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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40화 (239/250)

외전 1-4화

산 위는 조금 더 추웠다. 곧 다가올 겨울에 한 걸음 미리 디딘 것처럼 공기가 싸늘했고, 그만큼 청명하기도 했다. 깨끗한 밤하늘 아래 펼쳐진 야경이 그린 듯 아름답다. 저 멀리 시선이 닿는 곳까지 무수하게 반짝이는 빛으로 가득한 전경이 있는 그대로 내려다보였다. 시오한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코트 위로 늘어진 황금빛 머리칼이 밤바람에 가닥가닥 휘날렸다.

“신기하네.”

시오한이 말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서울에 살았던 서울 촌놈 이도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남산에 온 것도 처음이고, 야경을 이렇게 본 것도 처음이었다. 남들이 남산 야경, 야경, 할 때도 별건가 했는데.

사실 이도하야 야경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그냥 구름 위에 앉아서도 볼 수 있었다. 내키기만 하면 언제든 볼 수 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와 보니 별것이었다. 남산이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싸늘하게 불어 옷자락이며 머리칼을 흔들어 대는 바람에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기분 좋다.

“그대의 세상을 이리 보니. 퍽 다르구나.”

“그런가?”

이도하도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오래된 옛날처럼 느껴지는 다른 세상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때맞춰 저를 불렀던 시오한과 함께 성벽을 넘어 걸었던 밤과, 성 위에 앉아 조그맣게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던 밤이.

확실히 이리스티리움 성도는 대제국의 수도답게 밤에도 완전히 잠들지 않아 반짝거리는 빛이 남아 있었지만, 이 도시에 비하면 고즈넉하고 아기자기하다고 할 만 했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전도 아닌데, 꽤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 새삼 간지러워 픽 웃음이 난다. 이도하도 시오한도 잠시 말없이 야경만 내려다보았다. 이도하가 문득 가슴을 문질렀다. 속이 일렁여 알 수 없는 기분이 들 때 그가 으레 하듯이. 그게 제 감정인지, 시오한의 감정인지 모를 때 늘 그러듯.

“이게 뭐게.”

이도하가 가리킨 것은 주렁주렁 매달린 자물쇠였다. 어지간히 얽히고설켜 거의 한 덩어리의 고철처럼 보인다. 조명이 있지만 그래도 어두워서 자세히 보아야 그게 다 자물쇠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시오한이 쓱 주변을 훑었다. 짝을 이룬 남녀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데다가 자물쇠에 그려진 하트들, 알콩달콩한 색의 자물쇠, 그린 듯한 야경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는 낭만적인 장소.

“글쎄, 뭐지?”

시오한이 전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살짝 제정신이 아닌 이도하는 의기양양해졌다. 그는 아까부터 ‘뭘 모르는’ 시오한을 아주 즐기고 있었다.

“저게 사…….”

이도하가 멈칫했다. 시오한이 그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잠깐 제 어설픈 지식을 미심쩍어 한 후에,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이도하가 그냥 말했다.

“사랑의 자물쇠야.”

“그래?”

시오한이 한껏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 짐작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오한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말했고 그건 아주 정성스러워 이도하는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여기서 저 자물쇠를 채우면 영영 헤어지지 않는대.”

그 말을 하는 이도하는 좀 전과는 달리 고철 덩어리 같은 자물쇠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시오한이 슬쩍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이도하가 말했다.

“우리도 하자.”

“응?”

“우리도 저거 하자.”

이도하는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노란 눈이 땡그란 용 인형을 옆구리에 착실히 끼고서, 이도하와 시오한은 함께 기프트 숍으로 쳐들어갔다. 이도하와 시오한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싹 비워졌던 시프트 숍이 다시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단숨에 파란색 자물쇠를 하나 골랐다. 네모 반듯한 모양에 앙증맞은 하트가 그려져 있다. 시오한은 이도하가 좋다면 뭔들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자물쇠를 고르고 결제까지 모두 일사천리였다.

주변에 우글거리며 그들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이제 이도하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시오한이야 원래 날 때부터 시선과 기척에 익숙한 이라서 둘의 행동에는 아주 거침이 없었다.

“이름 쓰면 되는 건가.”

이도하는 아주 신중한 얼굴로 조막만 한 자물쇠 위에 열심히 제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절 지켜보는 시오한에게 자물쇠와 펜을 내밀었다. 이도하의 얼굴을 한번 본 시오한이 자물쇠를 받아, 느릿느릿 제 이름을 적었다. 이도하는 알아볼 수 없는 글씨였다.

저쪽에서는 그냥 자연스럽게 읽히던 것이, 특혜가 발휘되지 않는 이곳에서는 곧이곧대로 꼬부랑 글씨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쓰는 거였구나. 이도하가 시오한의 이름을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그동안 시오한은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자물쇠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상해?”

이도하가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 마음에 들어.”

시오한이 짧게 웃었다.

“미신 같은 걸 믿는 편은 아니었는데, 발상이 독특하네.”

긴 손가락이 작은 자물쇠를 어루만졌다. 주변을 둘러본 이도하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자물쇠를 걸었다. 엮인 자물쇠들이 하도 많아서, 잠깐만 눈을 돌려도 어디에 걸었는지 잊어버릴 모양새였다.

어쨌든 단단히 걸려 있기는 하다. 꽤 만족스럽게 바라본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열쇠를 주었다. 하트가 그려진 새파란 열쇠는 작고 단순해 꼭 장난감 같았다. 시오한의 손끝에 들리니 특히 그림체가 달라 꼭 장르를 침범한 느낌이다. 이도하의 손이 그 위를 덮었다.

“자, 이제 여기에…… 아니. 나한테 맹세하게 하는 거야, 시오한.”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당신을 놓지 말라고 해. 어떤 선택 앞에서도, 다 필요 없고 그냥 당신만 선택하라고.”

까만 눈동자에, 언뜻 푸른빛이 맴돈다.

“날 속박해.”

시오한은 그 눈에 비친 절 알아보았다. 묘한 얼굴이었다. 그의 눈으로 보는 저와, 제가 보는 제 얼굴이 같을까.

“……어찌 내게 그런 허락을 하려고 해.”

시오한이 말했다. 그의 얼굴에 뚜렷하게 음영을 드리운 조명이 바람에 흔들렸다. 나무가 흔들리며 그림자를 흔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 달콤하게.”

그리하여 내가 그대로 하여금- 그대에게 마땅한 무엇을 저버리게 만들 줄 알고.

“내가 없는 세상에 두지 말라며. 나는?”

“…….”

“네가 있는 세상에서 숨 쉬는 게 어떤 건지 알려 줬잖아. 나도 못 해. 못 살아. 그러니까 행여 날 위해서라는 그런 것도 잠깐 치워 놓고, 그냥 이기적으로.”

“화이람.”

“널 놓지 말라고 해.”

이건 그저 느낌이었고…… 어쩌면 불안이었다. 비틀린 시간, 인지조차 하지 못했던 세상의 오류. 그런 게 있는지조차 몰랐으나 사실은 복잡하게 꼬여 어디를 풀고 어디를 잘라 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두 세계의 이해관계. 제 세상이 돌아가는 꼴.

이 모든 것들이 밀려들어 오며 고이다 마침내 찰랑, 하고 발목에 닿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저 무시하고 걸으면 그만이다. 조금 거슬리고 불편할 뿐 위협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걸 내려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결국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때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툭, 시오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가 눈을 감았다.

“야경이고 자시고, 당신이 있어야 의미가 있어. 네가 있으니까 예쁘다.”

“…….”

시오한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커다란 손이 이도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시오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은 그래, 화이람.”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대가 있어 나는 황제이고…… 그대가 있어 내 나라도 있어. 전부 다 그대로 인해서, 그대에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그대를 만나기까지 아직 그 아홉 살의 시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그대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거든.”

나지막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들었다. 어차피 죽었던 목숨이었다. 나라도, 세계도 이미 다 그에게는 의미 없었다. 그저 그 바람 하나였다. 너에게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널 만났을 때, 네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해 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때 네게 해 주지 못했던 것들, 네가 보여 줬던 세상, 그 평온을…… 이번에는 제가 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내 세계는 다 그대야,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그러니…… 그대가 허락하니 감히 말하건대.”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이도하의 귓가에 닿았다. 안 보는 척 생색만 살짝 내는 것인 양 간격을 두고 멀찍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가지 마, 화이람.”

그가 말했다.

“가지 마.”

조금 더 이도하를 감싸 안으며.

“내 곁에 있어, 화이람. 어디에도 가지 말고…… 내 곁에만 있어. 그런 그대가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온 힘을 다할게. 그걸 맹세할게.”

한 마디 한 마디를 거치는 소리의 떨림, 그 진동이 귓가를 타고 전해진다. 귓바퀴에 닿은 따뜻한 숨결이 등골을 타고 내달리는 것 같다.

“그러나 행여…… 어느 순간 그대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거든, 화이람.”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시오한의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그대를 위한 선택을 해.”

“……너.”

“그 선택이 나이길 바라는 것, 그것만 할게.”

이도하가 멈칫했다.

“내가 언제나 그대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 줘.”

아무렴. 이도하가 억눌렀던 숨을 내쉬었다. 아무렴 제가 그걸 모를까. 시오한은 이미 제게 한 번 똑똑히 보여 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스스로의 피로 흥건한 웅덩이 위에서. 그 순간 그가 어떤 마음으로 절 불렀는지 이도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심장이 뻐근하다. 마음이 아프다.

“그래.”

지그시 입술을 문 이도하가 이내 말했다. 그렇게, 그렇게 할게.

“맹세할게, 시오한.”

맹약이든 뭐든, 그 모든 걸 떠나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에는 절대로 널 놓지 않겠다고. 느릿하게 그의 뒷머리를 쓸어내리며, 시오한이 미약한 한숨을 내쉬었다.

“……화이람.”

“어.”

이도하가 대답했다. 시오한이 작게 웃는다. 화이람. 시오한이 다시 불렀고, 이도하는 다시 한번 대답해 주었다.

“좋다.”

시오한이 손을 미끄러트려 이도하의 등을 받쳤다. 조금 더 단단히 안는다.

“안아 줘, 화이람.”

이도하가 웃음을 흘렸다. 하라시면 하라는 대로 해야지. 그가 착실하게 시오한을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술렁대는 소리 따윈 이미 들리지도 않았다.

“꽉 잡아.”

“응.”

“너무 놀라지 말고.”

“응?”

이도하가 되물었다.

“조금 시끄러워질 것 같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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