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그럴게요.”
잠긴 목소리로, 이도하가 답했다. 엘하시온이 기쁘게 웃는다. 그 얼굴 위로 푸른 불티같은 것이 아른거렸다.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희미하게 푸른빛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가야 한다. 그는 우르슬라를 길로 하여 이곳에 와 있었고, 우르슬라가 역소환된 지금은 이미 지나치게 오래 머물고 있는 셈이었다. 익숙한 듯 엘하시온이 한 발 물러섰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그를 본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나만.”
“네?”
이런 식으로 그를 마주할 수 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맹약이 뭐예요?”
이도하가 물었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리고 불현듯, 그가 놀란 얼굴을 했다. 뭔가 깨달은 것처럼.
“아.”
엘하시온이 빙그레 웃었다. 그가 입을 벌린다.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이도하가 뒷걸음질 쳤다. 온통 하얗다. 세상의 틈, 어긋난 시간의 어느 사이. 그가 매개로 했던, 우르슬라의 머릿속이다.
“맹약이….”
이도하가 헛웃음을 지었을 때였다.
“맹약은 아무것도 아니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도하가 뒤돌아섰다. 그녀가 서 있었다. 안경 너머, 푸른빛 눈동자로 그를 사납게 보면서. 이도하는 그녀의 차림이 익숙한 것을 깨달았다. 그가 본 우르슬라의 옷 그대로였다. 안락의자에, 오래된 인형처럼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 그대로다. 그가 아주 예전에 보았던 것처럼, 과거에 보았던 것처럼 머리가 짧고 젊다는 것만 다를 뿐.
“맹약? 그런 건 없어. 반드시 지켜질 약속은 이별이고,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맹세는 허울이지.”
봤구나. 우르슬라는 엘하시온이 마탑의 서고에 남긴 그 기록을 보았음이 틀림없다. 이전에는 우르슬라가 어떤 식으로든 엘하시온과 함께 맹약 같은 걸 고안해 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도하의 계약과 그나마 가장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는 가엘의 계약을 내내 고민하고 궁리하던 엘하시온을 보면서, 어쩌면 우르슬라가 스스로 떠올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엘하시온이 마법사였듯, 그녀도 연구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 보니, 그건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수천 번, 수만 번 되풀이되는 시간 속에서 그녀가 했을 후회, 원망. 어떻게 해도 바뀌지 않는 엘하시온의 죽음을 거듭하면서 돌파구를 찾아보려 하던 와중에 그녀는 찾은 것이다. 엘하시온이 잠깐 들렀던 마탑, 어쩌면 엘하시온이 궁에 가지 않도록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을 지도 모르는 그곳에서, 엘하시온이 남긴 마지막 일기를.
결국 그녀에게는 헛된 희망이었을 뿐이었겠지만.
“…내가 본 건 좀 다른데.”
이도하가 말했다. 우르슬라가 냉소했다.
“애초에 그걸 믿지 않았으면, 왜 아이라에 기록을 남겼는데?”
“…….”
“당신 마음도 엘하시온과 다르지 않잖아.”
헤어지지 않길 바라는, 소망.
“아니.”
우르슬라가 말했다.
“난 계약자가 된 걸 후회해. 계약주와 계약자는 절대로 함께할 수 없어. 애초에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인연이지.”
“엘하시온이 들으면 울겠는데.”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도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넓은 곳이었다. 오직 하얀 빛뿐이었고, 어딜 딛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엄청나게 먼 것 같았으나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 절대로 가까이 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도하는 그 텅 빈 공간을 뚜벅뚜벅 걸어, 그녀의 앞에 다다랐다.
우르슬라가 이도하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작다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작고, 생각보다 말랐다. 가녀리다는 말이 어울릴 법한 여자였다. 아니, 가녀리다는 말보다는 단단하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이 작은 여자가 무엇을 겪어 왔는지 아는 이도하는 안다.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던 이도하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하지 마!!”
흠칫 물러나는 우르슬라를 이도하가 얼른 붙잡았다. 그녀가 마구 발버둥 쳤다. 이도하를 때리고, 차고, 물었다. 주먹까지 날렸다. 되는대로 막아 냈지만 뺨에 직격한 주먹은 제법 매서워 머리가 얼얼할 정도였다. 무슨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두어 대 얻어맞고, 종아리를 몇 번이나 차이고, 손목을 깨물린 다음에야 이도하는 간신히 그녀를 붙잡아 놓을 수 있었다.
우르슬라가 헉헉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고, 이도하도 썩 사정이 좋지는 않았다. 그보다 몸무게가 반절도 안 나갈 것 같은 여자라고 해도 온 힘을 다해 밀어 대니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맞지도 않고 차이지도 않기 위해서 뒤에서 그녀를 거의 끌어안다시피 해야 했다. 이렇게 안아 주라고 한 게 아니었을 텐데. 망할. 이도하가 말했다.
“엘하시온이 전해 달라는 말이 있으니까-.”
“개소리하지 마.”
우르슬라가 날카롭게 답했다.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뭔가 이상하다.
“…놓을 건데, 부탁이니까 때리지 마.”
도망가지도 말고. 혹시나 싶어 덧붙이며, 이도하가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우르슬라가 기다렸다는 듯 탁, 몸을 퉁기며 즉시 돌아섰다. 경계하는 모습이 날 선 고양이 같다. 양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이도하가 찬찬히 그녀를 훑었다. 온통 흰 빛뿐인 주변도. 그리고 다시 우르슬라를 보고서야, 이도하는 마침내 깨달았다.
“…여기, 몇 명이나 왔었지?”
우르슬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꾹 다문 입이 고집스러웠고, 바라보는 눈에는 오직 날 선 경계뿐이다. 그녀의 머릿속, 이곳에 이도하와 비슷한 이들이 벌써 몇 명이나 들락거렸던 것처럼.
미친 새끼들.
지그시 올라오는 분노에 이도하는 이를 악물었다. 짙은 혐오와 환멸감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독일은 그녀가 과거로부터 매개하는 마력으로 돌아가는 나라였다. 제 나라에서 인소더블이 나왔다고 온 세상이 떠나가라 떠벌이며 자랑을 해 댔고, 그녀가 계약을 했던 순간은 그것보다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다. 나라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맞춰 바꾸었다.
그들은 벌써 10년, 20년을 미리 앞서 보았다. 그런데 설마 그녀가, 그들이 그토록 자부했던 그들의 인소더블이 고작 몇 년 만에 계약주를 잃을 줄은 상상도 못 하고서.
그러니 그녀는 과거로 돌아가야 했고, 그 과거를 붙잡고 있어야만 했으며, 그걸 놓아서도 안 되었다. 또한 그들은 마냥 우르슬라를 믿고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확인하고, 이미 부서진 그녀를 두드려 담금질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까지 들어와서.
“…보여 주고 싶은 게, 전해 줄 게 있어. 잠깐만.”
이도하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주 천천히, 그녀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으리란 것을 보여 주듯이. 그는 아주 느리게 손을 뻗었다. 매서운 눈길이 느껴지는 가운데, 조심스러운 손끝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아주 가볍게. 이도하의 눈이 푸른빛으로 번졌고, 일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요, 그만해도 된다고 좀 전해 줄래요?]
물기가 어려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 가늘게 웃는 앳된 얼굴.
[놔도 괜찮다고요. 그래도 괜찮다고.]
[만날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니. 바보네, 이올라.]
눈물이 흐르는 얼굴. 민망하게 웃으며, 뺨을 닦아 내는 서툰 손길.
[난 이올라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하나를 돌이켜 모든 걸 바꾸려는 건 이올라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다정하고 상냥하게 바라보는 눈.
[다른 누구보다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너무 아파하지 않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나는 이올라를 만나서 정말 좋았으니까, 이올라도 그렇게 날 기억해 주기를 바라요.]
떨어지는 눈물. 웃음.
[어차피 난 여기 없는걸요.]
주마등처럼 스친 기억이 흩어지고, 이도하의 손이 떨어졌다. 크게 뜨인 우르슬라의 눈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도하를 보았다.
이게 조작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안다. 환상도, 세뇌도, 거짓도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엘하시온, 엘하시온. 그들은 쉴 새 없이 그를 입에 담았지만, 그들은 엘하시온을 모른다.
그 아이가 어떤 얼굴로 웃는지, 부끄럽고 쑥스러울 때면 어떤 얼굴을 하는지.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지 하나도 모른다. 그들이 말하는 엘하시온은 늘 보이지 않는 얼굴로 울고 있었을 뿐이었다. 살려줘. 도와줘, 이올라. 그렇게 말하면서. 우르슬라가 단 한 번도 엘하시온이 우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아는 엘하시온은 늘 웃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기 때문에. 그러니 이건 그녀의 기억으로 만들어 낸 거짓도 아니었다.
엘하시온이었다.
그녀의 눈에서, 속절없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도하가 조금 물러섰다.
“...엘.”
우르슬라가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엘. 엘. 연이어 부르는 이름이 너무 애달파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몸을 웅크린다. 떨어진 눈물이 방울방울 흩어졌다. 그 따뜻하고 조그만 방울이 이도하의 손등을 스쳐 지나갔다. 이도하가 손끝을 움츠렸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그 안락의자에 못 박힌 늙은 그녀의 모습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계약주를 잃고 어쩔 줄 몰라 엉엉 울던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꾹 입술을 문 이도하는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기다렸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마침내 주변이 온통 흘러가는 눈물방울로 가득 찰 때까지. 더 이상 그가, 스쳐 가는 그 짧은 온기를 참아 낼 수 없을 때까지. 이도하가 무릎을 굽혔다. 쪼그리고 앉은 우르슬라 앞에 무릎을 대고, 쳐다보지 않는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기억해?”
그가 입을 뗐다.
“‘죽여’. 당신이 나보고 그랬어. 해밀턴 블랙. 아폴리온. 그자를 죽이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이도하가 말했다.
“그렇게 할게.”
그가 손을 뻗었다. 사방에 유영하는 눈물방울들이 그의 손에 부딪혀 밀려난다. 손끝이 차갑게 식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쌌다. 열이 올라 뜨끈하다. 입술을 깨문 이도하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할게. 그러니까… 날 도와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