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우르슬라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너무 아프지 않게. 너무 상처받지 않게. 엘하시온은 말했지만, 이도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어떤 수만 가지 말들도 결국 다 의미 없을 것이었다.
“내가 내 온전히 계약주를 지킬 수 있게. 당신은… 당신은 알잖아.”
내리감는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우르슬라의 어깨를 향해 떨어지던 눈물방울은 그녀에게 닿아 스며드는 대신, 동그란 방울인 채로 그 위를 도르륵 굴러 이내 허공으로 떠올랐다. 당신은 알잖아. 이도하가 울음기 묻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제가 계약자가 아니고, 그가 계약주가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 그냥 그는 그대로, 저는 저대로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 그러나 또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은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라.
특기자도, 인소더블도 아닌 이도하와 우르슬라. 시오한과 엘하시온. 우연인지, 애초에 그들이 인소더블이기 때문에 생긴 공통점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특기가 아니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이들이었다. 그러나 또 그래서, 그들을 만났기 때문에. 겪지 않았을 일들을 너무도 많이 겪었다.
“당신이 멈춰야 해.”
이도하가 말했다.
“당신이 놔야 해.”
천 년 전, 엘하시온이 숨 쉬고 있던 그 시간.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녀가 놓지 못하고 있는 그 시간을.
“미안해.”
천천히, 우르슬라가 고개를 들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 사이로 멍한 푸른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이도하가 눈물을 떨어트렸다.
“제발 도와줘. 날 좀 살려 줘….”
제발. 거듭하는 목소리가 켜켜이 쌓이고 쌓여,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메아리친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듯하던 우르슬라가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온통 하얗게 펼쳐져 있던 공간이 그녀에게로 빨려들어 간다.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가장 먼저 귀를 강타했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을 때, 그는 낡은 카펫 바닥에 무릎을 대고 있었다. 그는 제 얼굴이 온통 흥건하게 젖어 있음을 깨달았다.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며, 뿌옇게 어른거리던 시야가 깨끗해졌다.
고개를 떨어트린 우르슬라가 보인다. 길게 늘어진 푸석푸석한 머리칼, 그녀의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늙은 얼굴. 여전히 초점 없이 허공을 맴도는 눈동자가 깜빡이는 순간, 그 눈에서도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의 무릎에 얹은, 이도하의 손등으로. 이도하가 그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하아- 한숨이 소리 없이 퍼졌다.
쿠르릉.
건물 전체가 울부짖듯 흔들렸다. 붉은 조명이 위협적으로 번쩍이고, 알람 소리는 이제 귀를 찢을 듯하다. 창문도 시계도 없는 이곳에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든 진입에 실패한 독일인들이 이제 건물을 거의 찢기라도 할 기세라는 건 알겠다. 고개를 든 이도하가 축축한 얼굴을 훔쳐 냈다. 우르슬라의 다리 아래로 손을 넣은 그가 그녀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무게도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다. 그제야 이도하는 의자에 파묻혀 담요에 싸여 있던 그녀의 몸이 얼마나 깡말랐는지 알았다. 이미 파랗게 물든 눈동자로, 이도하가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닿은 책장이 부들부들 떨더니, 별안간 미친 듯이 책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책장 뒤에 기막힌 장난꾸러기가 숨은 것처럼 마구잡이로 뽑혀 나온 책들이 사정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딪혀 찢어지고,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장식품들을 다 쓸어 버리는가 하면 의자에 명중해 의자까지 날려 버리는 등 인정사정이 없었다. 낡기는 했으나 그래도 꽤 따뜻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던 방이 그저 난잡한 쓰레기통이 되어 버린 건 아주 순식간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온 사방에 책이 내다 버린 바나나 껍질처럼 널브러지자 이제 온갖 잡기가 다 부서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발로 차고, 던지고, 주먹질을 한 것처럼 우지끈! 힘겨운 소리를 내며 찢어지고 부서져 파편으로 나앉았다. 완전히 개판이었고, 한바탕 태풍이라도 쓸고 간 것처럼 되었다. 원래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다.
붉은 조명, 고막을 때리는 알람과 한데 섞여 진동하던 이명이 가라앉았다. 콰직!! 천장이 뜯어지다시피 열리며 일련의 무리들이 다급하게 들이닥쳤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트린 것은 예의 그 쓰레기장뿐이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
주홍빛 노을이 물든 시트 위로 갈색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시트 위에 우르슬라를 눕힌 이도하는 그녀의 무릎 위에 얹혀 있던 담요를 완전히 펼쳐 덮어 주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빛 속에서 먼지가 뽀얗게 피어오른다. 마른 풀 냄새가 나고, 밖에서 지나가는 이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온다. 기가 막히게도, 평화로웠다.
이곳은 지진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었다. 독일의 아주 구석에 위치한 시골이었고, 사람도 얼마 없었다. 키가 작은 조그만 집들이 동화책의 한 풍경처럼 늘어서 있다. 우르슬라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었다.
가구마다 먼지만 뽀얗게 앉은 채 비어 있다. 어린 나이에 대학을 갔고, 그마저도 금방 졸업해 연구원이 되었으니 오래 머물지는 않은 곳이다. 그녀에게 추억이랄 것도 없는 곳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나는 곳이 여기밖에 없었다.
이도하의 푸른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다. 창가로, 벽으로, 천장으로, 문에서 바닥을 지나 다시 우르슬라로 이어진 시선은 그뿐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이면 어김없이 어렴풋이 푸른빛을 띤 유리막 같은 것이 반짝 빛났다 사라졌다. 이만하면 누구도 그녀를 쉽사리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이만하면….”
중얼거린 이도하가 고개를 내렸다. 우르슬라는 마치 잠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일정하게 가슴이 오르내릴 뿐, 미동도 없다. 그래도 그녀의 주름진 얼굴에 스며들듯 닿은 햇빛이 꼭 그녀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것처럼 보인다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
그가 고개를 들었다. 침대 가에 서서, 이도하는 해가 기울어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찬찬히 검은색으로 가라앉았다. 언뜻 멍해 보였다. 그러나 사방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며 발밑에 소환진이 펼쳐진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화이람.]
이도하는 손목에 닿아 오는 온기를 느꼈다. 손등을 타고 미끄러진 손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그의 손을 단단히 잡는다. 바람이 분다. 차가운 실타래 같은 것들이 스치고, 싸늘한 밤 내음이 아늑한 저녁나절의 공기를 밀어낸다. 황혼 아래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어느새 까만 밤이다. 풍성한 옷자락이 날리며 그에게 휘감겼다.
“화이람.”
귓가에, 지독하게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세 번. 딱 세 번 생각했거든.”
이도하가 입을 열었다. 그가 몸을 돌렸다. 단단하게 마주 잡은 손이 스르륵 풀어지고, 이도하는 그를 마주 보았다. 시오한을. 그의 등 뒤로, 낮게 뜬 거대한 달이 휘영청 떠 있다. 빛무리가 온통 그를 향해 흘러내린 것처럼 반짝거린다. 긴 황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유영하듯 휘날리며 반짝거린다.
손을 뻗어, 이도하는 그의 얼굴을 가린 머리칼 몇 가닥을 걷어 냈다. 빛줄기처럼 뻗은 속눈썹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오직 그를 보고 있다. 애초에 그렇게 빚어낸 것처럼 표정 없는 완벽한 얼굴이, 거짓말처럼 미소 짓는다. 그의 얼굴에 닿은 빛이 그 부드러운 굴곡 위로 흐른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예외 없이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 눈동자를 이도하는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이도하가 입꼬리를 당겨 보았다. 웃으려고 했는데, 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딱 이렇게 불러 주네.”
“내가 보고 싶었어?”
“몰랐나?”
“그대가, 서글퍼하기에.”
당신이 늘 나를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이 늘 보고 싶은 건데. 장난을 치려던 이도하가 입을 다물었다. 시오한의 손이 이도하의 입가를 스쳐, 조심스레 뺨을 감싸 안았다.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차가운 와중에도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그 손에, 이도하가 얼굴을 기울였다. 조심스러운 그 틈을 견딜 수 없는 것처럼. 엄지가 천천히 그의 눈 밑을 쓸듯이 매만졌다. 그곳에 새겨진, 그가 준 이름을 매만지듯이. 혹은 아직 흐르지 않은 눈물을 닦아 내듯이.
“늘 그대가 날 생각하고 있길 바랐지만… 이런 마음이라면, 좋아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걸.”
“…왜. 기쁠 때든 슬플 때든 나한텐 당신 생각밖에 없다고 하면 되지.”
“어찌하여 그대가 슬플까를 생각하게 되니까.”
이도하가 제 뺨을 감싼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절대로 놓을 수 없을 것처럼 그 손을 꽉, 쥔 이도하가 입을 열었다. 꽉 메인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좋아서.”
“…….”
“당신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아, 시오한….”
제가 웃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이도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주체할 수가 없었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이도하는 시오한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따뜻한 입술이 속눈썹에 먼저 닿았다. 감을 듯 말듯 떨리는 눈꺼풀 아래를 아주 천천히 쓸어 낸다.
“그것참… 난감하네.”
꾹 입술을 누른 시오한이 말했다.
“그리 말하며 그대는 이리 울고 있으니. 그대를 아프게 하는 게,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라고 하니….”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몰아치는 바람에 휘날린 그의 옷자락과 머리칼이 정처 없이 내민 그 손에 여지없이 휘감겼다. 제 발로 빨려들어 오듯이. 이도하가 그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화이람. 그대가… 날 기억해 주기를 바란 적이 없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거야.”
눈 아래, 시오한이 가만히 입술을 눌렀다.
“그대가 날 기억해 줘서 기뻤고… 그대와 우리의 어린 날을 얘기할 수 있어 좋았어. 하지만 행여 내 기억으로 인해 그대가 아프다면. 내 존재가, 그대를 힘들게 하면….”
그의 뺨을 매만지며, 시오한이 말했다.
“날 잊어도 돼, 화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