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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30화 (229/250)

230화

“잠시만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돌아올게. 그러니까 혹시 내가 늦어도…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줘, 시오한.”

다시는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게.

“…응. 기다릴게.”

시오한이 입을 열었다.

“…백 번이고.”

가까워진 시야에, 이도하에게 보이는 것은 오로지 찬란하도록 반짝이는 황금빛이었다. 태양의 무늬처럼 기이한 홍채의 무늬 속, 올올히 반짝이는 그 빛뿐이다.

“천 번이고 부를게, 화이람.”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달이 예쁘네. 이곳에서 저도 모르는 사이 무심코 그렇게 말했었다. 지금보다 선선한 바람이 불던 때. 오늘처럼 달이 그들을 굽어보는 가운데, 다리를 흔들며.

“…사랑해.”

이도하가 말했다. 황금빛 머리칼이 실타래처럼 너울거리는 사이로 푸른 불티가 섞여 들었다. 입술이 닿은 순간, 파앗- 그의 존재가 흩어졌다. 시오한이 제 손을 바라보았다. 불티가 팔랑거리며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별도 없이 달만 휘영청 떠올라, 그 안에 삼켜지듯 하나둘씩 사라진다.

눈물이 떨어졌다.

***

<맹약이라… 그래. 그런 거였군.>

해밀턴 블랙이 중얼거렸다. 우우웅- 점점 더 달아오르는 이명으로 인해 오두막이 덜덜 진동하는 가운데, 한갓 집기와 사물들까지 온통 두려움에 휩싸인 것처럼 요동치는 가운데 그 홀로 평안했다. 천 년의 세월 동안 그가 수없이 맞이했던 그 어떤 죽음과도 다른 ‘진짜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으리만치. 그가 문득 공허하게 웃었다.

<허울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천 년 가까이 되는 시간을 살아오며 수많은 생과 사를 겪었지만 그런 건 그의 생에 없었으며, 어디에서도 본 적 없었으니까. 그 어떤 약속도, 맹세도 모두 껍데기뿐이었다.

도대체 이들의 무엇이 그런 걸 가능하게 했을까. 해밀턴 블랙은 어느새 이명조차 사라진 완벽한 정적 속에서 절 바라보는 이도하를 보았다.

<어째서 신은 자네와 같은 이를 이 땅에 만들었을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처음 이도하가 왔을 때 그랬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자세로 앉은 해밀턴 블랙이 물었다. 이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열린 창으로 바람만 한차례 지나갔다. 선선한 바람에는 풋풋한 밤 냄새가 묻어 있었다.

어째서 신은 그와 같은 이를 이 땅에 만들었을까. 익숙한 향이 묻은 바람을 느끼며 해밀턴 블랙은 생각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신을 섬기는 시대에 태어나, 신을 위해 싸웠고, 신의 이름 아래 이 세상이 어떻게 변모하는지를 봐 왔으니까.

어쩌면 그녀와 저는, 그저 습작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해밀턴 블랙은 이도하를 보며 생각했다. 같은 인소더블이라고 하지만 그녀와 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들일 뿐이었다.

저는 단 한 번도 원한 것을 얻어 본 적이 없으며, 단 한 순간도 제 능력에 감사한 적이 없었다. 늘 원망하고 증오했을 뿐. 우르슬라, 그 여인이라고 과연 다를까. 시간에 관여하는 그 능력으로 인해 그녀가 무엇을 감내했고, 무엇을 잃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자는. ‘끝나지 않는 시작’이라는 그의 능력을 깨부수고 마침내 그에게 죽음을 선사하러 온 이 아이는 그의 말대로 다 가질 것이다.

완성작은 그인 것이다.

<우르슬라가 자네가 바라는 선택을 할 거라고 확신하나?>

해밀턴 블랙이 물었다. 이도하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완전히 새파랗게 물든 눈동자로 그를 응시한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운 한번 걸어 보지, 뭐.>

이도하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완벽한 정적. 그들의 숨소리와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 단어의 시작과 끝에 입이 움직이는 소리마저도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정적 속에서 그는 제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었다. 이도하가 입꼬리를 당겼다.

<누가 알아, 기적이 일어날지.>

해밀턴 블랙의 말대로, 그가 없는 미래를 얻은 우르슬라가 어떤 선택을 할지 이도하는 모른다. 이건 도박이었다.

<내 계약주가 그런 걸 좀 잘하거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르슬라가 어떤 선택을 하든, 절대로 헤어지지 않으리란 맹세는 반드시 지켜질 테니까.

<…그래.>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거의 새하얀 빛을 띠는 이도하의 눈을 보며, 해밀턴 블랙은 눈을 감았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약하게 흔들었다. 익숙한 바람이다. 겨울 끝 무렵의 바람이었다.

이곳은 추위 따윈 없이 늘 훈훈했지만, 그래도 계절의 끝자락에 부는 바람은 무언가 다른 걸 싣고 있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에 한 번도 감흥 따위 가져 본 적이 없었는데.

<아쉽군.>

그는 겪을 만큼 겪었다. 더 이상 세상에 궁금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도하의 말대로 가장 정당한 기적, 그 기적으로 이어진 세상은 뭔가 다를지. 어떻게 변할지.

그의 말이 다 옳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이런 세상에서 계약자로서 살아가겠다는 이도하를 보니 사실은 정말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영원히 볼 수 없을 시간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야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절대로 볼 수 없는 것이라니. 참 이 세상답다.

픽 웃으며, 해밀턴 블랙은 생각했다.

‘기드온.’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주마등이다. 사람이 죽기 전에 본다는 주마등 따위는 수도 없이 봤는데 이 목소리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아니, 그가 기억하는 이래로는 처음이다. 그 길었던 생애 동안 꿈에서도 본 적이 없었는데. 진짜 죽음 앞에서야 날 찾아와 주는구나.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거위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 누군가가 질퍽한 진흙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 햇빛이 쨍했던 어느 날 절 이렇게 돌아봤었다. 눈이 시려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빛이 어른거리는 얼굴이 보이는 것도 같다고 생각한 순간, 모든 게 꺼졌다.

고개가 툭, 떨어졌다. 마치 잠든 것 같았다. 천 년이나 이어진, 스스로조차 어쩌지 못했던 긴 생의 마지막이라기에는 퍽 허무한 죽음이다.

[죽음이 다 그렇지.]

앙그라엘 왕의 죽음 앞에서 그가 했던 말 그대로. 이명은 가라앉고, 다시 조잘거리는 것 같은 사소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도하는 잠시 묵묵히 서 있어 보았다. 당장 우르릉, 하고 세상이 무너질 듯 요동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잔잔하고 조용할 뿐이다. 이 남자가 여기 살아 있든, 죽었든 관심 없는 것처럼.

잠시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이도하가 몸을 돌렸다. 곧바로 도약하려던 그가 멈칫했다. 그가 소파로 다가갔다. 어느새 잠에서 깬 고양이가 초록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도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쳐다본다.

“…이제 여기 있으면 안 돼.”

이도하가 고양이를 안아 들었다. 고양이는 순순히 이도하의 품에 안겼다.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은 건 정적 속,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는 식은 머그잔과 열린 창으로 지나는 바람, 그리고 자는 듯 고개를 떨군 해밀턴 블랙뿐이었다.

***

이도하는 서울에서 가장 높은 타워의 꼭대기에 올라앉아 있었다. 어렸을 때 제법 자주 놀았던 정글짐이 생각난다. 얼기설기 얽힌 철근 구조물 사이로 높은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생생하다. 머리고 옷자락이고 쉴 새 없이 휘날렸고 바람에 밀려 그대로 떨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까마득한 아래에 사람은 점처럼 보이고, 건물들도 옹기종기 모아 놓은 블록 장난감 같다. 이리 높이서 보니 무너지고 뒤엉킨 것들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노을이 짙게 가라앉고 있어 그저 전부 예뻤다.

“아니, 불꽃놀이보다 뭐라더라. 일루미네이션이라고. 그걸 한번 해 볼까 봐.”

이도하는 늘어트린 다리를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고양이는 동기인 윤윤형에게 잠깐 들러 맡겼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던 것 같은 윤윤형은 이도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얼떨떨해하는 채로 난데없이 그가 품에 안기는 고양이를 받아 들었더랬다.

웬 고양이냐, 하며 황당해했지만 다른 걸 묻지는 않았다. 혹시나 또 이도하가 누군가와 같이 왔을까 봐 그의 등 뒤를 흘긋거리며 어지럽기 짝이 없는 집을 약간 민망해했을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참 평범하게 비상한 친구 놈이다. 영 황당해하던 그 얼굴을 떠올린 이도하가 픽 웃었다.

‘궁 외벽에?’

“끝내 줄 것 같지 않아?”

웃음소리가 들린다.

‘혼자 봐야 할지, 모두가 보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걸.’

“왜?”

‘자랑하고 싶잖아.’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둘 다 하면 되지.”

한 번은 우리끼리만 보고, 한 번은 다 보여 주고. 그냥 다 하면 되지. 이도하가 말했다. 그러자, 하고 시오한이 잔잔히 대답한다.

“…뭘 보고 있어, 시오한?”

이도하가 물었다.

‘달.’

“아직 밤이야?”

‘내내 밤이었어.’

“…….”

그래.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그게 맞긴 하다. 여태 그의 세계에서 시간이 생각과는 달리 흘렀던 일이 많아 간과했던 모양이다. 이도하가 조금 몸을 뒤로 기대었다. 고개를 꺾어 머리 위를 올려다보니 이미 짙푸른 색으로 가라앉고 있다. 저 먼 지평선만 아주 붉었다.

잠깐 하늘을 보던 이도하가 일어섰다. 그는 아슬아슬한 가장자리를 걸어, 붉게 노을이 지는 하늘의 반대편을 향해 섰다. 이쪽은 조금 더 빨리 밤이 내려앉고 있다. 이만하면 달이 보일 때인데, 어딜 봐도 찾을 수 없었다.

“가만 보면 당신 꽤 달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응. 몰랐는데… 예쁘더라고.’

시오한이 대답했다.

‘참 많이.’

“…….”

잠깐 멍해졌던 이도하가 옅게 웃었다. 그래, 그는 이렇게 매 순간 제게 말하고 있었다. 늘 그랬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다시 만난 제게 내색조차 하지 않고, 시오한은 그저 제 기억을 온전히 담은 그로서 그곳에 있었다. 제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것들, 버렸다고 생각한 것조차 다 그가 그러모아 품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제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천방지축이었던 어린 시절, 멋대로 나타나 멋대로 굴었을 뿐인 아이에게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주었던 그 태자가 좋아 어쩔 줄 몰랐던 어린 이도하처럼. 퉁명스러운 제 앞에서 가증을 떨며 약한 척하던 능청스러운 황제를 결국 제가 다시 사랑하게 된 것처럼.

괜찮을 것이다.

쿵-

이도하는 흔들림을 느꼈다.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요동치는 그런 흔들림은 아니었다. 세계가 흔들렸다.

우르슬라가 선택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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