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네, 그렇게 할게요.]
울음을 삼켜 내며, 이도하는 대답한다.
[약속할게요.]
오직 선의로 누군가를 돕는 일. 합당하지 않은 원망과 비난을 받을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좌시하지 않고 돕겠다는 약속. 문득 8살의 어느 날이 생각난다. 이른 아침, 방문 너머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부모님의 말을 들었을 때가 생각났다.
저는 계약자도 아니며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건 싫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건 홀로 한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돕고 싶었다. 왜 이토록 가슴이 아픈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아파하며, 18살의 이도하는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이도하.]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너 그거 소환진….]
어안이 벙벙한 것 같은 윤윤형의 목소리가 쓸려 흐릿하게 멀어진다.
[이도하 군, 지금 당장 가야 돼요. 이드로에서 긴급 지원 요청 왔어요!]
목소리를 높이며 다급하게 말하는 것은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외국인이다.
[세상에, 바다를….]
[진심이었네요.]
[고마워요.]
[적어도 24시간은 줘야 할 것 같은데…. 할 수 있다고 말해 줄래요?]
이드로의 단장, 케이시 윌리엄스가 말한다. 24시간. 이도하에겐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달리 다른 일도 없으니 별 상관없다고 이도하는 생각한다. 그저, 머리가 다 아픈 저 사이렌이나 얼른 꺼 줬으면 좋겠다고.
[이거, 책임져 줄 거죠? 나 가난한 대학생이에요. 소송 같은 거 감당할 돈 없는데.]
하늘에 떠올렸던 바다는 제자리로 돌아가고, 그는 지진으로 무너진 곳을 복구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떠오른 무너진 건물의 파편들이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기묘하게 웅장했다. 투덜거리는 이도하에게 케이시 윌리엄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이드로 금고를 털어서라도 도와줘야죠. 그리고 이드로가 아니더라도 도하 변호하겠다고 나서는 슈퍼스타급 변호사들이 군단 단위로 달려올걸요. 저들이 정말 소송을 한다면요.]
[돈 없다니까요.]
[무슨 돈을 받겠어요!]
부루퉁하게 돌아보는 이도하를 주먹으로 툭, 치며 케이시 윌리엄스가 말했다.
[영웅이잖아요!]
[……으.]
팔을 벅벅 긁으며 이도하가 진절머리를 치고, 케이시 윌리엄스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린다.
[이번 대지진으로부터 한국만 무사했던 일에 대해서 인소더블인 이도하 군의….]
[혹시 이도하 군이 이번 지진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던 건지에 대한 의혹이….]
[여러 나라로부터 지원 요청이 쇄도하고 있는데, 어디부터….]
플래시에 눈이 따갑다. 마이크를 들이대는 이 사람들 죄다 어디 조용한 시골 논밭으로 이동시켜 버렸으면 좋겠다고 이도하는 생각한다. 생각만 했다.
대지진의 전조고 뭐고 그딴 건 저도 몰랐으며, 저도 우르릉, 하고 땅이 흔들리는 바람에 놀라서 깼다고. 무슨 수로 그런 지진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 줄 알아 막았겠느냐는 말을 변호사들이 아주 정중하고 점잖게 돌려 쓴 기사는 이미 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도 저런다.
참 피곤하다, 생각하며 이도하는 경호원들이 미리 길을 터놓은 호텔 안으로 재빨리 들어간다. 기자들 외에도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던져 대는 인형이며 꽃이며 별의별 선물들이 밟혀 걷는 것도 일이었다.
[아쉽군.]
노인이 말했다. 외국인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고, 피부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적어도 80세는 넘었을 것 같은 노인이었다. 오래된 것 같은 목재 집에 열린 창문으로는 훈훈한 바람이 흘러들어온다. 노인의 앞에 놓인 책은 덮여 있었고, 옆에 머그잔이 있다.
그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은 완벽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바닷물처럼 사위를 꽉 메우고 있는 것은 그의 특기다.
노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죽었다. 죽였다.
왜?
문득 고개를 드는 의문과 함께, 이도하는 눈을 떴다.
짹짹. 밖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기운 햇살이 커튼 너머로 따뜻하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푹 자고 일어난 것 같다.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잠들어서 깨고 나서도 그저 눈만 뜬 것처럼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이도하는 누운 채로 눈만 깜빡였다. 잠시 후에야, 그는 여기가 제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드러운 겨울 이불이 보슬보슬하게 살갗에 스쳤고, 침대 속은 따뜻하고 아늑하다. 문밖에서는 TV 소리와 인기척이 들린다.
그가 주변을 더듬거렸다. 통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이내 부웅, 하고 허공을 날아온 핸드폰이 이도하의 눈앞에서 멈추었다. 까만 화면에 잠시 그의 얼굴이 비쳤다. 저 자신과 눈을 마주치기가 무섭게 시선을 인식한 화면이 자동으로 켜진다. 1월 4일. 해가 바뀌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며 허공에 뜬 핸드폰을 낚아챘다.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다 말고 이도하가 멈칫했다. 그가 제 머리칼을 쭉 당겨 보았다. 눈을 가리고도 더 내려올 만큼 길었다. 그는 물끄러미 제 머리칼을 보다, 이내 핸드폰의 화면을 넘겼다.
<오슬란드 미 대통령, 이도하에 감사 표명… 워싱턴 D.C. 세계구호재단 창단식에 이도하 초청>
<전 세계 강타한 대규모 지진… 사망자 추산만 수천만 명.>
<지진으로 인한 피해, 사상자 전무한 대한민국… 이도하 훈장 수여 가능성 논의 중.>
<계약자들 일시에 역소환, 동시다발적 소환 불능 사태… 세계 닫혔나. 아이라, 사태 파악 중.>
<계약자들, ‘세계 닫혔다’… 마력 매개 재개 가능성 불투명.>
<미 인소더블로 알려진 해밀턴 블랙, 지난 24일 고령으로 사망.>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엄지가 잠시 화면 위에 머물렀다. 한쪽 무릎을 올리고 그 위에 턱을 괸다.
<이번 대지진, 소환 불능 사태와 연관 있나… 아이라, 가능성 배재할 수 없어.>
<정말 세계 단절됐나? 계약자들, ‘계약명 사라지지 않아’.>
흠. 고개를 기울이며,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가 핸드폰을 잡고 무언가 검색하려는 순간,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고개를 내민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아들, 일어났냐?”
“…….”
이도하가 제 아버지를 빤히 보았다.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왜 저러나 싶은 얼굴로 의아해한다.
“아들?”
“아녜요. 왜요?”
“배 안 고파? 2시야. 엄마 배고파 죽겠대.”
그의 아버지가 장난스레 말했다. 픽 웃은 이도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왜 안 드시고요.”
“오랜만에 아들이랑 밥 먹으려고 그랬지.”
“피자 드실래요?”
“오, 좋지. 우리 아들이 피자 사 주나?”
웃음으로 대꾸하며 대충 이불을 정리하던 그가 멈칫했다. 특색이랄 게 없는 침대 구석에 낡은 고래 인형이 쿡 박혀 있다.
“오늘은 쉬어?”
“아뇨, 아이라에 가 봐야 할걸요.”
허공에 둥실 뜬 핸드폰이 켜진 채 달랑달랑 흔들렸다.
“사람들 도와주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아들. 알지?”
가만히 인형을 바라보고 있던 이도하가 눈을 내렸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냥 뭐,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거죠. 힘들 건 없어요.”
인형의 둥근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등을 돌린다. 나가서 먹으면 아마 정신없어질 텐데… 하고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멀어지며 달칵, 문이 닫혔다. 햇살이 조용히 유영하는 방 안에 남은 것은 눈이 동그란 고래 인형뿐이었다.
피자는 배달시키고, 피자를 가져온 기사와 사진도 한번 찍어 주고 사인도 해 준 이도하는 잠시 소파에 늘어졌다. 한가롭기 그지없는 주말의 한낮이었다. 그는 멍하니 TV를 보았다.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듯한 모양으로 2분에 한 번씩 채널을 돌려 댔다.
부엌에서 사과를 드시던 그의 부모님이 왜 저러나 싶은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들어가서 더 자라고 해야 하는 걸까, 하고 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쯤이었다. 기계처럼 리모컨을 눌러 대던 그의 손이 멈추었다. 화면에 방송되고 있는 것은 뉴스였다.
<아이라는 지난 25일부터 발생한 계약자들의 소환 불능 사태에 아직까지 뚜렷한 원인도, 해결 방법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를 동시다발적으로 강타한 이번 대지진과 소환 불능 사태 사이에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들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아이라의 총재인 닐스 K. 크라우스는 직접 기자 회견을 진행했습니다. 언제 계약자들의 소환이 재개될지, 재개될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 속에, 마력 의존도가 높은 나라들은….>
나이는 꽤 많지만 눈빛이 형형해 보이는 남자의 기자 회견 장면이 스치고, 기자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한국 아이라의 전경이 비친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모습들이 지나갔다.
소파 위에 거의 녹아 있던 이도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는 한 무리의 연구원들을 기자들이 우르르 지나치는 녹화 화면이었다. 가장 앞에 선 이가 웃으면서도 난처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실례합니다만 반복한다. 인자하게 나이가 든 얼굴이었다. 가운에 적힌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터였다.
연구소장 이태학.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엘리베이터 속으로 연구원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일어섰다.
“저 나가요.”
편한 청바지에 니트를 꺼내 입은 그는 아무렇게나 잘 입던 패딩을 꺼내려다 멈추었다. 무채색의 옷들이 간결하게 정리된 옷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검은색의 긴 코트를 꺼내 걸친다. 매무새를 잠깐 매만진 그는 모자까지 하나 눌러쓰고서, 몸을 돌렸다. 깜빡. 그의 모습이 흔들린다, 싶더니 그대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