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미안해, 엘.”
“이올라.”
피 냄새가 떠도는 복도에 두 사람의 목소리가 울렸다. 불쾌하고 후덥지근한 열기가 어두운 등불처럼 아른거린다. 길게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엉켜 있다. 꺾어진 복도 끝, 벽에 등을 기댄 이도하는 가만히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내 잘못이야. 미안해, 엘. 미안-.”
푸른빛이 확 번졌다. 복도 끝에 늘어진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빛에 일순 흐려졌다. 잠시 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하나의 그림자뿐이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만 남아 있다. 이올라가 역소환된 것이다.
할 말도 다 끝맺지 못할 정도라면, 그녀는 여기서 특기를 쓴 게 틀림없었다. 이도하는 불쾌한 열기와 비릿한 피 냄새 사이에 남은 그녀의 흔적을 읽어 냈다. 우르슬라가 특기를 쓴 흔적이 잔향처럼 남아 있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의 눈으로 이 복도를 보았었다. 왕이 보낸 기사 중 하나는 왕의 명령에 불복하고 엘하시온을 여기서 죽이려 했었다. 그가 왕에게 가지 못하도록. 혼자만의 힘으로 엘하시온이 기사에게서 벗어날 방법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시오한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틀림없이 이곳에서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밤이 계속 그렇게 반복되었을 리가 없다. 시오한은 애초에 이곳에 없어야 했던 이였다.
엘하시온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했던 그 밤과는 달리, 이 밤에 우르슬라는 엘하시온에게 곧장 달려왔다. 응답하지 못했던 그 소환 이후, 엘하시온이 죽는다는 걸 우르슬라는 알았을 테니까. 이번에는 어떻게든 그에게로 왔을 것이다.
반대로 말해서 반복되기 이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르슬라가 아무것도 알지 못했던 최초의 밤. 이도하와 시오한이 머물렀던 천 년 전, 가장 첫 번째 밤에 엘하시온은 이곳에서 죽었어야 했다는 말이 아닌가? 천 년 뒤의 시간이 이곳에 닿아, 시오한이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그게, 이치였더라면.
균열.
[화이람, 마탑이야.]
타박, 무겁게 깔린 적막 속에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멀어진다. 그 가운데, 이도하는 시오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가 날 본 곳, 화이람. 그대가 본 이올라의 기억과 달랐던 때가 있었다고 했지.]
되감기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시오한이 말했었다.
[균열은 거기서 시작됐을 거야.]
최초의 밤부터 시작된 균열. 시오한을 마주하고 뭔가를 깨달은 것 같던 엘하시온. 만약 가장 처음부터 균열이 일어난 채로 모든 게 반복되었다면.
이도하가 찾으려던 건 엘하시온의 모습이었다. 우르슬라는 이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한 발 멀리서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계속해서 그날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반복되는 시간 속 그의 모습이 어떤지, 벌써 수천만 번을 겪은 그녀의 시선이 아니라 멀리서 본 그의 모습이 어떤지, 그 기억을 찾으면 우르슬라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나려던 건 아니었다. 원래도 도박을 못 하는 성격이지만, 엘하시온은 이도하가 정말로 도박을 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이건….
숨을 삼킨 이도하가 몸을 돌렸다. 꺾인 복도 끝에서 벗어난 그가 흐린 등불이 밝힌 복도로 나섰다. 죽은 기사의 시체 아래로 피가 번지고 있다. 흩뿌려진 피가 싸움의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위로 실타래 같은 황금빛 머리칼이 흩어져 반짝거리고 있다. 멀어지는 뒷모습에 짧은 황금빛 머리칼이 흔들린다.
“엘하시온.”
타박. 발소리가 멈추었다. 천천히, 그가 돌아보았다. 황금빛 눈동자가, 이도하를 보았다. 조금 놀란 것처럼, 커진다.
“…엘하시온.”
“…….”
바닥에 흥건히 번지는 피를 밟고, 기사의 시체를 넘어 이도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엘하시온은 못이 박힌 듯 서서 이도하를 보고 있었다. 피가 느릿하게 흘러 바닥으로 점점이 떨어지고 있는 손에는 여전히 짧은 단도를 들고 있다.
그럼에도, 이도하를 경계할 생각 같은 건 없어 보였다. 이도하가 바로 앞으로 다가와 설 때까지, 그는 가만히 눈으로 그를 쫓을 뿐이었다.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엘하시온.”
마침내 그의 앞에 선 이도하가, 다시 그를 불렀다. 멀리서 보기만 했을 뿐, 이렇게 제대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세 뼘 정도는 작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앳된 얼굴이다. 둥그런 뺨에는 젖살마저 남아 있다. 비록 피와 땀, 먼지로 얼룩져 있지만, 그럼에도 가릴 수 없는 생기가 가득했다. 그를 보는 눈동자와는 달리. 물끄러미 그를 보던 엘하시온이 빙그레 웃었다.
“안녕하세요.”
“…….”
그렇게 웃는 얼굴이, 시오한과 몹시도 닮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이도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엘하시온이 흘긋 이도하의 뒤를 살폈다.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이도하의 눈동자에 감도는 의구심을 눈치챈 그가 먼저 말했다.
“혹시 같이 왔을까 싶어서요. 역시 그렇게는 안 되는구나.”
“…누구를.”
“이올라요.”
피가 묻은 얼굴을 대충 슥 문질러 닦으며, 그가 말했다. 이도하의 눈이 흔들렸다.
“조금 전의 이올라 말고… 이올라요. 아, 되게 이상하다. 그래도 무슨 말인지 알죠?”
“당신….”
다, 알고 있었나? 이도하가 흐린 말에 엘하시온이 답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는 것처럼.
“완전히는 아니고, 어렴풋이. 이올라의 힘을 아니까요.”
“…어렴풋이라면.”
“나, 곧 죽죠?”
엘하시온이 말했다. 이올라, 왜 그래?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가 침착했던 것처럼 차분한 얼굴이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사람,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행동. 분명 처음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 있잖아요. 꼭… 되풀이하고 있는 것처럼.”
주변을 크게 한번 둘러보며, 엘하시온이 말했다. 그가 단검을 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딱딱한 손잡이를 쥔 손끝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가 한다. 엘하시온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올라는 엄해서, 힘을 잘 쓰려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정말 그녀가 시간을 되풀이하고 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가령, 제 죽음 같은 것. 씁쓸한 목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나지막이 깔렸다.
“…물어볼 게 있는데.”
“…말해요.”
이도하가 어색하게 대답했다. 엘하시온이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망설이던 그가, 잠시 후 물었다.
“…몇 번이에요?”
“…….”
“이올라가… 몇 번이나 그랬어요?”
이도하가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닫았다.
“…하고 있어요. 할 수 있는 만큼.”
엘하시온이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죽지 않을 때까지.”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가 가만히 중얼거렸다. 엘하시온은 찬찬히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살피려는 것처럼. 이도하도 그 앳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그’와 똑 닮은 황금빛 눈동자가 응시하자, 이도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요.”
이윽고, 엘하시온이 입을 열었다.
“…그만해도 된다고 좀 전해 줄래요?”
“…….”
그가 말했다. 반짝 웃는다. 가늘어진 황금빛 눈동자에 어린 물기가 깨진 유리처럼 흐린 등불을 반사했다.
“놔도 괜찮다고요. 그래도 괜찮다고.”
마지막 말이 흔들렸다. 엘하시온이 짧은 웃음 같은 울음을 토해 냈다.
“만날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니. 바보네, 이올라.”
눈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깨끗하게 흘러내렸다. 이도하가 손끝을 움찔, 떨었다. 그가 손을 뻗었다. 앳된 뺨 위에 조심스럽게 닿은 손이, 눈물과 함께 엉겨 붙은 먼지와 피를 닦아 냈다.
조금 놀란 듯 이도하의 손을 보던 엘하시온이 아, 하고 민망하게 웃었다. 제 소매로 서툴게 쓱쓱 뺨을 닦아 낸다. 머리는 비상하면서도, 사소하게 서툰 것들마저 닮았다.
“…미안해요.”
이도하가 말했다. 엘하시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여전히 웃는 낯으로. 이상한 말을 다 한다는 듯이.
“난 이올라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그래서예요.”
제 죽음을 돌이키려는 계약자와, 명백히 계약명인 것을 눈 밑에 새기고서 그의 앞에 나타난, 아마도 그녀와 같은 시대에서 온 것 같은 또 다른 계약자. 이도하는 그가 저를 마주한 순간 다 알았음을 알았다.
한밤중에 기사들을 대동한 왕궁으로의 부름. 미친 왕. 공작의 부재. 포어 레펜스의 장자라는 제 위치. 예정된 죽음. 그 사실들과 고작 몇 마디 말로 그는 이도하가 생각했던 수십 가지 말을 다 앞질러 간 것이다. 이도하에게는 현재이고 그에게는 미래인 시간을 위해, 당신이 예정되었던 것처럼 죽어 줘야 한다는 그 말을.
그리고 이게 그의 결론이었다.
그가 아니라, 이올라를 위해서.
“하나를 돌이켜 모든 걸 바꾸려는 건 이올라가 아니라는 걸 아니까.”
그가 이도하와 눈을 마주했다. 계약자임을 여실히 드러내며,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는 눈동자를 통해 누군가를 바라보듯이. 황금빛 눈동자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빛이었다. 그를 닮았기 때문에.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그가 엘하시온을 닮았기 때문일 테지만, 이 다정함은 그들이 한 핏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는 걸까. 유독 그들의 다정함이 심장을 저미는 것 같다.
“다른 누구보다도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들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너무 아파하지 않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나는 이올라를 만나서 정말 좋았으니까, 이올라도 그렇게 날 기억해 주기를 바라요.”
그가 웃었고,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어차피 난 여기 없는걸요.”
이도하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미안해요. 그렇게 사과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다. 그는 이도하에게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건 이도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제 죄책감과는 별개인 일이었으므로, 그가 사과를 받을 이유가 없다.
“이올라 말이에요.”
엘하시온이 말했다.
“…한 번만 안아 줄래요?”
“…….”
조금 머쓱해하며, 그가 다시 말했다.
“어, 반응이 좀 안 좋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만요.”