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제가 방금 동기 앞에서 당당하게 커밍아웃을 했다는 사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기야, 멀쩡한 이도하도 제가 아무래도 게이인 것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태연하게 했으니 취한 지금은 더 거침없는 것도 당연하다. 물론 저런 얼굴이라면 저라도 게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우, 새끼. 기다려 봐. 소곤거린 윤윤형이 눈도 들지 못하고 시오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재빨리 방으로 달려가 지갑을 가지고 왔다. 그 잠깐 사이에 이도하는 시오한과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둘이서 그렇게 붙어 있으니 정말 그림 같았다. 히야. 감탄하며 서 있는 윤윤형을 이도하가 먼저 발견했다. 그가 성큼 다가와 윤윤형에게서 카드를 받아 들었다.
“야, 너…….”
“뭐.”
“치킨 꼭 사 먹어라. 삼겹살도. 아니, 갈비 먹어. 갈비야.”
그리고 윤윤형은, 저 황제님의 눈에 띄지 않게 소심한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뭘 할 수 있는 자본금을 얻었다는 사실에 희희낙락한 이도하는 제가 데리고 온 황제와 함께 그의 자취방을 나섰다.
삐빅- 도어록 소리가 나며 문이 닫히자 윤윤형은 멍하니 제 자취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이 공간에 조금 전까지 그 이리스티리움의 황제가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와.”
윤윤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다시 한번 중얼거리며, 그가 고개를 저었다.
“와, 저게 찐 황제구나. 와.”
분위기 뭐야. 혀를 내두른 그는 다시 제 안락한 매트리스 위로 돌아갔다. 태양을 정면으로 한번 바라본 것처럼 그 잔영이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시오한 오르페노스. 그는 어느샌가 인터넷에 황제의 이름을 검색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 근데 잠깐만. 데이트를 한다고?”
어디서? 여기서? 대한민국에서? 지금? 그 황제님을 데리고?
“……허?”
***
“왔다.”
“그러네.”
이도하가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점잖게 웃은 시오한은 그를 조금 뒤로 끌어당겼다. 이미 거의 도로에 내려서 있던 이도하가 속절없이 끌려오며 어리둥절하게 시오한을 본다.
“왜?”
“위험해, 화이람.”
“고작 버슨데 뭘. 퇴근 시간이라 빨리 안 타면 자리 없어.”
그러면서 이도하는 정말 마음이 급한 것처럼 시오한을 이끌었다. 빛을 번쩍이며 저쪽에서부터 꽤 육중한 기세로 가까워지는 거대한 버스를 향해. 물론 저 거대한 것에 치인다고 해도 으스러지는 것은 제 계약자가 아니라 버스일 것을 시오한도 잘 알고 있었다.
음, 시오한은 말없이 웃으며 그냥 이도하에게 끌려가 주었다. 꼭 이도하가 아니더라도 그 역시 저런 쇳덩어리쯤은 치워 버릴 수 있었으니. 뭐가 어찌 됐든 네가 이리 신나 하니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하는 식이다. 달래는 시늉을 하기는 했다.
“그리하지 않아도 우리가 가장 먼저 타게 될 것 같은걸.”
그야, 그들의 주변으로 둥그렇게 사람들이 몰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든 얼굴들이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레 뜬 게, 흡사 코끼리의 거사라도 목격한 것 같은 얼굴이다. 버스를 타는 일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 것 같았다. 그사이에 버스가 그들 앞으로 와서 끼익, 섰다. 이도하가 재빨리 시오한의 손을 잡고 버스에 훌쩍 뛰어올랐다.
그렇게 서두른 것이 무색하게 버스에는 이미 자리가 없었다. 빈틈없이 꽉 찬 좌석 말고도 이미 절반 정도가 차 있었다. 이도하는 아쉬운 기색 없이 열심히 시오한을 끌고 창가로 갔다.
그 와중에 키가 크고, 이렇게 사람으로 가득 찬 좁은 곳에 익숙하지 않은 시오한은 버스 손잡이에 두어 번 머리를 얻어맞았으며, 누군가의 가방에 치여 물러서다가 또 무언가에 걸려 휘청거렸다. 매번 아야, 어어, 아이쿠,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제 덤벙대는 모양새를 아낌없이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해, 바보야.”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리며 달랑달랑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에 위협받고 있는 시오한의 머리를 감싸 주었다.
어떤 이들이 죽을 각오로 칼을 휘둘러도 머리칼 한 올 잘라 내지 못했던 시오한이 어째서 고작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가방 따위에 부딪히는가, 하는 당연한 사고는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저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니, 시오한은 아픈 얼굴로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며 이도하의 손안으로 움츠리는 것이다.
그들 뒤로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고, 남은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시오한은 나풀거리는 낙엽처럼 힘없이 선뜻 밀려 이도하에게 딱 붙었다. 그리고 웃어 대던 이도하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이리스티리움이라는 대제국의 제1기사인 시오한이 가만히 있는 가방에 부딪히는 건 안 이상해도, 그 대제국의 황제인 시오한이 도떼기시장처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 틈에 빈틈없이 끼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게 생각된 것 같았다. 시오한이 너무 사람들과 붙지 않도록 자리를 잡아 주며 이도하가 시오한의 옆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이도하는 그렇지 않아도 눈매가 서늘해 인상이 차가운 편이었다. 이성이 썩 또렷한 것 같지 않은 눈이 번뜩이자,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 몇이 저도 모르게 움칠 몸을 떨며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그들로서야 당연히 몹시 억울한 일이었다. 이도하와 시오한을 따라 홀린 듯 탄 사람들이 절반이요, 정말로 목적지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탄 사람들이 절반쯤 되는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어쨌든 서로가 서로의 사이에 낀 것은 그들이야말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으니.
게다가 시오한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끼여 있지도 않았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으나, 시오한의 앞에 앉은 사람은 한껏 몸을 움츠리고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동공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고, 그건 그의 주변에 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조차도 이해할 수 없지만, 동시에 또 정말 알 것 같은 이유로 이 주변 사람들은 행여나 이 인간 같지 않은 사람에게 닿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감히’ 닿으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 와중에 저렇게 무슨 파렴치한 하이에나라도 보듯 눈을 번뜩이고 있으니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화이람, 저게 뭐지?”
“응?”
시오한의 물음에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닿아 걸리적거리는 손잡이 아래로 고개를 숙인 시오한이 흥미롭게 창밖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하철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저거 지하철.”
“아, 지하철.”
“알아?”
“그럼, 화이람. 알다마다. 내가 바본가?”
시오한이 장난스레 눈을 휘며 웃었다. 묘한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린 이도하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퇴근길은 당연히 꽉 막힌 교통체증의 연속이었다. 섰다, 갔다, 그렇지 않아도 정류장에 멈춰야 하는 버스는 지지부진하게 굴러갔으나 썩 지루할 것도 없었다. 누가 봐도 좀 들떠 보이는 이도하는, 주변에 은근히 귀를 기울인 사람들이 원래 이도하가 저렇게 말이 많은가, 할 정도로 쉴 새 없이 보이는 모든 것을 설명해 댔다.
저게 우체국이고, 저건 졸라 비싼 찬데, 저긴 제가 가 봤고 어쩌고.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정보들의 향연이었다. 그리고 시오한-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엄청난 신의 계시일 것 같은 이 사람은 그 모든 것들이 정말 대단한 것들이라도 되는 양 사소하고 하찮은 것에도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는 것이다.
“어…….”
“화이람, 왜?”
“와, 여기 명동이네.”
마침 버스가 어느 정류장에 멈춰 선 참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는 눈이 시릴 정도로 번쩍번쩍했고,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몇 명이 내리긴 했지만 버스는 여전히 꽉 차 있었다. 게다가 거기에 또 타려는 사람들의 시도로 점점 인구가 과밀해지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세요! 자리 없어요!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와 거리에서 쩌렁쩌렁 들려오는 소리로 시끄럽고 정신 사나운 가운데, 갑자기 이도하가 홱 몸을 돌렸다.
“내리자!”
“응?”
꽉 막힌 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이도하가 멧돼지처럼 튀어 나갔다. 억! 윽! 밀쳐진 사람들이 구겨지며 괴로운 소리를 냈고, 막 닫히려던 문이 삐익-! 험한 소리를 내며 이도하의 어깨에 퉁겨 탕, 열렸다.
이도하는 뱉어진 것처럼 버스에서 튕겨 나오다가 인도에 발이 탁 걸렸다. 뒤따라 뱉어진 시오한이 재빨리 그런 이도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요란한 하차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도하? 이도하 아냐? 이도하다. 헉- 뭐야? 수군거림이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나 여기 처음 와 봐.”
이도하는 제가 퍽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다는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로 꽉꽉 차 있던 버스에서 삐질삐질 난 땀에 붙은 머리칼을 시원하게 쓸어 올리며, 그가 퍽 들뜬 기세로 말했다.
시오한을 보며 훤칠하게 드러난 얼굴로 웃는 게 몹시도 상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주변에서 핸드폰 카메라의 셔터 음이 미친 듯이 이어진다. 음, 시오한이 가만히 웃으며 엉망이 된 그의 머리칼을 차분히 가다듬어 주었다.
“어떤 곳이기에?”
“당신 같은 외국인 많은 곳. 진짜 사람 개많네. 이리 와 봐, 내가 목말 해 줄게.”
이도하가 대뜸 허리를 접었다. 생각이 머리를 스치면 필터 없이 즉시 행동에 옮기는 양 도통 행동에 예고라거나 기미가 없었다. 곧바로 엎드려 시오한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넣을 기세였으나 그보다 시오한이 좀 더 빨랐다. 엎드리지 못하게 얼른 이도하를 잡은 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시도에 실패한 이도하가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뚱하게 시오한을 올려다봤다.
“안 그럼 당신 막 여기저기 치인다니까?”
조금 전에 저야말로 멧돼지처럼 이 사람 저 사람을 치었고, 시오한이 그런 저보다도 더 크다는 건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의 주변으로 순식간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들 주변에 무슨 금이라도 그어져 있는 것처럼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으니 그건 참 무색한 걱정이었다. 이쯤 되면 사실은 그냥 목말을 태워 보고 싶은 게 더 진심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시오한이 말했다.
“그러다 다쳐, 화이람. 난 여기 있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걸.”
그가 상냥하게 말했고,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그가 좀 이상한 이도하를 상냥하게 달래는 줄 알았다. 키가 훌쩍 큰 성인 남자 둘이서 목말이 웬 말이냐고.
그런데 이도하는 이미 알았어, 알았어, 하며 시오한에게 등을 보이고 앉아 그의 손을 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