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연푸른 눈이 이도하를 보았다. 잠시 물끄러미 이도하를 본 그녀가 말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
<검색만 해 봐도 꽤 나올 텐데.>
<눈물이 많을 얼굴은 아니야.>
<…….>
<잘생겼네. 키도 크고.>
이도하는 잠시 말문을 잃었다. 나타나는 것부터 난데없더니 하는 말도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는 이도하를 또 가만히 보던 우르슬라는 고개를 돌려 신은호를 보고, 다시 이도하를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아주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울어 댄 게 쪽팔려서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재미없는데.>
<…쪽팔리기는요.>
이도하가 눈을 피하며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황당해서 그러지. 난데없이 불쑥 나타나니까.>
<운이 좋았던 것 같지는 않은데. 네 힘인가?>
우르슬라가 물었다. 절 알아보는 이도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 오두막으로 찾아온 이도하, 그녀의 무릎에 고개를 떨구고 몇 번이고 울었던 이도하, 제발 절 도와달라고 빌었던 이도하. 그 시간들이 없어진 지금, 멀쩡히 ‘쪽팔리지 않다’고 대답할 수 있는 이도하를 두고 하는 말.
<…뭐, 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잠깐 궁리하는 듯하던 이도하가 조금 입술을 비틀었다. 해밀턴 블랙. 그의 죽음이 제 기억까지 보존해 줄 줄은 그도 몰랐으니까.
다시 정렬한 시간 속에서 이도하가 해밀턴 블랙을 죽일 이유는 도무지 없었다. 그와 이도하 사이에 접점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 시간이 다시 풀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밀턴 블랙의 죽음으로 가능하게 된 일이었기 때문에, 이도하는 반드시 그를 죽이게 되는 시간에 다다랐다.
대체 왜 제가 사람을 죽였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노인을. 그 자그마한 모순에 대해 이도하는 계속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마침내 기억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 모순이, 이도하로 하여금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했다.
<운이라고 하죠. 일어나 좋고 다행이지만, 아니었어도 상관은 없었으니까.>
이게 우연인가, 아닌가. 이도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만약 제가 모든 걸 잊었다 해도,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예정된 시간 뒤에 깨어난 시오한은 그를 다시 불렀을 테니까.
<세상이 참 재밌지. 죽지 않는 자의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다니.>
서늘하게 눈을 휜 우르슬라가 말했다.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제가 몇 번을 거부하든, 시오한은 또다시 그를 불렀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이번에 기다리게 된 것은 그가 아니라 저라는 이유만으로, 우연이었든 아니든 충분히 해결이라고 할 만하다. 우르슬라에게도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 닫힌 게 아니라, 닫은 거네.>
우르슬라가 조금 가볍게 말했다.
<그렇게 울고불고 한 주제에 전부 헛되게 만들었던 거라면 정말 가만두지 않으려 했거든.>
울고불고… 잠시 미간을 구긴 이도하가 곧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닫은 것도 아닙니다.>
흘긋, 이도하가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생전 그래 본 적이 없었지만, 이도하는 그녀의 앞에서만은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고맙다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으나, 이도하는 그 말을 삼켜 냈다.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멈춰 놓은 거지.>
찢어지고, 뒤엉킨 시간.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듯 이도하는 그 모든 시간들을 모두 다 풀어내어 찬찬히 늘어놓은 다음, 순서에 맞춰 다시 하나씩 감아야 했다. 버리고, 엮고, 떼어 내고. 다른 시간대에 다르게 일어났지만 이미 일어난 일들을 이도하는 기억을 다시 정렬하듯 맞춰 놓았다.
<…모자랐구나.>
닫은 게 아니라 멈춰 놓았다는 그 말로 우르슬라는 다른 설명은 더 필요 없는 것 같았다. 그 계약주에 그 계약자라. 천재들이란. 이도하가 쓴 얼굴을 했다. 하기야, 시간에 관해서라면 그녀만큼 잘 아는 이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곳에도, 저곳에도.
<2년이요.>
이도하가 말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그가 했던 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돌이켜 처음부터 다시 맞추는 것과 같았다. 그의 눈앞에 앉은 우르슬라가 그 반증이었다.
계약주의 죽음을 단 한 번도 돌이킨 적 없는 우르슬라. 그 선택으로, 엘하시온이 바랐던 평온을 얻은 우르슬라. 미래와 과거, 두 점에 묶여 뒤틀리던 시간이 풀려나고, 그걸 다시 엮어 실패에 감아 놓는 건 그런 일이었다.
다만 이도하가 건드릴 수 없는 시간이 있었다. 8살의 시오한을 만났던, 8살의 이도하. 이도하는 그것만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두고 모든 걸 정렬하자니 틈이 생겨 버린 것이다.
시오하는 26살에 이도하를 소환했지만, 시오한의 소환에 응한 건 24살의 이도하였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일들을 퍼즐처럼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이도하에게 조각이 없는 부분을 채워 넣을 방법은 없었다.
아니, 방법은 있었으나, 할 수 없었다. 그건 힘의 한계가 아니라 이도하의 한계였다. 그의 힘은 분명 이치를 부수고 바꾸는 것을 가능하게 했지만, 그 여파까지 감당해 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잘 쌓아 올린 성냥 탑을 부수는 것도, 구조를 바꾸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게 한 뒤에 그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이도하는 이제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 성냥 탑을 가지고 놀기만 했던 8살의 이도하와 달리, 이제는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한 채로 조심스레 구조를 바꾸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기다리려고요.>
이도하가 말했다.
<내가 26살이 될 때까지.>
조금 웃으며 한숨을 내쉰다. 별수 없다는 듯한 한숨 같기도 했지만, 숨이 막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우르슬라는 그가 얼굴로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매끈한 피부 위를 매만지는 손길은 무의식적이었다.
<도박도 두 번은 못 하겠어서.>
틈이 생긴 걸 제 딴에 채워 보겠다고 하다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알겠느냔 말이다. 세계는 미세하고 무수한 실타래로 섬세하게 꼬여 이루어져 있었다. 개중 하나라도 또다시 엉키는 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러니 그는 기다릴 생각이었다. 26살 시오한이 저를 불렀던 그 시간에 그와 그의 세계, 모든 것을 멈춰 놓고서. 제 세계의 시간이 그의 세계를 따라잡을 때까지. 이번엔, 제가 기다리면 된다. 나쁘지 않다.
계약자들이 모두 오즈로부터 튕겨 나오고, 아무도 소환되지 못하고 있는 건 그것 때문이었다. 이도하가 세계 자체를 잠재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그가 널 부를 때까지?>
<아뇨.>
이도하가 대답했다. 얼굴을 매만지던 손을 내린다. 그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고, 우르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눈 밑, 분명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던 자리에 빛에 반사되어 뭔가 얼핏 드러났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흰 빛의 선들이었다.
<내가 갈 겁니다.>
다시 정렬한 이 시간에 그는 아직 계약자가 아니었으나, 동시에 계약자이기도 했다. 맹약은 잠들었을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랬다면 그의 맹약과 해밀턴 블랙의 존재- 두 개의 축으로 인해 무너질 뻔했던 세상도 없었을 터였다. 미 서부를 덮쳤던 지진도 쓰나미도, 전 세계를 강타한 이례적인 대지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진도, 쓰나미도 여전히 일어났고… 다른 점이라면, 이도하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비록 그 시간의 이도하는 그 재해들이 무슨 이유로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어쨌든 그는 그곳에 있었다. 그때의 이도하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능한 많은 이들을 구했다.
그는 그것으로, 사실은 없었던 것으로 돌이킬 수도 있었던 일을 돌이키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으로 여기기로 했다. 정신 승리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어쩌겠는가 말이다. 애초에 그는 영웅 같은 게 아닌 것을.
모든 것은 다 저를 위해서였고, 그를 위해서였다.
빤히 이도하를 바라보던 우르슬라가 이윽고 가느다랗게 웃었다.
<어땠어?>
그녀가 문득 물었다.
<그자의 죽음 말이야.>
우르슬라가 다시 물었다.
<아폴리온. 해밀턴 블랙. 기드온 챔버레인.>
기드온 챔버레인?
<11세기에 태어난 십자군의 죽음인데. 천 년 만의 죽음답게 장엄했나?>
<…….>
11세기. 이도하는 저 낯선 이름이 해밀턴 블랙의 본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래 산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정말 까마득한 숫자였다. 그 까마득한 세기 이전에 태어난 이의 본명을 알고 있는 우르슬라가 조금 아찔할 정도로.
<…그냥. 끝이었죠.>
이도하가 대답했다. 장엄? 그거야말로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사위는 조용했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 것은 고양이 한 마리였으며, 세상이 울부짖지도 번개가 내리치지도 않았다. 그냥 바람이 불었고, 풀 냄새가 조금 났으며, 머그잔에 든 커피는 식어 가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허무하다라는 표현조차도 쓸데없었다.
우르슬라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커튼처럼 내려간 눈꺼풀 아래의 푸른 눈동자와 다시 드러난 눈동자는 조금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그냥, 깨끗한 겨울 하늘의 빛이었다.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그녀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겉에 걸친 패딩 주머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치마 주머니를 완전히 까뒤집자 조그만 초콜릿 봉지가 소파로 툭 떨어졌다. 우르슬라가 그걸 주워 신은호에게 내밀었다.
처음에는 관심을 좀 기울였으나, 시종일관 영어로 이루어지는 대화에 슬슬 조금 졸고 있던 신은호는 잠이 번쩍 깬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흔들자, 우르슬라는 좀 아쉬운 얼굴로 봉지만 그에게 밀어 주었다.
<…….>
참 알 수 없는 기분으로 그걸 보고 있던 이도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흘긋, 이도하를 본 우르슬라가 물었다.
<이제 뭐 하려고?>
<예?>
원래 이런 성격인가. 진짜 종잡을 수가 없다, 싶더니 또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에 이도하는 정말로 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아직 계약자도 아닌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와중에 실제로 뉴스에서 그를 두고 그래도 세상에는 아직 희망인 이도하 어쩌고저쩌고하는 말을 들었다. 절망과 좌절이 넘치지만 그 모든 걸 해결해 줄 이도하가 있다! 하는 느낌으로 영웅 취급을 받고 있으니 원래 그랬던 것처럼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있으려나, 싶은 생각도 조금 든다.
그렇다고 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정말로 영웅 노릇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게다가 그가 계약자가 아닌 세상에서 이렇게 되니 주승현과 해밀턴 블랙이 했던 말도 다시 떠오르고….
문득 이도하가 신은호를 바라보았다. 통 영문을 알 수 없게 돌아가는 상황에 얼떨떨해 보이던 신은호는 이제 슬슬 본래 성격이 조금 드러나는지 이도하의 눈길에 와락 인상을 썼다. 도대체 이게 뭐냐, 하는 눈빛으로 사납게 노려보는 게 아주 맹렬했다.
그런 신은호를 보니 이도하도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이라에 취직 한번 해 볼까요. 특채로 뽑아 줄 것 같은데.>
학교는 취업계 내고 졸업하면 되지, 뭐. 이도하는 한껏 욕심이라도 부린 것처럼 대답했고, 우르슬라가 눈썹을 들었다. 그야말로 제가 퇴사한 직장에 취업하겠다는 포부를 내뿜는 병아리를 보는 지친 현대인의 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