 제가 똥 손이어서는 아닐 것이다. 누구의 머리칼도 시오한의 것만큼 길지도, 매끄럽고 부드럽지도 않아서 그렇다, 하며 이도하는 자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시오한의 머리칼은 그 빛부터 그렇지만,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느낌 또한 정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머리칼과는 궤가 좀 다르니까.
“그대가 고민이 많은 듯하여서. 혹 연회 때문에 그래?”
사실 시오한은 아까 전부터 턱을 괴고 이도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 그 정도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볼 법도 한데, 이번에는 낌새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새가 손가락에 앉았던 것도 못 느끼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그의 머리에 들어앉은 게 틀림없는 것이다.
연습했던 대로 머리칼을 땋느라 열심히 집중하고 있던 이도하가 우뚝 멈추었다. 시오한이 슬쩍 돌아보려고 한다. 그 바람에 머리칼이 손에서 슬슬 빠져나갔다. 어어어- 머리칼을 꽉 쥐지도 못하고 놓칠 수도 없는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다급한 소리를 내자 그가 멈추었다. 어깨가 흔들리는 게 웃는 모양이었다. 미안. 짧게 사과한다.
“춤 때문이라면 추지 않아도 돼, 화이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말했다. 다시 머리를 땋아 가던 이도하가 콱 인상을 썼다. 춤은……. 그러니까, 그건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이도하는 생전 춤이라는 단어가 제 인생에 끼어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연회라고 하면 당연히 춤도 추지 않나, 했고 시오한도 과연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이도하는 제가 운동신경이 꽤 좋은 편이니 춤도 배우면 그럴듯하게 추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이제 제가 시오한과 그냥 계약주, 계약자 사이가 아닌 것을 모두가 안다. 남들 보란 듯이 시오한과 한번 춤을 춰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안 좋은 생각을 뻔뻔하게도 했던 건 다 그 때문이었다. 시오한이 직접 가르쳐 주겠다고 했으니 아주 즐겁게 기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도하는, 약 한 시간 만에 시오한의 묘한 얼굴 앞에서 수치를 맛봐야 했다.
괜찮다, 즐거우면 되었다, 귀엽다. 시오한이 뭐 그런 말들을 열심히 했지만 이도하는 이미 제가 얼마나 끔찍한 몸치인지 깨닫고 난 뒤였다. 지옥으로 가는 늪지대였는지, 황천의 유황이었는지 아무튼 그 죽도 밥도 아닌 요리를 맛봤을 때 보였던 얼굴로 그렇게 말해 봐야 다 소용없었다.
풍선 인형처럼 열심히 뚝딱거리는 이도하를 보고 박장대소를 터트리지 않은 점에서 이미 그는 박수를 받아 마땅했다. 즐겁게 그들의 댄스 교실을 직접 시중하던 시종장 일리온 시타 백작이 벽에 머리를 박고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을 봤으니.
이도하는 뭐든 할 수 있었지만, 제가 춤을 잘 추게 할 수는 없었다.
“연회에 나서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되고.”
“당신은 나가야 하잖아.”
음, 시오한이 잠시 대답을 고민했다. 안 봐도 고민하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하여간 도무지 안 된다는 말을 할 줄 모른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인공인데.”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이 연회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시오한의 생일 연회였으니까.
성절.
전제군주제인 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한 해 중 가장 성대하고 중요한 날이었다. 전에는 앞뒤로 한 달 내내 나라가 축제 기간에 돌입해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흥청망청 즐기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시오한의 조부인 아칼테케 황제가 쓸데없는 놀음이라며 열흘 정도로 줄였다고 했던가. 선대인 시오한의 아버지도 그리 떠들썩함을 좋아하는 황제가 아니었던지라 한층 더 축소된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황제인 시오한을 사랑해 마지않는 이 나라는 그의 생일에 정말 골수까지 진심인 관계로, 시오한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성대한 성절을 만들려는 기세였다.
“춤은-”
이도하는 다시 떠오르는 아찔한 기억에 잠시 마음의 안정을 취한 뒤, 이어 말했다.
“……못 추지. 안 출 건데, 그래도 당신 혼자 가게는 안 해. 내가 싫어.”
얼마 전 가봉했던 옷이 얼마나 화려하고 예뻤는데. 이도하가 중얼거리듯 구시렁댔다. 특히나 제관과는 정말 눈이 아플 정도로 잘 어울렸다. 시오한이 황제로서 그리 제관을 쓰고 연회에 나가는 모습을 저만 못 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도하는 그 옆에 제가 있고 싶었다.
“다행이다.”
시오한이 조금 돌아보며 말했다. 언뜻 보이는 눈이 부드럽게 휘어 있다.
“그대도 무척 잘 어울렸으니. 보지 못하게 되었다면 아쉬웠을 거야.”
연회 때 입을 옷을 위해 가봉을 한 건 이도하도 마찬가지였다. 시오한의 옷에 맞춰서. 몇 날 며칠 끝을 모르고 꾸며지고 있는 연회장이나, 거리마다 떠들썩하게 걸리는 장식들, 들뜨고 설레 보이는 사람들, 쏟아져 나오는 황제 폐하의 굿즈……까지. 모든 것들이 착착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혹여.”
거의 다 땋은 머리는 이제 마무리에 접어들었다. 손을 꼼지락대며 이도하가 눈만 들었다.
“선물 같은 것 때문에 고민인 거라면.”
“아니야.”
이도하가 즉시 대답했다. 칼 같은 대답에 시오한이 조금 더 고개를 돌렸다. 이도하의 얼굴을 살피고 싶은 것 같았다. 이도하가 그럴 수 있듯, 시오한도 원한다면 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는 않을 터였다.
머리를 덜 묶었으니 돌아보지 말라는 말에 얌전히 다시 고개를 원위치한 것처럼. 그의 머리 길이 정도면 지금쯤 돌아보는 게 크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아니고, 아, 그건 서프라이즈지. 다 됐다.”
진즉에 다 묶은 황금빛 머리칼의 꽁지만 만지작거리던 이도하가 더 시간을 끌지 못하고 말했다. 시오한이 몸을 돌렸다. 성도의 전경을 뒤로하고 걸터앉은 그가 이도하를 보고 소리 없이 웃음 지었다. 스스로가 좀 시무룩하고 낭패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시오한이 이도하의 뺨을 가볍게 감쌌다.
“내 선물은 이미 여기 있어, 화이람.”
반대쪽 뺨에 입을 맞추며, 그가 말했다.
“하니 너무 고민하지 말아. 그대가 날 생각하는 건 기쁘지만, 질투가 나려 하는걸.”
“아니라니까?”
벌써 근 한 달 전부터 들어오고 있는 선물, 남들은 이미 다 준비한 선물. 그거 당연히 저도 이미 준비했지. 이도하는 그런 얼굴로 눈을 홉 떴고, 시오한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쪽.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다시 일하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이도하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남들 다 이미 준비한 선물. 아마도 없는 게 없을 그 선물.
그걸 저만 준비 못 했다.
***
남친 생일 선물.
20대 남자 생일 선물
여자 친구 생일 선물
30대 남자 친구 생일 선물
남자 친구 생일 이벤트
30대 여자 친구 생일 선물
20대 남자 친구, 기뻐하고 실용성 있는 선물 BEST 5!
계약주 생일 선물
핸드폰을 들고 골몰하던 이도하는 눈에 띄는 검색어 하나를 발견했다. 그가 조금 허리를 세웠다.
Q. 계약주가 생일이라 선물을 주고 싶은데 뭘 어떻게 줘야 할지 모르겠네요. 계약주는 20대 남자고요, 용병입니다.
A. 계약주 선물로 고민이 많으시군요. 우리 세상 물건은 오즈에 가면 사라지기 때문에 선물하기가 쉽지 않지요. 많은 계약자분들이 비슷한 고민을 하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오즈에서 물건을 사서 주는 방법입니다. 계약주분이 용병이시라면 무기나 방어구 같은 것도 좋은 선물이 되겠지요.
사람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한 모양이다. 이도하도 이게 문제였다. 뭘 사건 간에, 여기서 사서 가면 다 사라지고 마는 게. 각각의 세상은 제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리는데, 그럼 도대체 뭘 줘야 하는가.
오즈에서 뭔가를 사서 주는 거, 당연히 생각해 봤다. 그러나 계약자인 이도하가 오즈의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계약주를 통해 오즈에 발을 디디는 계약자들이 오즈에서 돈을 쓸 일도 없으므로. 있다고 하면, 그건 당연히 계약주의 돈이었다.
이곳에서 계약자들이 마력을 매개해 대체로 부유한 편인 것처럼, 계약자의 특기를 활용해 대체로 부유한 편인 계약주의 돈. 계약자들은 딱히 그걸 용돈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계약자의 마력으로 특기를 쓰긴 하지만 어쨌든 제가 벌어다 준 돈이니 쓰는 게 마땅하다는 인식이었다.
그러나 이도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마력을 뱅글뱅글 돌려 그곳에서 숨 쉬는 데 초점을 둔 백수였다. 시오한은 그의 특기가 필요하지도 않고, 필요로 할 일도 없었다. 이도하는 그저 고양이처럼 그의 곁에서 뒹굴거리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시오한은 부자지만, 네 돈이 내 돈이다식 계약자들의 금전 논리를 적용하기에는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너무 많다.
돈을 달라고 하면 시오한은 백지 수표라도 써 주겠지만 그 돈으로 그의 생일 선물을 사는 건 좀 의미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돌려막기는 마력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