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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36화 (완결) (235/250)

236화

“뭐 해?”

김윤혜가 얼른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도하가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긴 검은색 코트 위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다. 어딜 봐도 나가려는 모양새였다.

“뭐야, 벌써 퇴근해요? 양아치네?”

“퇴근은 무슨 퇴근이야. 내가 여기 직원이냐.”

이도하가 대꾸했다.

“사람들이 다 그런 줄 알아요.”

“그런 줄 아는데 아니니까 난 간다.”

“와, 얄미워.”

“부러우면 인소더블 하든가.”

“와!”

주먹을 꽉 쥔 김윤혜가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힘과 권력 앞에서 주먹 좀 쥐어 뭘 하겠는가. 게다가 다들 그런 줄 알지만 이도하는 그의 말대로 진짜 아이라에 적을 두고 있지는 않았다.

2년 전 세계를 덮쳤던 대지진 당시, 이도하는 구조와 복구 활동의 선두에 섰다. 여태 절 드러내는 것에 부정적으로 비춰졌던 것과 달리 그는 적극적으로 매체에 나섰으며… 김윤혜가 보기에는 아이라와 매체를 엮어 교묘하게 이용하기까지 했다. 매사에 무심하고 시큰둥하던 그 이도하가 아니었다. 그는 거의 정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그는 굳이 따지자면 아이라의 자문 위원, 혹은 꽤 엄청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는 파트너십 정도의 위치이지, 직원은 아니었다.

진짜 그 우르슬라와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한 걸까. 김윤혜는 아직까지도 그게 궁금했다. 세간에는 시간에 간섭하는 특기를 가진 우르슬라가 미래를 봤고, 무언가 조언을 해 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녀는 일찍이 아이라를 떠난 인소더블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이도하가 같은 인소더블이라는 이유만으로 처음 만나는 사람의 조언을 듣고 그리 바뀌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날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에 대해서는 추측만 난무했다. 유일하게 그 자리에 있었던 목격자는…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고 저는 초콜릿으로 맞았다는 말만 하니 더 들을 말이 없었다.

“은호 또 학교 쨌다던데요.”

돌아서려던 이도하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3박 4일째 연구실에 박혀 있어요.”

“용돈 다 끊는다고 해.”

“아이라 밥 맛있잖아요. 이모들이 은호라면 없던 닭 다리도 만들어 주는 판인데.”

“밥도 주지 말라고 해.”

별로 소용없을 것 같은데. 신은호는 사막 오지에 떨어트려 놔도 석 달 열흘을 버틸 엄청난 적응력의 소유자였다. 친화력은 또 말도 못 한다. 와중에 고집으로는 이도하도 두 손 들게 한 전적이 있으니, 저래도 꿈쩍도 안 할 것이다.

두 사람은 마주치기만 하면 싸워 댔지만 그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누구든 보면 말릴 생각은커녕 오늘은 누가 이기나, 하고 내기를 하는 지경이었다. 어쨌든 공공연하게 알려진 이도하의 참지 않는 ‘도질머리’에 신은호만큼 박박 대들고도 꿀밤 한 대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흔치 않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었다.

“최준원 그 새끼, 애한테 오백 원이라도 주면 진짜 죽는다고 하고.”

“어, 뭐. 네.”

그쪽도 썩 말을 잘 듣는 쪽은 아닐 텐데. 매번 매를 버는 스타일이지. 아무튼 김윤혜는 그냥 대꾸했다. 이도하도 영 못 믿음직한 듯했으나, 어쨌든 가려고 한다.

신은호가 학교도 다 째고 3박 4일째 연구실에 박혀 있다는데도. 이쯤 되면 애 얼굴이라도 보고 한 대 쥐어박으며 좋은 말 할 때 들어가라, 으름장을 놓을 법한데.

“아, 잠깐!”

곧바로 도약으로 사라질 것 같은 이도하를 김윤혜가 잽싸게 붙잡았다. 보풀이 좀 일어난 코트 자락이 그녀의 손안에서 구겨졌다.

겨울이면 이도하는 이 검은 코트를 정말 신체의 일부인가 싶을 정도로 주야장천 입고 다녔다. 돈도 많으면서 왜 새 코트를 사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이 가끔 들기만 했을 뿐, 직접 물은 적은 없다. 김윤혜는 이도하가 코트를 입든 거적을 입든 상관없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주 이사가 무슨 브이로그 얘기 하던데, 뭐예요?”

“아, 그거.”

이도하가 약간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 그거였다. 그게 뭔데? 가 아니라! 김윤혜가 눈을 번쩍 떴다.

“진짜 해요?!”

“내가 아니고 유세오가. 난 특별 출연. 그래서 너도 특별 출연. 아마.”

“뭐요? 미친, 아니 그게 아니라. 이도하 씨 멀쩡한 거죠?”

어디 아픈 게 아니냐는 듯 김윤혜가 물었다. 눈이 푸르게 물드는 게 정말로 이도하를 자세히 보려는 기세였다. ‘걸리버의 눈’. 매의 눈이나 카메라의 렌즈처럼 자유롭게 사물을 줌인, 혹은 줌아웃 할 수 있는 그 특기를 김윤혜는 종종 의사 면허와 함께 잘 사용하고는 했다.

이도하가 김윤혜의 눈을 덮어 버렸다. 찔릴 건 없지만 동공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는 그 눈은 정말로 부담스러웠다.

“왜, 오진 인소더블에서 인간적인 이도하로 감성팔이 하기 딱 좋은데.”

인터넷 보는구나. 젠장. 김윤혜가 이도하의 손을 치워 냈다. 눈살을 찌푸린 김윤혜는 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왜.”

“껄끄럽다고요, 주 이사. 세오야 그냥 희희낙락하지만. 무슨 팬 관리도 아니고 괜히 그런 걸 계획할 사람이 아닌데.”

“…….”

이도하가 물끄러미 김윤혜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는다. 김윤혜가 있는 대로 인상을 쓰며 삭 머리를 빼냈다.

“아, 뭐 해요.”

“똑똑하다.”

“뭐래.”

“머리 좋고 능력 좋고, 믿음은 안 가고. 그럼 잘 써먹으면 되는 거지.”

“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이도하는 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김윤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얼굴이었다. 김윤혜가 아는 이도하는 매사에 무심하고 시큰둥하긴 했어도 이런 느낌을 준 적은 없었다. 그녀는 순간 저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깊은 동굴에서 새어 나온 서늘한 바람이 발목을 으슥하게 휘감고 지나간 것 같다.

“…큰일났다, 아이라 연구원 다 됐네, 속담으로 헛소리를 다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그녀가 던진 농담에, 이도하가 언제 그랬냐는 듯 픽 웃었다.

“최준원은요.”

“왜, 그 새끼도 껄끄러워?”

“한심한데요. 은호한테 묻을라.”

“깐죽거리면 강냉이 다 털어 버려. 너 주먹 세잖아. 그 새끼 근육은 다 멋 내기용이라 허접이야.”

“맞아 본 것처럼 얘기하네.”

어깨를 으쓱한 그가 돌아섰다.

“어디 가는데요?”

“약속 있어.”

“이도하 씨가요? 오늘 공식 일정도 없잖아요.”

“애인 만나러 가야 돼.”

“……네?”

김윤혜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말로 좀 들떠 보이는 듯한 이도하는 그대로 사라졌다.

***

뽀드득. 발아래 눈이 오독오독 밟힌다. 이도하는 목도리를 좀 더 여미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뿌연 입김이 구름처럼 곱게 피어올랐다. 바람 한 점이 없어 그대로 하늘로 떠오른다. 시선을 따라 옮기며, 이도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얇게 깔려 있어 하늘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흐리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저 위에 눈이 얇게 쌓인 또 다른 세상이 있는 것처럼 뽀얗기만 하다. 하아- 부러 입김을 한 번 더 피워 보며, 이도하가 슬며시 웃었다.

“…죽겠다.”

그가 가슴을 내리눌렀다. 속에 바람이 든 것처럼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아침부터, 아니 어제부터 내리 그러더니 통 가라앉을 생각을 안 한다. 뽀드득 밟히는 눈 위를 이도하는 조금 더 걸어갔다.

부서진 적 따위는 없는 말끔한 난간 위에도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눈송이 하나가 더 내려앉았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 날아온 건가 했더니, 어느새 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예쁘네.”

정말 더럽게 긴 시간이었는데. 영원히 오늘 따윈 오지 않을 것 같았고. 해야 할 일들이 많기도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절 바쁘게 몰아 댔는데도 시간이 흐르는 걸 보면 달팽이가 따로 없었다.

그가 고개를 내렸다. 아이라의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세상이 온통 하얗다. 주변이 죄다 나무라 원래도 그렇지만, 지금은 또 유난히 적막했다. 저 조그만 눈송이 하나하나가 잡다한 소리 같은 건 다 삼켜 버린 것처럼.

사박사박,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제가 숨을 내쉬는 소리,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다 유난히 크다. 후, 이도하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눈을 감은 그는 기다렸다.

드르륵, 바퀴 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 것 같다.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쇠가 마찰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여러 겹의 소리가 무수히 많은 층으로 쌓인 것처럼 미세하게 나뉘어 있다. 점점 좁혀진다. 그리고 마침내.

철컥.

태엽이 맞물렸다. 움찔, 손끝을 떤다. 이도하가 눈을 떴다. 검은색 동공 주변으로, 불길이 일어나듯 푸른 기운이 확 피어오르며 삽시간에 그의 눈동자를 덮었다. 우웅- 이명이 울리기 시작한다.

오밀조밀하게 쌓였던 조그만 눈송이들이 부르르, 떨더니 이내 하나둘씩 떠오른다. 바람이라도 불듯 까만 머리칼이 흔들렸으나, 동시에 가벼운 눈송이들은 휩쓸리는 기색도 없이 부유한다.

그 기이한 부조화 아래, 푸른 소환진이 쫙 펼쳐졌다. 새하얗던 주변이 온통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떠오른 눈송이가 그 빛을 머금어, 마치 소환진이 알알이 깨져 그 중심에 선 이도하의 주위를 꽉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우웅-

이명이 달아오른다. 주변뿐만이 아니라, 세상이 진동하고 있는 것처럼. 점점 더 빛을 발하는 소환진, 그 빛에 물들어 엉키고 맞부딪치는 눈송이들이 시야를 가린다. 시야가 완전히 푸른빛으로 뒤덮였다.

바스락- 무언가 몸에 스친다. 싸늘한 냉기 속으로 부드러운 훈풍이 섞여 들었다. 뽀드득 부서지는 눈이 아니라, 약간 축축하고 푹신한 것들이 무릎에, 손바닥에 닿았다. 이명 사이로 바람에 스치는 풀 소리 따위가 들려온다. 적막 위로, 차가운 향 위로 달큼한 향이 가볍게 덮인다. 뭔가 시야로 팔랑이며 지나갔다. 이도하는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

눈부신 초록빛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갓 돋아난 듯 연한 초록 잎들이 햇볕에 반들반들하게 빛난다. 조그만 꽃봉오리들이 이제 막 고개를 내밀었다. 차가운 겨울은 사라지고, 이곳은 봄에 다가서고 있었다. 여기에 멈춰 있었다.

화창한 하늘 아래, 그의 위로 소환된 이도하의 아래 그가 누워 있었다.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은 풀 위에. 햇볕에 반짝이는 황금빛 머리칼이 물결처럼 펼쳐져 있다. 잠든 것처럼 미동도 없다.

시오한이다.

아, 시오한이다.

“…시오한.”

이도하가 그를 불렀다. 잠긴 목소리가 다 갈라지며 간신히 흘러나왔다. 달큼하게 부르지는 못할망정 이게 뭐람. 얼굴을 찌푸린 그가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시오한.”

이도하가 다시 불렀다.

“나 왔어.”

잘 조각된 것 같은 그의 얼굴 위로, 이도하가 손을 가져갔다. 늘 빛줄기 같다고 생각했던 황금색 속눈썹 위로 그의 손끝이 스치는 순간, 그 옆으로 팔랑, 조그만 것이 떨어졌다. 둥그렇고 연약한 것이었다. 푸른 꽃잎이었다. 긴 속눈썹이 흔들렸다.

“눈 떠, 시오한.”

눈꺼풀이 움직인다. 이도하는 숨조차 멈추고, 어떤 경이에 사로잡혀, 그 아래로 황금빛 눈동자가 드러나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았다. 황금을 뿌려 놓은 듯, 얕은 파도에 금모래가 흔들리듯 일렁이는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 이도하는 웃었다.

“안녕.”

그가 움직였다. 손을 뻗는다. 유려한 손끝이 아주 천천히 다가와, 그의 눈 밑에 닿는 순간이었다. 화선지에 먹이 떨어진 듯, 그의 손이 닿은 곳으로부터 검은 선이 내달리듯 되살아났다. 또렷한 글자-오직 그만이 읽을 수 있는 이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황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마침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세계 속에서, 그가 입을 열었다.

“화이람.”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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