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242화 (241/250)

외전 1-6화

“이거 있잖아. 뭔데.”

이도하가 잡지 않은 다른 손을 움직였다. 시오한이 했던 것을 흉내 낸 움직임이었다. 의아하게 이도하를 보던 시오한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번졌다. 참아 내려는 듯한 기색으로 그가 말했다.

“암군의 수신호야. 서련은 현재 암군이 이곳에 셋 당도해 있으며, 공격에 대응 중이라고 보고한 거지.”

“너는?”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가르쳐 주듯 다시 손을 움직여 수신호를 보여 주었다.

“속히, 정리하라.”

“몇 개 더 있었잖아.”

“음.”

잠시 딴청을 부린 시오한은 끈질긴 이도하의 시선에 결국 말했다.

“시신은 남기지 말 것.”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오한의 시선이 그를 살폈다.

“죽이지 말라고?”

“글쎄…….”

다시 앞을 보는 그의 얼굴에 잔가지의 그림자가 빠르게 스쳤다.

“해석하기야 나름이겠지?”

그들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대응 중이라고 했던 서련의 말대로 상대가 암군에게 붙잡혔는지 더 이상의 습격은 없었다.

“당신한테 벤치 던진 새끼도?”

이도하가 집요하게 물었고, 시오한은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사이에 그들은 산 아래에 도달했다. 빼빼 마른 채 우거진 나무들이 순간 사라지고 널찍한 공터가 나타난 순간, 서련이 팔을 휘둘렀다.

거의 동시에 쐐액-! 또다시 공기를 가르고 쏘아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흰 빛줄기가 번쩍이며 유도탄처럼 그들을 향해 날아드는 것들을 꿰뚫었다. 캉! 두 쪽 난 것들이 사방으로 처박혔다.

“응, 그 새끼도.”

서련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난데없이 벌어진 특기전에 걸어서 산을 오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참새 떼처럼 사방으로 달아났다. 시오한은 이도하의 손을 잡고 그 살벌한 현장을 뒤로한 채 한가롭게 비워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와장창! 쾅!

무슨 폭격이라도 쏟아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에 이도하가 흘긋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길가에 놓여 있던 웬 컨테이너가 흰 빗줄기에 파가 채 썰리듯 가닥가닥 절단되는 모습이었다. 이도하가 짝짝 박수를 쳤다.

“집에 가려면 또 버스를 타야 할까?”

컨테이너 뒤에서 구르듯 몸을 피한 이가 발악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으로 예의 그 총알 같은 것들을 쏘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쏘아 보낸 것들과 서련이 날린 빛줄기의 수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었다. 컨테이너와 다를 바 없는 신세로 가닥가닥 난 총알이 농락하듯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도하는 저런 극단적인 공격형 특기는 정말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아마 욕일 것으로 추정되는 외국어를 거칠게 짓씹은 습격자는 한계에 부딪힌 게 명백해 보였다. 그가 황급히 몸을 피하는 순간, 흰빛이 다시 번쩍였다. 끄아아아악! 습격자가 비명을 질렀고, 덩어리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잘린 손목이었다.

습격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동시에 조금 멀리서 쿵, 하고 무거운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암군이 셋, 습격자는 최소 둘. 이곳이 아닌 남산 어디선가 또 교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쿵, 멀게 또다시 울리는 소리를 들은 이도하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저 새끼다. 시오한한테 벤치를 던진 새끼가.

“시오한, 잠깐만.”

시오한은 말릴 새도 없었다. 이도하의 눈에 아주 순간적으로 푸른 섬광이 번쩍였다. 까드드득! 거대한 쇠를 잡고 뜯어내는 것 같은 듯한 섬찟한 소리가 나기 무섭게 콰아앙! 어마어마한 굉음이 울렸다. 여태까지 난 어느 소란과도 달랐다. 무거운 게 그냥 중력으로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붙잡고 바닥에다가 갈아 버린 것 같은 소리였다. 엄청난 무언가를. 이를테면, 케이블카 라든가, 거대한 구조물 같은 것을.

우뚝 솟은 남산 타워가 불을 밝히는 가운데, 남산 한곳에서 뿌연 흙먼지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시오한은 보았다. 사위가 아주 조용해졌다. 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다. 시오한이 우아하고 점잖게 박수를 치는 소리만 나직이 울렸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이곳을 보고 있는 서련을 흘긋 보고 작게 고갯짓했다. 습격자를 붙잡고 있던 서련이 우와, 혀를 내두르며 제 할 일을 하기 위해 돌아갔다.

“택시 타자.”

“택시?”

방금 뜯어낸 것이 뭐였든, 공공기물을 거하게 파손한 건 분명한 이도하가 남의 카드를 척 들어 보였다.

“나 돈 많다 이거야.”

“멋진걸.”

물론 시오한은 그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아낌없이 호응했다. 웃는 듯 가늘어진 눈으로 그가 이도하를 살폈다. 이도하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를 이끌었고, 둘은 현장을 뒤로하고 나란히 손을 잡고서 예쁘게 조명이 밝혀진 길을 따라 내려갔다.

“저 새끼들 다 뭐지. 날벌레들이 왜 이렇게 많아.”

이도하가 험상궂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찾아내서 다 조지고 말 것이다, 하는 음산함이 숨어 있었다.

“별거 아냐, 화이람.”

“당신한테 벤치를 던졌잖아.”

이도하의 집착에 시오한이 가볍게 웃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번졌다.

“나는 많은 것을 책임지고 있는 위치이고, 그런 내가 사라지면 이득을 볼 이득이 많기 때문이지. 그러니 걱정할 것 없어, 화이람.”

발걸음을 맞추며, 시오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단지 그것뿐이야. 그런 간단한 이치로.”

한바탕 난리가 난 산 위와는 달리 아래는 아직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고, 택시는 금세 잡혔다. 시오한은 다시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고, 그래서 나이가 꽤 지긋한 택시 기사는 그의 화려한 금발에만 잠시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 근방에 외국인이 한둘도 아니다, 하는 듯 심드렁했다. 그러다 흘끔 이도하를 보고, 점점 더 자주 이도하를 흘끔거리게 되었을 때는 이미 집에 다다랐을 때였다.

“화이람, 여기 봐.”

집 인근의 거리에서 내린 이도하와 시오한은 번쩍거리던 번화가에 비해 열두 배쯤은 고즈넉하게 보이는 조용한 주택가를 손잡고 걸었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부른 것은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징검다리처럼 건너던 때였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시오한이 그의 눈매를 쓸었다. 손끝이 귀밑을 부드럽게 쓸어 목을 타고 내려가니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손끝이 지그시 살 위를 누르자 두근두근, 빠르게 약동하는 제 맥박이 이도하에게도 느껴졌다.

“시오한, 괜찮아.”

말을 한 건 이도하였다.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선수를 뺏긴 것처럼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도하가 제 얼굴을 잡은 그의 손 위를 턱 잡았다.

“야, 괜찮아. 내가 지켜 줄게.”

“…….”

조금 당황한 듯 그를 쳐다보던 황금색 눈이 유하게 휘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금빛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자신만만하게 말했던 이도하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 웃는 시오한이 몹시도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탓이었다.

“그대는 이미 충분히 그러고 있어.”

자물쇠가 가득 걸려 있던 그 산에서부터 이곳까지, 시오한은 유심히 이도하를 지켜보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하기만 하던 이도하가 그 산을 기점으로 좀 날카로워진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가 혹시 그가 짐작하는 것 때문이라면……. 좋지 않은 기억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면.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는데.

“나는 아주 안전하고, 평안해. 마음이 놓여. 이것 봐.”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고 제 심장 위에 댔다.

“그대가 이리 날 걱정하는데, 괜찮고말고.”

이도하가 씩 웃었다. 쪽, 그가 시오한을 당겨 뽀뽀했다.

마침내 집에 다시 들어왔을 때가 아주 늦은 시각이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트에 장을 보러 나갔다가 계획에도 없던 서울 투어를 한바탕하고 돌아온 뒤였으니. 시곗바늘은 자정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그쯤 되니 밤이 없는 듯 별도 보이지 않게 밝기만 하던 이곳도 아주 조용해졌다.

스으윽, 소리 없이 열리는 창문에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던 서련이 멈칫했다. 그의 옆으로 웬 남자가 몸을 욱여넣고 또 고개를 내밀었다. 또 다른 암군의 계약자-드리시니언이었다. 왜 서련이 들어가지 않고 있는지 답답해 일단 몸부터 들이밀었던 그도 시오한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암긴 이도하도.

쉬-

황제가 소리 없이 입술 위로 손가락을 세웠다. 뭔가 말하려던 드리시니언이 꾹 입을 다물었다. 황제의 시선이 밖으로 움직였다. 수신호까지 갈 것도 없이 아주 명백했다. 물러가란 뜻이다.

보고할 게 많았던 둘은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나 달리 어찌할 것인가. 이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서련이 먼저 몸을 빼고, 드리시니언이 묘한 눈으로 잠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황제는 이미 그를 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주 고요한 광경이었다. 황제의 어깨에 기댄 이도하는 아주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서늘한 눈매만큼이나 차갑고 매섭게 그를 보았던 얼굴은 몹시 평온해 보였다. 열린 창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스며들었고, 황제는 좀 더 꼼꼼히 그의 어깨 위로 이불을 여미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살이 좀 더 내린 것 같은 몸을 보듬어 안는 황제의 손길은 극진하고 조심스러웠다. 잠든 얼굴을 덧그리는 손길이 감히 솜털이라도 건드릴까 머뭇댄다. 행여나 그의 잠을 방해하기라도 할까 봐. 멀어지지 못하고, 그러나 더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드리시니언에게는 생소하고 낯설어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이도하에게 고정되어 있던 황제가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찔끔한 드리시니언이 얼른 몸을 뺐다. 시오한이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두 남자가 몸을 들이밀었다가 빠진 창문은 딱 그만큼 열린 채였다. 지상에 즐비한 빛이 비친 밤하늘이 푸르스름하다. 가장 가까운 가로등 하나만 창문 귀퉁이에 조금 걸려 있었다.

시오한의 황금색 눈동자에, 아주 잠깐 푸른빛이 스쳤다. 열린 창문이 소리도 없이 스스로 스르륵 닫혔다. 시오한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제 손목에 묶인 푸른 리본에 잠시 머문 시선이 다시 이도하를 향했다. 내색하지 않았으나, 며칠 만에야 비로소 잠이 든 제 계약자를.

문득 그의 뒤에 받쳐진 고래 인형에 눈이 닿은 시오한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여전히 이도하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인형을 가늘게 쳐다보았다가, 소리 없이 슬며시 웃고는 고개를 숙인다. 이도하의 이마 위에 조심스레 입술을 누른 그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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