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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31화 (230/250)

231화

이도하는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아직 싸늘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머리까지 시원하게 쓸어내는 것 같다. 그는 주변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아래로, 또 위로, 대기가 움직인다. 옷자락을 흔드는 것은 바람이 아니었다.

이도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세상이 뒤엉키는 모습을 보았다. 붉게 가라앉는 노을과 짙푸른 색으로 물든 밤, 그 사이 어스름의 빛깔이 한데 녹아든다.

그는 이와 흡사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하늘이 흘러내리고, 땅이 강처럼 섞여 드는 모습을. 마치 세계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엘하시온을 품에 안고, 우르슬라가 시간을 되돌리기 시작했을 때. 시간이 녹아 흐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도하는 느꼈다.

이별이구나.

그들이 그때는 하지 못했던, 아주 긴 이별이었다. 쏟아 버린 물감처럼 섞여 드는 세상을 보며,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싸늘한 공기에 입김이 뽀얗게 피어올랐다. 코트 자락이 흩날린다. 문득 그가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니, 시오한. 당신은 한 번도 안 물어보더라.”

‘무엇을?’

“내 특기 말이야.”

동공으로부터 불꽃이 피어오르듯 파랗게 일어난 기운이 까만 눈동자를 덮었다. 이명은 세상이 움직이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러네.’

시오한이 조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시오한은 잘 알고 있었다. 제 것처럼 그의 힘을 쓰기까지 하니 모를 수가 없다. 그러면서 정작 시오한은 단 한 번도 그의 특기를 입에 올린 적이 없는 것이다. 마치 그런 건 단 한 번도 그에게 중요한 적 없었던 것처럼.

‘알려 주려고?’

“또 우연히 여긴 그믐이라.”

이도하가 말했다. 머리칼이 더 세차게 흩날린다. 세상은 완전히 어둡게 물들었다. 밤이 아니라, 수많은 색이 뒤섞여 어두워진 오묘한 빛이었다. 찢어진 시간이 다시 섞여 들고 있다. 원래 그래야 했던 대로.

이도하가 뒤를 돌았다. 석양이 지던 지평선은 없다. 군데군데 빛을 밝힌 도시가 하늘로 스며들고, 어두운 색깔로 뒤섞인 하늘은 도시로 녹아든다. 간혹 땅에 반짝이는 저 빛이 꼭 떨어진 별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정말로 별 같았다. 달이 없어 별이 밝은 그믐밤답게.

그대로 픽 웃은 이도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도시의 빛이 별처럼 섞인 밤하늘, 시간이 뒤섞이는 대로 물감이 흐르듯 천천히 유영하던 하늘이 순간 흔들렸다.

무언가 흐릿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빛무리가 어른거린다. 까만 밤바다 수면 아래에서 떠오르듯, 가려진 구름 아래에서 드러나듯, 섞이고 흐르는 시간 가운에 둥근 것이 서서히 나타난다. 모든 게 녹아 뒤섞인 하늘 가운데 홀로 또렷하게.

달이었다.

저 다른 세계에서 지금 시오한이 바라보고 있을, 그 달이다.

[어째서 신은 자네와 같은 이를 이 땅에 만들었을까.]

‘죽지 않는 것’이 이치였던 해밀턴 블랙의 죽음을 가능하게 만든 힘. 이치를 무시하고, 진리를 거스르고. 한계에 구애받지 않고 불가능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 달이 뜨지 않는 이 그믐밤에 달을 띄운 것처럼.

“그믐밤에 뜨는 달.”

이도하가 말했다. 처음 특기명이 지어졌을 때 참 감상적이기 짝이 없는 이름이라 생각했었다. 그 이후로 입 밖으로 낸 건 처음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뱉은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화이람, 그대는 그대잖아.]

그믐밤에 뜨는 달. 그믐밤에, 뜨는 달.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오즈. 시오한의 세계와, 그믐인 제 세계에 동시에 뜬 달을 그가 올려다보았다.

“예쁘네.”

새파란 눈으로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도하가, 문득 웃었다.

“보고 있어?”

유영하는 하늘을 바라보는 새파란 눈동자에, 황금빛 달이 선연히 겹쳐졌다.

‘보고 있어.’

머리칼이 떠오르고, 옷자락이 떠오른다. 하나로 녹아 엉켜 흘러드는 세계 가운데에서 이도하도 삼켜지고 있었다. 가장 높은 꼭대기에 올라 서 있던 그는 어느샌가 떨어지고 있었고, 또 떠오르고 있었다. 밤하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았고, 밤바다에 떨어진 것도 같았다.

주변은 녹아 엉겨든 도시였고, 하늘이었다. 땅과 하늘의 구분이 사라진 가운데 소리들이 들려온다. TV 소리,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평범한 대화 소리,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바람에 쓸린 나뭇잎들이 빗소리처럼 흔들리는 소리. 시간이 흐르는 소리다.

‘화이람.’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온갖 색채로 유영하는 허공 속에 제 손이 흔들리는 게 보인다. 그리고,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 닿았다. 길고 매끄러운 손이 그의 손을 단단하게 잡는다. 황금빛 실타래가 반짝였다. 흰 옷자락이 펄럭인다.

다른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 그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부드러운 입술이 그의 이마에, 눈에, 뺨에, 차례로 내려앉았다. 입술에 다다라서는, 가만히 머문다. 단단히 잡고 있던 손바닥 아래로 바람이 스며든다.

천천히, 손바닥을 타고 미끄러져 손끝이 마지막까지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온화하게 머물던 입술의 온기도 떨어졌다. 모든 것이 까맣게 사라졌다.

[야! 안녕?]

그림자에 가려져 얼떨떨하게 절 올려다보던 얼굴이 스친다. 8살의 여름방학이다.

[재밌어, 그대와 있어서.]

[진짜?]

[응.]

[나도 너랑 있어서 좋아.]

장난기라고는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하던 아이가 스친다.

[시오한!]

끝내 잡지 못했던 손.

[잊어버려, 도하야.]

[잊어버려.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위로이고,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속삭임.

[오즈에 무슨 큰일이 났다나 봐.]

[거기는 자연재해 같은 거 없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게. 계약자들이 꽤 많이 불려갔다나 봐. 정훈이네 아들도 소환됐대.]

[엄마야? 당신 친구?]

[응.]

[세상에, 신기하네. …우리 도하도 소환되는 건 아니겠지?]

두런두런, 문밖으로 들리는 대화에 8살 이도하는 귀를 기울인다. 그의 아버지가 작게 웃는다.

[도하는 8살인데 뭘.]

[그야 그렇긴 한데….]

그가 방문을 닫았다. 그런 건 싫다고 생각하면서.

[도하야!]

매미가 시끄럽게 울던 여름날. 하복이라고 해 봐야 바지는 긴바지였다. 땀이 나서 천이 다리에 기분 나쁘게 들러붙었고, 반팔 상의도 딱히 시원하지는 않았다. 반팔 티 위에 교복을 입은 시늉이라도 하느라고 걸친 상의의 단추는 다 풀어 버리고, 등에 가방이 닿는 것도 기분이 나빠 손에 들고 있었다. 얼른 샤워나 해야지, 하고 집에 들어서는데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도하야, 독일의 그 인소더블 있잖아. 우르슬라. 계약자가 됐대.]

[우르슬라요?]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이도하는 어머니를 따라 TV 앞에 섰다. 취재진의 플래시 세례로 번쩍거리는 화면에 우르슬라가 짧게 지나간다. 짧은 갈색 머리칼, 흘긋 카메라를 향하는 푸른 눈동자.

<독일의 인소더블로 잘 알려져 있던 우르슬라 발터가 계약자가 되었습니다. 독일은 오늘 오후 2시경, 지난 6일 밤 소환주의 부름을 받아 소환되었던 우르슬라가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쳤다고 발표했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회색 정장을 입은 리포터가 축제가 벌어진 베를린의 한 광장을 뒤로하고 말한다. 다시 우르슬라의 화면이 반복된다. 매앰- 바깥에서 매미가 우는 가운데,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이도하는 잠깐 정지된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인소더블이에요.]

가운 차림의 남자가 말했다. 침착하려고 노력하지만, 상기된 기색을 숨기지 못한다. 모든 것이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사무실에서, 이도하는 삐딱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는 뚱하게 제 앞으로 내밀어진 검사 결과지를 바라보았다. 모든 수치들이 표시된 범위 바깥으로 쭉쭉 뻗어 있었다.

새롭지도 않았다. 제가 뭘 할 수 있는지 아는 이도하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더는 숨기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어지간히 귀찮아지겠다, 하는 생각뿐이다.

[도하 군은 인소더블이에요.]

상기된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도하는 붉은 글씨로 굵게 표시된 글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소더블.

그믐밤에 뜨는 달.

인소더블이라고 해 봐야 계약자가 되지 않으면 그냥 할 줄 아는 게 좀 많은 특기자일 뿐인데, 그게 뭐라고. 저가 계약자가 될 일 따위는 없다.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로 우르슬라는 계약자가 되었지만 그건 예외였고, 인소더블은 계약자가 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독일이 그렇게 유난을 떨어 댔던 우르슬라의 계약자도 채 1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우르슬라는 연구원까지 그만뒀는데.

가성비가 완전히 사망한 그런 소환을 할 사람은 없었다. 보아하니 이 연구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희망이나 꿈을 가진 연구원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저와는 인연이 없는 일이다. 인소더블이든 뭐든 계약자가 아니라면 딱히 더 득 될 것도 없다. 국제 도약 같은 걸로 택배 배달이나 하면 떼돈을 벌 수는 있겠다. 18살의 이도하는 뚱하게 생각한다.

[도하 군,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여자였다. 구불구불한 긴 머리칼이 하얀 가운 위에 가지런하게 늘어져 있다. 반듯한 명찰이 눈에 들어왔다. 선임 연구원 하유리.

[이건 서약이에요.]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여자가 종이를 내밀었다. 여자가 말한 대로, 서약서였다. 이드로. International ESP Disaster Rescue Organization. 국제 이능력 재난 구조 기구. 통칭 IEDRO(이드로)의 서약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기가 닥쳤을 때, 좌시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어느 때든, 어떤 때든 있는 힘을 다해 돕겠다는 약속. 신중히 생각하세요. 의무를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이도하 군의 힘이면 분명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이도하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목에 힘이 들어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고,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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