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그가 도약해 곧바로 이동한 곳은 동네의 어느 놀이터였다. 놀이터 바닥에서 모래가 없어진 지가 한참인데 아직까지 모래가 소복하게 쌓여 있는 놀이터다.
왁자지껄 떠들고 놀던 아이들은 뜬금없는 키 큰 어른의 등장에 주뼛거리고 흘끔거렸다. 그러나 모자를 눌러쓰고 있으니 아이들 눈썰미로 그를 알아보지는 못한 것 같았다. 특징적인 것이랄 것도 없으니까.
어슬렁거리는 맹수처럼 느린 걸음으로 놀이터를 주시하던 이도하는 곧 바랐던 것을 찾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날이 좋았다. 공기는 차가워도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으며, 정오를 조금 지난 한낮의 골목은 한가로웠다. 겨울 하늘이 마냥 새파랗게 깨끗하기만 하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벽화와 온갖 낙서로 얼룩진 담벼락을 따라 걸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하던 그는 문득 아무것도 없는 제 옆을 바라보았다. 이도하의 발걸음이 변했다. 원래 그가 걷던 보폭보다 조금 크게, 어색하게 걸어 본다. 팔을 늘어뜨리고 나긋나긋하게 걸어 보던 그는 혼자 픽 웃고는 다시 걸음을 바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대문이 활짝 열린 어느 건물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안에서 시끄럽게 북적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두다다다 뛰는 소리가 들린다. 장난감 하나를 들고 마구 뛰어나오던 조그만 아이 하나가 웬 키가 큰 그림자를 보고는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모자 아래 드러난 얼굴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갓도하다!”
“…….”
요즘 애들 말투란.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이도하가 아이의 머리를 슥 쓰다듬어 주고는 지나쳤다. 헤에. 무려 갓도하가 쓰다듬은 머리를 부여잡은 아이는 어딘가로 도망가던 것도 잊고 이도하의 뒤를 쭐레쭐레 따라갔다.
그리고 그 복도에서 마주치는 아이마다 다 비슷한 순서를 밟았다. 우와, 하고 놀라고는 졸졸 따라오거나 헐레벌떡 누군가에게 알려 주러 뛰어가는 식이었다.
건물에 방은 많았다. 하나하나 방을 다 둘러보던 이도하는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아이들을 한 부대나 꽁무니에 달고 나서야 마침내 한 방문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 있었네.”
이 층 침대가 세 개나 꽉꽉 들어찬 침실이었다. 이 층 구석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눌러쓰고 있어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게 특기를 쓰고 있지 않았더라면 절대 못 찾았을 모양새였다.
저들끼리 떠들어 대고, 이도하가 대답을 하든 말든 혼자 굳건하게 연신 말을 걸기도 하고, 아무튼 꽤 시끄러운데 꼼지락거리지도 않는다. 아이들 침대라 그런지 키가 큰 이도하가 앞에 서니 이 층도 눈높이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이불 더미를 쿡 찔렀다.
“꼬….”
“야! 사기꾼!!!”
이도하가 입을 열려는 찰나, 뒤에 있던 어느 아이가 우렁찬 목청을 돋웠다. 순간적으로 이도하가 흠칫 놀랄 정도였다. 봉분처럼 고요하던 이불 더미가 홱 솟구쳤다.
“시발. 사기꾼 아니라고 했, 지…?”
굉장한 기세로 벌떡 일어난 아이가 씩씩거리다, 이도하와 눈을 마주쳤다. 말끝이 소심하게 말려 들어가며 괴상하게 올라갔다. 아이가 휘둥그레 떴고, 이도하는 얼굴을 구겼다.
아이는 누가 봐도 미간을 모을 정도로 깡말라 있었다. 부스스하게 일어난 머리는 푸석푸석해 보였고, 눈 밑은 퀭했다. 통통하게 젖살이 있어야 할 뺨도 푹 들어갔다. 8살 난 아이가 아니라, 공사장에서 석 달 열흘은 고생한 사람처럼 피로와 피곤에 절어 보였다. TV에서만 보던 갓도하가 제 눈앞에 있자 아이는 몹시 당황했다.
“뭐, 뭐야.”
“잠깐, 얘들아. 나와 봐, 나와 보자!”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이도하가 돌아보았다. 무성한 풀숲처럼 바글바글한 아이들을 헤치고 나타난 김대훈 원장이 그와 눈을 마주쳤다. 물어보고, 소리치고, 용기 내서 이도하의 손등이라도 한번 만져 보고. 하여간 엄청나게 시끄러운 가운데 둘 사이에만 잠시 정적이 돌았다.
그는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정말로 얼떨떨하고 황당해 보였다. 마침내 김대훈 원장이 손을 내밀었다.
“어, 저, 여기 원장 김대훈이라고 합니다. 팬이고…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왜…?”
당신이 왜 여기에…? 하는 당연한 의문으로 그가 말을 흐렸다. 그를 응시하던 이도하가 김대훈 원장의 손을 잡았다. 이도하가 입을 열었다.
“놀이터에 줄 서 있으면 사진 찍어 주지. 3등까지는 특기 체험.”
별로 목소리를 높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용케 그의 말을 알아들은 한 아이가 가장 먼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이도하는 아주 친절하게도 놀이터에 줄 서면 사인! 하고 공지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아악!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앞다투어 우르르 뛰쳐나갔다.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직원들 몇몇이 흘긋거리며 자리를 뜬다. 모두가 나가자, 아무도 손대지 않은 문이 저절로 탁 닫혔다.
“어…….”
“애 꼴이 말이 아니네요.”
이도하가 흘긋 뒤를 가리켰다. 이 층 침대 위에서 아직도 영문을 모르고 어안만 벙벙해 있던 아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김대훈 원장이 눈만 깜빡거리다, 이내 웃었다. 푸근하고 인자해 보이고, 참 인상이 좋다.
“아, 그건-.”
이도하가 좋은 인상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주기적으로 운동도 하고 건강을 잘 챙기지만, 어쨌든 그래도 60세가 다 되어 가는 남자는 단번에 나가떨어졌다. 얼굴을 움켜쥔 남자가 당혹스럽게, 또 겁에 질려서 뭔가 작게 웅얼거렸다. 후, 이도하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아, 속 시원하다. 왜 사람이 기분이 나쁘지.”
그가 쪼그리고 앉았다. 예고도 없이 얻어맞은 원장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약간의 분노가 솟는 듯했으나 그걸 덮고도 남을 만큼 겁에 질려 보였다. 이도하가 코를 감싼 그의 손 위로 제 손을 가져갔다. 이도하의 눈에 푸른빛이 스치는 순간, 조금 공간을 두고 떨어진 그의 손에도 푸른빛이 감돌았다 사라졌다. 이도하가 손을 치웠을 때, 김대훈 원장의 손가락 사이로 비치던 코피는 흔적도 없었다.
“깽 값도 아까워서. 억울하면 고소하든가. 나도 할 거거든.”
이도하가 일어섰다. 입을 딱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이가 후다닥 뒤로 물러난다. 이도하의 얼굴에 난처함이 스쳤으나, 잠깐뿐이었다. 세상은 원래 험악한 거지. 그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고, 하여간 소중히 여겨 줄 성격은 못 되었다.
“너-.”
우웅,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사실 좀 전부터 내내 울리고 있었는데 계속 무시하고 있던 진동이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쏙 빠져나왔다. ‘김똘’. 흘긋 화면을 바라본 이도하가 얼굴을 구겼다.
“너 여기서 계속 살고 싶어?”
“…….”
좀 협박 같은가. 이도하는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궁리해 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핸드폰이 부드럽게 허공을 날아와 그의 귀에 대어졌다.
“아니면 나랑 갈래. 김윤혜 씨, 나 좀 바쁜데.”
벽에 딱 붙은 아이의 눈이 흔들렸다. 내밀어진 이도하의 손을 맹렬히 노려보더니, 이도하의 어깨 너머 아직까지 바닥에 널브러진 김대훈 원장을 잠깐 본다. 이도하는 기다렸다.
“좀 작게 얘기… 뭐? 누가 와?”
마침내 결심한 듯, 아이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잔뜩 미간을 구긴 이도하는 잠자코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기다렸다. 작은 손은 잠시 망설이듯 멈춰 섰다. 그러다 이내 질끈 눈을 감더니, 이도하의 손을 확 잡아챈다. 그 순간, 주변이 바뀌었다.
조심스레 눈을 뜬 아이가 입을 쩍 벌렸다. 조금 전까진 어두컴컴하고 좁은 침실이었는데, 어느새 주변이 완전히 탁 트인 넓은 로비였다. 환한 불빛으로 밝고, 옹기종기 모였던 아이들보다 열두 배는 많은 것 같은 성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냥 성인들이 아니라,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부터 양복을 입은 사람들, 카메라를 든 사람들, 마이크를 든 사람들까지. TV에서만 보던 엄청난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신은호가 태어나서 여태껏 본 사람보다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이도하의 손을 잡은 그는 그 중심에 있었다.
허억, 신은호가 기겁하며 저도 모르게 이도하의 다리에 딱 달라붙었다. 내려다본 이도하가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아, 너 잠옷 차림이구나.”
잠옷이라기보다는 거의 내복이다. 그것도 좀 많이 낡고 헤진.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도하는 코트라도 벗어 주려다, 그게 더 우스꽝스러울 것을 알아차렸다. 이도하의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어깨에 걸쳐 주면 웨딩드레스처럼 죽 늘어질 터였다.
그가 간단하게 허공에 손을 휘둘렀다. 눈에 섬광도 돋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의 손에는 귀엽기 짝이 없는 아동용 떡볶이 코트가 들려 있었다. 이도하가 그걸 내밀었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신은호가 몹시 수치스러운 얼굴로 재빨리 코트를 낚아챘다.
<얘기나 좀 하려 했는데.>
조금 딱딱한 영어다. 야, 미안. 사과한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아동 납치 현장인가 뭔가….>
턱 끝에서 흔들리는 짧은 갈색 머리칼 위로 환한 조명이 반들반들하게 반사됐다. 둥글게 그들을 감싼 사람들의 중심에 있던 그녀는 어느새 이도하의 앞에 와 서 있었다.
“우르슬라.”
서늘한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이도하가 말했다. 인사처럼, 우르슬라 발터가 작게 고개를 까딱했다.
***
예고도 예정도 없던 두 인소더블의 조우에 두 나라가 아주 발칵 뒤집혔든 말든, 두 사람은 급하게 마련된 조용한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내복 위에 떡볶이 코트를 입은 신은호는 구석에 앉아 두 사람의 눈치만 보았다. 도대체 저 애는 뭔데 이도하가 데려온 것도 모자라서 두 인소더블의 회동 자리까지 따라 들어가나, 하는 눈초리를 잔뜩 받고는 저도 영문을 몰라 좀 주눅이 든 상태였다.
국제 도약으로 훌쩍 날아왔다는 우르슬라는 정말 집 앞에 잠깐 나온 것 같은 차림이었다. 그녀는 아이라의 어느 직원이 타다 준 따뜻한 율무차를 눈여겨보다 신은호에게 내밀었다. 이미 소파에 구겨져 있다시피 한 신은호가 괴상한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그녀는 얌전히 테이블 위에 종이컵을 내려놓았다.
<…뭡니까.>
우르슬라는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도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고, 결국 이도하가 먼저 물었다.
<그쪽을 보러 왔지.>
우르슬라가 대답했다.
<제대로 얼굴 한번은 보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