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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39화 (238/250)

외전 1-3화

무엇도 이도하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시오한이 정말로 스스럼없이 그의 어깨에 다리를 걸치고 앉는다. 말리는 거 아니었어? 어디서도 보지 못한 이 이 희한하고 굉장한 광경에 사람들은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도하가 몸을 일으키고, 그렇지 않아도 평균보다 훌쩍 큰 시오한의 머리가 위로 쑥 올라간다. 어어, 어어어어, 자못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얼빠진 소리가 튀어나왔다.

위로 불쑥 솟은 황금빛 머리칼이 여봐란 듯 화려하게 휘날린다. 눌러쓴 모자는 쓰나 마나였다. 미쳤다, 미쳤다- 사람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이도하의 동그란 머리를 잡은 시오한이 시원하게 웃었고, 이도하도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위풍도 당당하게, 자랑이라도 하듯 시오한을 제 위에 태운 이도하는 번쩍거리고 북적거리는 명동 거리를 한참이나 돌아다니고야 마침내 그를 내려놓았다. 물론 그것도, 그대로는 어떤 가게도 들어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시오한의 황금빛 머리칼을 깃발처럼 나부끼며 돌아다닌 덕에 그들은 인근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은 뒤였다. 거의 멱살을 잡고 여기 좀 보라며 윽박지른 수준이었다. 헐리우드 대스타의 내한 현장을 방불케 하는 인산인해 속에서도 이도하는 시오한과 온갖 가게를 다 헤집고 다녔다.

이도하가 황제와 함께 로드 숍에 들어갔는데 그들이 나올 때는 황제의 새끼손가락 손톱에 웃기는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든가, 이도하의 뺨에 발그레하게 뭔가가 발라져 있다든가. 편집 숍을 한 바퀴 돌고 나오니 도대체 영문을 모를 둘 사이의 줄넘기 줄이 웬 리본으로 바뀌어 있었다든가, 웬 신발 가게에 들어가더니 나란히 같은 신발을 신고 나왔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덩치가 문짝만 한 남자 둘이 조그만 달고나 가판 앞에 앉아 얼마나 치열한 현장을 벌였는지 등이 실시간으로 속속들이 퍼져 나갔다.

이도하와 황제가 어떤 모습으로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지부터 시작해 자동문에 황제가 조금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이도하가 거의 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웃었다, 뭐 그런 것들까지 포함하여 아주 상세했다.

“시오한, 이거 해 볼래?”

이도하가 시오한을 당겼다. 인형 뽑기 기계 앞이었다. 한동안 우후죽순으로 마구 생겨나다가 금세 시들해지면서 다 사라졌다더니. 그 유행의 물살에서 살아남은 기계인 듯 구석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도하가 주머니를 뒤졌다. 낮에 문방구에서 쓰고, 돌아다니면서 군것질을 하고 남은 천 원짜리 몇 장만 주운 낙엽처럽 꼬깃꼬깃 손가락 사이에 끼여 나왔다. 펴고 보니 세 장밖에 없었다. 이도하는 죄다 아낌없이 기계에 먹여 주었다.

“이걸로 저 집게 움직이고, 이거 누르면 내려가거든? 집어 올리면 되는 거야.”

이도하가 설명했다. 흐응, 시오한이 흥미롭게 기계를 훑었다. 그가 손에 든 딸기 탕후루를 입에 물었다. 돈을 받아먹은 기계는 흥겨운 음악 소리를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시오한이 신중하게 버튼을 눌러 보았다. 집게발이 뱅글뱅글 돌며 나아간다. 구석에 박힌 인형을 향해서였다.

아- 관중들 사이에서 탄식과 기대 어린 감탄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 집게발만 혼자 흥겹게 인형을 향해 낙하했다. 흐응,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집게발은 맥이라고는 없었다. 단단히 집은 것 같던 집게발은 인형의 머리통만 연약하게 슥 쓰다듬고 올라왔다.

“과연.”

물고 있던 탕후루를 쏙 뽑아 먹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다른 세상이라지만 시오한도 화폐 가치 정도는 대충 알고 있었다. 고작 천 원으로 저런 인형을 하나씩 다 뽑을 수 있다면 그건 영 수지가 맞는 장사가 아닌데 싶더라니, 역시나였다.

“다른 거 해 봐, 앞에 있는 거.”

실패에 익숙하지 않을 사람이 하찮게 실패하는 모습은 몹시 귀여웠다. 딸기 탕후루를 든 시오한이 오색으로 반짝거리는 기계 앞에 서 있는 것을 즐겁게 바라보던 이도하가 훈수를 두었다.

“저 인형이 귀여운걸. 까맣고 노란 게 그대와 나를 반반씩 닮았잖아? 귀여운 건 그대를 닮았네.”

시오한이 인형 뽑기를 하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 인형 같은 것엔 별생각도 없던 이도하가 다시 보았다. 과연 그 말처럼 구석에 콕 박힌 인형은 털이 까만색이요, 땡그랗게 뜬 눈은 노란색이었다. 까만색이야 다 거기서 거기라 해도 저 노란색을 두고 시오한의 황금빛과 닮았다고 하는 건 몹시 어폐가 있어 보였다.

이도하가 시오한을 보았다. 눈웃음을 지은 그가 탕후루를 기울여 준다. 이도하가 홀린 듯 입에 물자, 시오한은 탕후루를 놓고 다시 기계에 본격적으로 손을 올렸다.

연이은 두 번도 물론 실패로 이어졌다. 시오한의 위치 선정은 기가 막혔지만, 그도 집게가 힘을 주지 않아서야 다 무용지물이었다. 흥겨운 음악과 반짝이는 조명이 꺼지자 시오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기분 탓인지, 조명 탓인지 좀 시무룩하고 아쉬워 보인다.

이도하의 눈에는 그랬다. 이 사람이 포기를 모르는 사람인데……! 소환도 서른 번이 넘게 했던 사람인데, 고작 세 번은 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이도하가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그래 봐야 없는 지폐가 뿅 하고 나타날 리는 없었다.

제 카드는 전등이 다 부서진 마트 바닥 어디엔가 널브러져 있을 것이고, 이 카드는 남의 신용카드이니 현금이 솟을 구석도 없다. 별수 없지. 시오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체념의 몸짓을 모두가 읽었다. 그리고 누군가 소리쳤다.

여기 현금 있어요-!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관중 속에서 누군가 현금을 든 손을 휘젓고 있었다. 노르스름한 것이, 무려 오만 원이다.

술에 취한 이도하에게 망설임이라고는 없었고, 욕구는 분명했다. 이도하가 즉시 튀어 나갔다. 이도하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즐거운 비명과 감탄이 튀어나온다. 핸드폰이 코앞에서 저를 찍어 대든 말든 이도하는 바빴다.

“전화번호 줘요, 갚을게요.”

“오다 주운 거예요!”

갚기는 무슨! 오만 원권을 오다 주웠다는 이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은 시원하기도 이를 데가 없었다. 이도하와 별로 나이 차이도 나 보이지 않는 사람은 손자의 손에 용돈을 쥐여 주듯 그의 손에 오 만원을 욱여넣었다.

잠깐의 실랑이 끝에 이도하는 이 사람의 핸드폰에 사인을 해 주는 것으로 타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지체 없이 오만 원을 기계에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온 우주가 돕는 듯한 관중들의 응원 속에서, 시오한은 스물일곱 번째 시도 끝에 인형을 이도하의 품에 안겨 줄 수 있었다.

“우리 아이 같네.”

시오한이 즐겁게 말했다. 이도하가 제 품에 안긴 인형을 한 번 더 내려다보았다. 까만 머리통에 노란 눈이 얼핏 보인다. 우리 아이……. 이도하는 잠시 잠깐 그 생각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사이에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탕후루 막대를 가져갔다. 그가 막대를 옆으로 들고 중간에 어중간하게 걸린 마지막 딸기를 깨물었다. 모양 좋은 입술 사이로 얇은 설탕 막이 깨지고, 반들반들한 딸기가 짓뭉개져 들어가는 것을 이도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화이람, 먹겠어?”

시오한이 물었다.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 먹어.”

그가 눈을 접었다. 조금 남은 딸기가 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맛있네.”

꿀꺽, 이도하가 침을 삼켰다. 실낱같은 이성을 붙든 손아귀 아래 인형의 앙증맞은 날개만 무참하게 구겨졌다. 돈이 남은 기계는 여전히 삐용삐용 흥겨워하고 있었다. 인형 뽑기 기계가 남은 잔돈을 거슬러 줄 리도 없었다. 그러나 둘 다 더 이상 기계에는 볼일이 없었다. 대제국의 황제와, 어느샌가 경제 관념을 거의 잃어버린 인소더블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먹을 게 천지에 널린 명동 길거리는 이 두 사람에게 뭐라도 먹여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대학가 앞에 이도하와 함께 불쑥 나타난 게 당연히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일 리는 없으니 사실 그 유명한 FBI의 레무스 비숍이다, 했던 눈 가리고 아웅에 코웃음을 치던 것도, 세간에서 이도하를 둘러싼 몇 가지 논란에 시시때때로 떠들어 대던 것도 모두 잊은 듯했다.

그런 건 집에서 컴퓨터 앞에 앉을 때나 생각나는 것이고, 막상 아름답고 잘생기고 그저 눈이 보기에 몹시 즐거운 두 사람이 붙어 있으니 아주 흡족할 뿐이다. 그러니 저 둘의 입에 맛있는 것을 넣어 줘야겠다, 하는 식이었다.

다진 고기와 양배추를 쌈처럼 말아 계란과 함께 구운 다음 두 가지 소스를 살살 뿌린 만두. 노릇하게 익은 속살에다가 치즈를 살살 뿌린 랍스터며 각종 꼬치에다가, 요란한 모양으로 꼬아 놓은 회오리 감자를 비롯해 구운 조개까지.

그 모든 것을 아낌없이 맛본 이도하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본래 먹는 것에 그리 관심이 있지도 않고 배가 부른 느낌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먹어 본 건 탯줄 떨어지고 처음인 것 같다. 숨 쉬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아, 힘들어.”

시오한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이도하가 투덜거렸다. 덜컹. 매끄럽게 미끄러지던 케이블카가 흔들리는 바람에 삐끗 떨어지는 고개를 시오한이 재빨리 받쳐 주었다. 그의 손에 고개를 맡겨 두고서 이도하가 흐흥, 하고 웃었다.

이쯤이면 술이 깰 법도 했으나, 길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다 흥겨움에 벅차 그들은 포차에서 또 한잔한 참이었다. 평소답지 않은 웃음에 시오한이 나직이 웃는다. 흘끔, 창밖으로 시선을 한번 준 그가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말했다.

“걸어서 갈 수도 있는 듯한데. 걸어갈 것을 그랬나 봐.”

“아냐, 남산을 왔는데 케이블카는 타야지. 이거 코스라고.”

이도하가 번쩍 고개를 들더니 대뜸 시오한의 뺨을 착 쥐었다. 시오한이 놀란 것처럼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았다. 당겼다가, 찌그러트렸다가, 또 늘렸다가. 이도하가 그의 얼굴을 찹쌀떡처럼 주물렀다. 얼마 없는 살이 늘어나 봐야 그 이목구비가 어디 갈 리가 없었다.

“진짜 뭐지.”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어찌하여?”

“너무 좋아서. 좋아 죽겠는데.”

시오한이 눈을 접었다.

“하면 뽀뽀해 주나?”

“해 주지, 해 주지 그럼.”

이도하가 쪽, 그의 입술에 뽀뽀했다.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음, 짧은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한 듯 이도하가 몇 번 더 연달아 입을 맞췄다. 시오한이 제 뺨을 잡은 이도하의 손 위로 손을 겹쳤다. 덜컹, 케이블카가 목적지에 도착하는 흔들림을 느낀 후에야 두 사람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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