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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229화 (228/250)

229화

그가 말했다. 달빛이 온통 그의 주변으로 부서지는 가운데, 시오한이 조금 웃는다.

“애초에 이 모든 책임은 내게 있으니.”

가장 처음. 제게로 떨어진 아이가 모든 이치를 부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눈 감고 모른 척한 그의 탓. 기어이 세계가 한 번 무너지는 것을 보고서도, 그 아이가 그리 우는 걸 보고서도. 그 아이를… 잊는 게 이치라는 걸 알면서도 아득바득 그 아이를 붙잡고 있었던 그의 탓. 사실 불러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도 기어코 다시 이 세상으로 불러들인 그의 탓.

그리하여 끝끝내… 이런 선택을 해야 하게 만든 그의 탓.

이 모든 게 그 대가라고 하면, 이건 그가 기꺼이 감당해야 할 몫일 테니.

“그래도 돼, 화이람.”

“아니.”

이도하가 대답했다.

“당신이 답이야, 시오한.”

일그러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리며 이도하가 말했다.

“당신이 답이었어. 처음부터.”

황금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가늠해 보려는 듯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이라, 이도하는 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 어떤 계산이나 궁리도 없이 그는 모든 걸 해결해 버리고 만 것이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맹약 말이야, 시오한.”

“맹약?”

“엘하시온을 만났어. 당신이 만들어 낸 그 균열 속에서.”

[하나만.]

[네?]

[맹약이 뭐예요?]

그 시점의 엘하시온은 몰랐다. 가엘. 그가 희생시킨 목숨과, 그들로 하여금 흘리게 한 피. 그렇게 소환해 낸 아폴리온. 그 최초의 소환이 이루어진 밤에 있었던 흔들림. 파편 같은 그 조각들 앞에서 그는 고민하고 궁리했다. 그들의 계약에 분명 뭔가가 있을 거라고. 그 조각들을 하나로 잇는 연결점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의 결과에 다가서고 있었으나, 세계 단위의 개념을 떠올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

그러나 그 조각들의 완성인 이도하를 보고서는, 단번에 깨닫고 만 것이다. 가장 첫 번째 밤에 그가 시오한을 보고 깨달았던 것처럼.

[창이요.]

푸른 불티로 흩어져 사라져 가는 이도하를 보며, 엘하시온이 말했었다.

[각기 다른 두 세계의 존재. 계약주와 계약자를 하나의 존재로 묶어서… 세상을 꿰뚫는 창이에요.]

각기 다른 두 존재를 하나로 묶어서.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도하도 깨달았다.

제 감정을 느끼는 시오한. 그의 감정을 느끼는 저. 제 특기를 제 것처럼 쓰던 시오한. 세계를 뛰어넘어 제가 말을 건넨 시오한. 그의 시야를 보던 저와, 제 시야를 보던 시오한. 황금색으로 물든 그의 눈으로 그를 보던 저와… 파란색 섬광으로 물든 눈으로 절 보던 시오한.

그의 존재가 제게로 흘러들어 오는 듯했던 그 기묘한 감각. 마치 그들이, 하나의 점 위에 선 것처럼. 그들이… 하나의 존재로 묶인 것처럼.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목숨에 목숨으로.]

죽음 따윈 상관없이, 오직 한 번만 더 보길 바랐던 기원 하나로 제 모든 걸 부어 완성한 소환진. 목숨을 바치고… 생명을 내주었던 계약.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요. 반드시 약속을 지킬 수 있게.]

엘하시온이 말했다.

[하지만 생각하고 보니, 이건 불가능한 일이네요.]

누가 기원을 위해 그렇게 피를 다 쏟아부어 목숨을 바칠 것이며… 바쳤다고 한들 다른 세계로부터 불려 온 이가 무엇을 위해 기꺼이 제 생명을 내어줄까.

기적적으로 살려 주고자 하는 이가 불려 온다고 한들, 그가 그럴 힘까지 가졌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모든 피를 다 쏟아부은 이에게, 제 피를 내줘 살릴 만한 능력을.

그래서 가엘은 틀렸고, 그래서 그는 실패한 것이다. 살고 싶었기 때문에, 가엘은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바쳐 기원을 이루려 했다. 목숨이란 분명 대가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수십 명의 목숨을 바친 그의 기원은 찰나의 순간 세계 건너 아폴리온에게 닿았고, 그를 불러올 수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기원은 ‘끝나지 않는 시작’인 아폴리온-해밀턴 블랙에게 닿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게 해서 그의 기원이 이루어졌다고 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잃지 않은 것은 희생이라고 할 수 없었다.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아 온 해밀턴 블랙은 기꺼이 가엘을 살려 주고자 했지만, 그에겐 그럴 능력이 없었다. 아폴리온은 홀로 죽지 않을 뿐 타인을 살게 할 능력 같은 건 없었다.

타인을 희생한 피로 불려 온 이와, 그런 그가 목구멍으로 몇 방울 떨어트려 주었을 뿐인 피. 그건 잘못된 맹약이었던 것이다. 가엘은 죽었고, 인과에 묶인 아폴리온은 비틀어져 깨진 세계의 틈 사이에서 스토퍼 노릇을 하고 있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건 그 때문이었다. 잘못 열려 부서진 틈, 잘못된 맹약, 잘못 엮인 인과로 인해서. 해밀턴 블랙은 틀렸다. 이도하 때문이 아니라, 그의 탓이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어요.]

이도하를 보며, 빙그레 웃은 엘하시온이 말했었다. 하얗게 물들어 사라지는 시야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잔상처럼 맴돌았다.

“가장 정당한 기적.”

시오한, 그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기적. 무엇이든 좋으니 자그만 변화라도 바랐던 황태자와, 그저 즐거움을 찾아 세계를 넘어간 아이가 만났던 단 한 번의 우연. 잊혀야 마땅했던, 한 번의 우연에 불과했던 저를 그가 기적이라고 여겨 주었기 때문에. 조금 놀란 듯 저를 보는 시오한을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선택은 필요 없어, 시오한.”

세계를 닫을 일은 없다. 정당하게 두 세계를 한 점으로 꿰뚫은 창-그들의 존재가 있기에 세계는 닫히지 않을 것이며, 무너지지도 않을 것이다.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말 그대로.

처음부터 답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시오한이 그를 불렀던 그때부터. 제가 시오한을 살리기 위해 제 피를 내어주었던 그때부터. 줄곧 그들에게 있었다.

“…과연.”

마침내 시오한이 가늘게 웃었다. 이도하가 그토록 좋아하는 황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바람에 날린 황금빛 머리칼이 온통 이도하의 주변으로 너울거리며 반짝인다. 다른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어 보였다.

늘 그랬듯이, 그는 말하지 않았을 뿐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도하보다도 그가 먼저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리스티리움의 황제인 그에게, 이도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알려지지 않을 리 없으니.

“그대는 기적이지.”

“아니, 내가 아니라 당신이라서…. 시오한, 너니까.”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너였기 때문에.

이도하가 그를 끌어당겼다. 성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밤에도 따뜻하게 온기를 품고 있는 입술이 그를 감쌌다. 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주체할 수 없는 것처럼 어쩔 줄 모르고 달려들던 입맞춤은 점점 변했다.

어떤 성적인 의미보다도, 그에게 닿은 감각 그 어떤 것도 잊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이도하는 그를 붙잡았다. 떨어질 수 없는 사람처럼. 시오한이 조심스레 그를 떼어 냈다.

“…아폴리온. 해밀턴 블랙을… 죽일 거야.”

이도하가 말했다. 그는 죽어야 한다. 세계를 정당하게 꿰뚫은 하나의 점, 부서져 비틀린 틈. 두 개의 축으로 인해 세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라면, 보수해야 하는 것은 부서진 틈일 테니까.

그러나 그들의 존재를 묶어 놓은 맹약이 있다고 해도, ‘엘하시온을 죽인 해밀턴 블랙이 살아 있는 미래’를 고정하고 있던 그가 사라짐으로써 우르슬라가 엘하시온의 죽음을 바꿀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엘하시온의 죽음에 상관없이 시오한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나… 엘하시온이 죽은 과거로부터 비롯된 그의 존재가 고정됨으로써, 엘하시온의 죽음이 번복될 경우 이제 그사이의 역사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어진다. 꽈배기처럼, 무슨 일이 어떻게 비틀어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의 존재는 변하지 않을 것이나, 그게 이도하가 아는 시오한일 것이라고는 누구도 장담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이도하는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우르슬라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알면서도.

“내가 더는 이 제국의 황제가 아닐 수도 있겠네. 어느 산속 구석의 범부가 될 수도 있겠어.”

“당신이?”

이도하는 웃었다. 황제가 아닌 그를 상상하기는 어려웠다. 어쩌면 그는 이리스티리움이 아니라 또 다른 나라의 황제가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어디서든 그는 군림하며 다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가 아니게 되더라도, 시오한은 시오한이다. 무엇이 되든 그는 혼자서도 반짝일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당신은 당신이야.”

“그대를… 잊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기억할게.”

이도하가 말했다.

“…내가 기억할게, 시오한. 내가, 당신에게 갈게.”

시오한이 잔잔히 웃는다.

“하지만 화이람, 그 여인이 그리 시간을 놓으면….”

엘하시온의 죽음을 번복하든, 하지 않든. 해밀턴 블랙이 죽은 미래를 얻은 우르슬라는 더 이상 천 년 전의 시간을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그대 세계의 시간이, 제자리로 돌아갈 테지.”

시오한이 말했다. 느린 깜빡임에, 속눈썹이 스친다. 2001년, 16살이었던 이도하. 2003년, 8살이었던 이도하. 과거에 머무르는 우르슬라와, 현재에서 과거를 돌이키고 있는 우르슬라.

그녀가 흘러가야 할 시간을 잡고 놓지 않음으로 인해 두 개로 찢어지고 뒤엉켜 버렸던 시간은 마침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태엽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듯, 잡아 늘인 고무줄이 원래대로 돌아가듯이.

충돌한 두 시간이 마침내 하나로 되돌아온 자리에 남은 제가 어떤 저일지, 이도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만은 분명하다.

“…난 이게 있잖아.”

얼핏 웃으며, 이도하가 말했다. 제 얼굴을 감싼 그의 손 위로 손을 덮으며, 가장 처음 시오한의 손이 스쳤던 곳을 매만졌다.

“이건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거고… 맹약도 마찬가지야.”

절 바라보는 황금빛 눈을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우르슬라가 아무것도 돌이키지 않기로 하면, 날 기억하고 있는 당신도 있겠지.”

그가 고개를 숙였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이 한데 엉키고, 이마가 맞닿았다.

“…어찌 되든, 반드시 당신에게 돌아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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