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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37화 (외전) (236/250)

외전 1-1화

Hidden Track. 남산

그날 윤윤형은 평소와 다름없는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물론 낮에 남다른 일이 좀 있기는 했다. 이도하가 갑자기 학교 앞에 나타났니 뭐니 소문이 분분했던 것이다. 그것도 혼자 나타난 게 아니라 엄청나게-이주연의 말에 따르면 정말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엄청나게 ‘아름다운’ 남자랑 같이 나타났다는데. 그게 저 다른 세계 이리스티리움의 황제라느니 어쩌느니.

이주연이 소식을 전하고자 우당탕 쳐들어왔을 무렵, 윤윤형은 과방에서 한가하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는 문을 부술 것처럼 들어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와다닥 쏟아 낸 이주연의 말을 단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좀 무서울 정도로 흥분해서 왁왁거리니 정신이 없어 헤, 하고 고개만 끄덕인 것이다. 그래서 이주연을 비롯한 그녀의 동기들이 얼레벌레 쏟아 낸 말들은 인터넷을 보고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제 동기 이도하가 한 건 했구나, 하고. 또.

인소더블이니 뭐니 하지만 사실 윤윤형이 이도하에게서 그런 걸 실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도하가 계약자가 되었을 때 한동안 이도하가 어떤 동기였나, 어떤 사람이었나 하는 질문들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었다. 처음엔 제법 성심성의껏 대답했던 그는 좀 나중에 가서는 시큰둥하게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아, 졸라 잘생긴 동기요.

그건 정말 윤윤형이 생각하는 이도하에 대한 감상의 압축이자, 첫인상이기도 했다. 그가 갓 입학해 새내기가 되었을 때 학교는 아주 전체적으로 들떠 있었다. 이도하 여기 들어왔대, 이도하가 우리 과래, 이도하가 우리 동기래, 로 설명될 수 있는 설렘이었다.

세상에 단 셋뿐인 인소더블. 그중 물리력을 갖추었다고 평가되는 유일한 인소더블 이도하는 그도 익히 알고 있었으니, 윤윤형도 좀 설레기는 했다.

그리고 마침내 MT에 참석하러 온 이도하를 보았을 때, 인소더블이고 뭐고 윤윤형은 이 생각밖에 안 들었다. 와, 졸라 잘생겼네. 대충 패딩 하나에 편한 청바지만 걸쳤을 뿐 멋을 부린 것도 아닌데 정말 모델처럼 근사하고 멋있었다. 얼굴이 저런데 키도 커, 그런데 거기다가 인소더블이야. 다 가졌네.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좀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좀 다른 세상 인간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도하와 어떻게 해서 말을 트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뭐, MT에서 흔히 그렇듯이 술 취해서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가, 다시 정신 차리고 그냥 말 섞는 동기 1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말을 트고 나니 이도하는 잘생겼지만 좀 허술하고 맹한 구석이 있는 동기 1이 되었다.

차갑고 서늘하게 생겼고 매사에 시큰둥하지만, 또 뭘 하자고 하면 의외로 잘 따라와 주는 이 동기가 인소더블이라는 사실은 어느새 기억에서 잊혔다. 이도하는 기껏해야 바닥에 떨어진 펜을 줍거나 쓰레기를 꽤 먼 휴지통에 골인하거나 할 때, 하여간 아주 쓸모 있고 잡다한 상황에서 특기를 사용했다. 그건 꽤 부러운 일이었지만, 거기서 인소더블이라는 특별한 감상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이다.

이도하가 계약자가 되었다고 했을 때도 그렇구나, 했다. 새파랗게 빛이 나는 소환진을 처음 봤을 때는 오,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소환진? 하고 신기했지만. 그것도 하도 자주 보니 이 소환주가 여간 고집이 센 게 아니구나, 하게 되었다.

물론 그 소환진의 주인이 그 유명한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였다는 얘길 들었을 때는 새삼 우와,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도 윤윤형과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신기하긴 한데, 그것뿐인 것이다.

그런데 맙소사.

“물 좀 마시자.”

이도하가 익숙하게 신발을 훌렁훌렁 벗어 버리고 척척 걸어 들어오는 동안, 침대 겸 소파에 늘어져 있던 윤윤형은 일어나지도 못하고 입만 쩍 벌리고 있었다. 학교 앞에서 자취하는 마당발의 자취방이란 거의 모두의 자취방과 같아서, 그는 아무나 비밀번호를 띡띡 누르고 들어오는 일에 익숙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었다.

‘개안한다’는 그 표현을 윤윤형은 비로소 이해했다. 720p의 세상에 살다가 단번에 4k의 세상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교회는 물론이요 성당도 안 다니는데 어디서 성가대의 노랫소리 같은 게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와. 윤윤형은 이 단말마 같은 탄사조차 속으로밖에 하지 못했다. 빛이 걸어 다니네? 입을 쩍 벌리고 침대에 늘어진 채로 굳은 윤윤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도하의 뒤에 따라 들어온 이 빛 덩어리는 좀 흥미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윤윤형이 눈을 깜빡였다. 그가 고개를 조금 움직일 때마다 금실 같은 머리칼이 차르르 흘렀고, 그때마다 또 빛이 번쩍거렸다. 검은색 코트 위로 유려하게 흘러내린 머리칼 한 올 한 올이 눈을 찌르는 것 같았다.

어디서 종소리가 자꾸 들리지? 윤윤형은 생각했다. 그리고 우아하게 뻗은 황금빛 속눈썹 아래, 빛을 머금은 것 같은 눈동자가 그를 슥 바라보는 순간. 윤윤형은 헙, 하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너 뭐 하냐.”

이도하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에야 그는 끕, 하고 숨을 토해 냈다. 알아서 냉장고에서 물을 찾아 마신 이도하가 그들을 향해 돌아선 순간, 코앞에 거대하게 뜬 태양처럼 그를 짓누르고 있던 눈동자가 움직인 것이다.

“죄지었냐, 뭔 무릎을 꿇고 있어.”

윤윤형은 어리둥절하게 눈만 깜빡였다. 이도하가 퍽 한심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윤윤형은 어느새 제가 매트리스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공손하게 모은 제 무릎과 이도하를 보았다가, 그의 뒤에 선 우아한 구두 굽만 슬며시 보았다. 차마 얼굴을 볼 엄두는 나지 않는다. 그걸 세 차례 쯤 반복하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 현실이네?

“어, 뭐야. 시오한, 신발 벗어야 돼.”

“아.”

“아니다. 금방 갈 건데. 야, 이거 내가 치워 놓을게.”

“어? 어, 어.”

그깟 신발이야, 저도 급할 땐 그냥 막 신고 들어오는데 뭐가 대순가. 청소도 안 한 이 추레한 자취방에 지금 저 빛의 화신이 들어와 있는데 그깟 신발 따위가 대순가 말이다.

“아, 시오한. 얘 내 동기, 윤윤형. 여기 시오한, 내 계약주.”

이도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제야 시오한을, 그리고 윤윤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오한은 조금 흥미로운 기색으로 윤윤형을 보았다. 그가 이도하를 보며 입을 열어 무언가 말했다.

윤윤형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기이한 언어였다. 꼭 노래하는 것처럼 발음과 어조가 부드러웠다. 어쨌든 나지막한 목소리가 기가 막히게 좋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이도하가 말한 것처럼, 그런 그가 시오한이라는 것도. 시오한. 시오한 오르페노스.

“응, 뭐. 친구지.”

시오한 오르페노스. 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그러니까, 제 자취방에 그 대제국의 황제가 와 있는 것이다.

제가 초대한 것도 아니고, 이도하가 그냥 막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 같은 건 윤윤형의 머릿속에 없었다. 어떻게 오즈의 사람인 이리스티리움의 황제가 여기에 와 있을 수 있는지, 그런 게 가능한가를 따져 볼 생각 같은 건 들지도 않았다. 황제다. 만화나 소설, 뭐 그런 것도 아니고 드라마나 영화 배역도 아니고 찐 황제가, 제 차쥐방에 와 있는 것이다.

윤윤형이 눈을 번쩍 떴다. 흐어억! 그가 괴상한 소리를 냈고, 뭔가 얘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그를 돌아보았다.

“왜 이래.”

이도하는 윤윤형이 왜 이러는지 통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그를 보았는데, 윤윤형이야말로 이도하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매트리스에서 구르듯 내려온 윤윤형이 황급히 제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래 봐야 무릎 나온 바지에 목 늘어난 티라 정리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먼지만 퐁퐁 피어올랐다. 몹시 송구해진 윤윤형이 허리를 숙였다. 이게 엎드려야 되나, 절을 해야 되나, 뭘 해야 되나. 그는 혼란 속에 엎드린 것도, 엎드리지 않은 것도 아닌 괴상한 자세로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윤윤형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들어도 되나? 보통 고개를 들라고 하거나 일어나라고 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하던가? 황제를 섬겨 본 적이 없는 시민 윤윤형이 알 턱이 없었다. 이도하는 머리가 잔뜩 뻗친 윤윤형의 뒤통수를 멀뚱히 보다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시오한이 재미있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윤윤형, 일어나래.”

이도하가 대충 말했고, 윤윤형이 눈치를 보며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몹시 부끄러워하는 동시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아닌가. 연신 바지에 손바닥을 닦아 내는가 하면 흘끔흘끔 시선을 잘라 던지기도 하고. 얼굴까지 붉어졌다.

진짜 왜 이래. 이도하가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온화한 얼굴로 곱게 눈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물론 시오한이 황제이기는 하고, 좀 지나친 얼굴이기는 하지만,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 있는데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할 일인가 말이다.

“친구야, 나 카드 좀 빌려주라.”

“응?”

난데없는 침입에 이은 뜬금없는 요청에 윤윤형이 미간을 구겼다. 뭘 빌려줘? 흘긋 늘어진 시오한의 손끝만 한 번 간신히 본 윤윤형이 얼른 얼굴을 폈다. 그는 온 예의를 다해 공손히 웃음을 지으며 이도하를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갑자기 무슨 소리니 친구야.”

“나 홀랑 다 잃어버렸거든. 좀 빌려줄래. 데이트하게. 갚을게.”

“데이…….”

데이트? 윤윤형이 이도하를 다시 보았다. 데이트라고? 이도하가 뻔뻔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윤윤형은 그제야 이도하에게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차렸다. 취했구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도하는 아무도 모르게 거나하게 취하는 스타일이었다. 걸음걸이도 멀쩡하고 말도 꼬이지 않고 얼굴도 안 빨개지고 다 멀쩡한데 행동이 안 멀쩡해지면 그건 이도하가 취했다는 뜻이었다. 이도하가 의외로 좀 부끄러운 소리를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잘하는 성격이기는 하지만, 이 ‘데이트’까지 그 범주에 들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이도하는 취한 게 분명했다.

윤윤형이 슬쩍 눈을 굴렸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찬란한 누군가가 시선을 잡아끈다. 삐걱거리며 윤윤형은 조금 더 시선을 옮겼고,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끅, 윤윤형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분명 온화한 웃음을 띠고 있는데 머리끝이 주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되고 위압감이 들어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땀이 삐질삐질 흐를 정도였다. 어후. 부르르 한차례 몸서리를 치는 윤윤형을 아무것도 모르는 이도하가 쿡 찔렀다.

“갚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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